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70화 (70/185)

70화

꽉 다문 마커스의 잇새로 가쁜 숨이 삐져나갔다.

벌써 쉬지 않고 이동한 지 3시간째.

호흡은 어느새 한계에 다다라서, 내쉬고 뱉을 때마다 비리고 짭조름한 피 맛까지 나고 있었다.

특히나 마커스는 최근에 저격탄을 맞고 수술 후 재활까지 했던 상황.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대열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미 10㎏짜리를 메는 것으로 배려를 받은 탓이었다.

레이첼은 거기다가 커다란 드론 가방까지 멨고, 호세는 30㎏ 가까운 짐을 짊어졌으며, 제이크는 심지어 사람도 한 명 들쳐 메고 있었다

뒤에서 후방 경계를 맡으면서 따라오는 델타 팀도 힘든 건 마찬가지.

그래서 군말 없이 통증을 감수하던 때였다.

“마커스.”

부스럭 소리와 함께 강태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든 그의 코앞에 강태가 와 있었다.

“리?”

“그거 줘, 내가 들게.”

“아냐, 됐어. 이 정도는 내가…….”

“팀장한테 이미 허가받고 온 거야. 그리고 앞으로 두 시간은 더 못 쉴 거야.”

“…….”

마커스가 고개를 저으려다가 주춤하고 말았다.

허가받았다는 말과 더 못 쉰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발이 멈춘 것이었다.

스윽.

강태가 어깨의 가방끈을 당겼고, 마커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주었다.

동시에 그의 어깨가 훅 가벼워졌다.

“……!”

평소였다면 군장 무게로 치지도 않을 10㎏의 무게였으나, 상황이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날개라도 달린 듯한 느낌이 들 무렵.

마커스가 빗물에 젖은 입을 뗐다.

“고마워, 리.”

“대신 뒤에 델타 애들 좀 잘 봐줘, 거의 퍼졌다던데.”

“아아, 그래. 알았어.”

“너도, 정 안 되겠으면 쉬자고 말해. 이러다 수술한 게 터지면… 치료 힘들다, 여기서.”

“…그래, 그것도 참고하지.”

마커스가 무겁게 대답했으나,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었다.

이는 다른 인원도 비슷했다.

먼저 휴식하자고 했던 안드레이조차 드론을 격추했다는 소식 이후로는 입을 닫고 있었다.

여기서 쉬었다가는 꼬리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즉,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들 군말 없이 무리하는 것이었다.

또한 웬만한 특수부대 출신답게 오기도 있고, 비슷하거나 더 힘들었던 훈련을 겪어 본 적이 있어서 참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강태만이 논외였다.

“진짜 대단한 새끼군…….”

맨 뒤에서 처진 팀원을 밀며 나아가던 안드레이가 야간 투시경 너머의 강태를 보고 중얼거렸다.

앞으로 가기에도 바쁜 와중에 강태는 뒤로 와서 그의 팀원을 돕고, 중간에 쉴 때는 어디 걸터앉지도 않고 계속해서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체력적인 여유에서 비롯됐다는 거였다.

야간 투시경의 녹색 화질로 봐도 보였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지 않았고, 내딛는 걸음이나 행동이 조금도 무거워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방금 막 합류한, 콩고군과의 통신 문제로 행로 중간에 비트를 파고 대기했던 델타 팀원보다 나았다.

안드레이로부터 짐을 옮겨 받던 팀원 중 한 명이 강태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오, 역시… 업계 괴물이라는 말이 사실이군요. 팀장이 녹초가 됐는데, 혼자서 저렇게 멀쩡하다니…….”

그중 하나가 중얼거리자, 안드레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후… 무슨 업계 괴물? 어디까지 알려졌길래 그래?”

“아, 별건 아닌데, 제 동기가 영국 정보국 쪽에서 일하는데, 리에 대해서 묻더라고요. 저희 소속인데, 아느냐고…….”

“영국?”

“예, 아마 데려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데려가야 할 정도더라고요.”

“뭐가 더 있는데?”

안드레이도 들은 게 있어서 물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지친 와중에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폭탄 조끼 스위치를 누르려던 테러리스트의 엄지를 날려 버린 일 그리고 손을 떠난 대전차 수류탄을 맞힌 일화 등등.

“구라 아니고?”

“에이, 진짭니다. 복귀해서 물어보시죠.”

“북한에 있는 킴도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백마를 타고 전쟁한다던데?”

“킴은 딱 봐도 구라죠, 돼지 새끼가 따로 없던데……. 리는 진짜로 멀쩡하게 뛰지 않습니까? 우리 팀장이 이렇게 퍼졌는데.”

“씨발, 퍼지긴 누가 퍼졌다고……. 너하고 멀쩡히 대화하는 거 안 보여?”

“그거야 제가 방금 짐을 들었으니까…….”

“야, 끝나고 한번 붙을래?”

“누가 싸움꾼 아니랄까 봐. 안 합니다. 복싱 선수였으면서…….”

그렇게 중간중간에 시답잖은 대화도 하면서 산악 행군을 지속한 결과.

비트에서 대기 중이던 남은 팀원까지 모두 합류하면서 델타 팀 6명이 모두 복귀했고, 드디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적과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고, 추격하는 흔적 또한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침 비도 멎고 동도 튼 상황.

“레이첼, 드론 작동해서 인근 확인해 봐.”

제이크가 지시했고, 커다란 드론 가방을 벗은 레이첼이 조종기를 꺼내 드론을 띄웠다.

윙윙거리는 엔진음이 들리기를 잠시.

드론이 공중으로 수직 상승했고, 레이첼이 곧장 열 영상 화면을 비교해 가면서 인근 수백 미터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짐작했던 것처럼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주변은 깨끗해요.”

“…잘됐군. 그럼 콩고군에 연락해서 퇴출 경로로 운전병하고 마중 나오라고 해. 가는 길에 운전하고 싶진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오, 당신이 혹시 리? 이름까지는 몰라도, 한국인이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못 봤던 백인들이 악수를 청하며 말을 붙여 왔다.

나도 거절하지 않고, 손은 마주 잡으며 대답해 줬다.

“아, 맞습니다.”

딱 봐도 아군이었기 때문이다.

전투복 우측 어깨에 붙은 하늘색과 하얀색으로 이뤄진 세계 전도 패치 때문이었다.

UN군.

또한 그들이 온 목적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출발 전 작전 계획을 듣는 자리에서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 이후 정보 분석을 위한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온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외부 전문가들일 터.

“얘기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업계의 전설을 새로 써 나간다고 하던데…….”

“전설이요?”

“네,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가 됐든 간에 우리 쪽으로 오는 게 나을 겁니다. 우리는 미국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조직이니 말입니다.”

“아…….”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CIA구나.’

UN군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그 신분으로 위장한 CIA일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업계니, 우리라느니 하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닐 터.

이에 대꾸하려던 때였다.

“이봐, 지금 무슨 개수작이지?”

“크흠… 개수작이라니요?”

“22시간을 작전하고 온 인원에게 쉴 시간을 빼앗는 게 개수작이 아니고 뭐지?”

“으음, 그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같은 업계끼리 그러지 맙시다.”

“계속 버틸 생각인가? 나와 해 보려고?”

“난 전투 전문 요원이 아니라… 아! 리, 혹시라도 저 사람이 무서워서 못 오는 거면 여기로 연락하십시오. 당신은 언제든 환영하겠습니다. 자, 그럼.”

동시에 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주더니, 도망가듯 자리를 떴다.

전화번호와 메일만 적힌 거였다.

용지조차 싸구려였고.

CIA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줬다면 뭔가 싶어서 버릴 만한 거였으나, 이건 그렇게 버릴 수 없었다.

CIA가 준 거니까, 나중에 쓸모가 있을 터.

그걸 품에 넣을 무렵, 옆에서 주저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연락할 생각인가?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지만, 우리는 타 기관하고는…….”

나를 슬쩍 보면서 나오는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걱정 마세요, 안 합니다.”

핵전쟁을 막을 때까지는 대외협력국과 함께 가야 했다.

스토리가 전부 뒤바뀌기는 했으나, 대외협력국이 피칼과 가장 가까운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런 때에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었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몸값을 많이 불러 주는 곳에 가던지, 은퇴해서 쉬던지, 다른 일을 찾아 떠나든지 해야 할 터.

그렇게 제이크의 말을 잘라 내자, 수염에 가려진 입가가 미소 짓듯 흔들렸다.

“역시… 그럼 푹 쉬도록 해.”

“예, 팀장도요.”

짧게 대답하면서 플레이트 캐리어를 마저 벗다가 주춤했다.

몸 한가운데 주먹만 한 피멍이 맺혀 있었다.

제대로 어퍼컷을 한 대 맞은 듯.

교전하다가 방탄판이 깨졌던 게 떠오르면서, 그제야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나도 막사로 들어가서 옷을 벗는 사이, 어느새 전투복을 다 벗은 마커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싱거운 얘기가 들려왔다.

“리, 오늘도 네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어. 고마워.”

그 말에 간단하게 손짓으로 답하는데, 다소 험상궂은 안드레이도 다가왔다.

“그래, 진짜 존나게 대단하더군. 미치도록 놀라웠어, 리.”

그 말 뒤로 돌연 델타 팀원들이 지나가면서 내게 한마디씩 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덕분에 한결 편하게 왔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왜 괴물인지 알았습니다.”

그 말에 마커스에게 그랬듯 가볍게 눈을 마주치며 응해 주는 사이.

돌연 레이첼도 다가섰다.

“……?!”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여태 수컷들만 지나가는 상황이었는데 반해서, 레이첼은 상의를 탈의하고 위에 스포츠 이너 웨어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의 손가락이 내 배 쪽으로 향해왔다.

“…여기 피탄된 거예요?”

“아, 크흠. 예.”

이어서 남자와는 다른, 작은 손끝이 배에 닿으면서 움찔했을 때였다.

그녀가 내 배를 꾹 누르며 말했다.

“장기나 뼈는? 통증 강도가 어때요?”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 깨달았다.

레이첼은 드론과 통신 주특기에다가 의무까지 부특기로 가진 사람이었다.

이에 꿈틀했던 감정을 누르면서 괜찮다고 답했는데, 레이첼의 걱정은 한 번 더 이어졌다.

“이상 생기면 바로 말해요, 내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절대로 참지 말고요.”

그 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마리아와 연락이 거의 끊어져서 자연스럽게 남남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귈 것도 아니고, 만난 적도 없었고.

다만, 젊고 튼튼한 몸뚱이 때문인지 종종 신체의 변화가 오는 것을 홀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근래 들어서 혼자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괜히 기력을 딴 데 쓰지 말고, 핵전쟁을 막는 데만 집중하자. 실수하지 말고…….’

몸이 젊어져서 그런지, 마음도 싱숭생숭할 무렵.

레이첼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안 나가요?”

어느새 이 막사에 그녀와 나 단둘이 있었다.

호흡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갑시다.”

그렇게 막사를 나가 살수차 옆에 마련된 간이 샤워 부스에서 씻고 난 뒤.

바로 다시 돌아와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체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면욕마저 이길 만큼 강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졸린 건 같았다.

그렇게 식사마저 거르고 쓰러져서 한창 잘 무렵.

우우우웅― 우우우웅―

진동이 느껴졌다.

좌측 카고 바지 건빵 주머니에서 나오는 신호.

얼른 일어나서 정신 차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단 하나, 대외협력국에서 준 핸드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불이 다 꺼진 막사에서 허둥대며 나온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스터 리, 자는데 깨워서 미안합니다.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였다.

“아뇨. 말씀하십쇼. 잠은 많이 잔 것 같습니다.”

어느새 밤하늘이 떠 있었다.

주변에 조명도 거의 없어서 부대도 전체적으로 새까맸고.

목덜미에 들러붙는 벌레를 떼어 내는 사이, 로버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게 아니라… 현지 기준으로 오전에 CIA에게 SSE 작업물 넘긴 거에 대해 물을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네, 뭐 나왔습니까?”

-아직 업무 협조를 받는 중인데, 현재까지 네 사람의 신원이 나왔습니다.

“그래요?”

얼굴 사진을 여러 각도로 촬영하고, 지문을 다 찍어 오고, 신체 사이즈도 일일이 기록해 온 보람이 있었다.

-추가로 전부 나오면 제이크를 통해 알릴 예정입니다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어떤……?”

-이탈리아 국적의 지안드로 바시카날이라고 압니까?

“…그, 혹시 중요한 사람입니까?”

-세르게이 볼코프에 준하는 위험 인자로 격상시킬 예정입니다.

“…….”

듣는 순간,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드디어 나왔구나…….’

저 사람의 신분에 대한 게 아니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세르게이에 준할 만큼 중요한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이제 스토리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이제부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가는 셈.

“모르겠습니다.”

-아예 모르는 겁니까? 관련된 내용이 있다면 작은 거라도…….

“아뇨, 진짜 모르겠습니다.”

로버트가 재차 물어왔으나,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를 초능력자로 짐작하는 건지, 예언자로 아는 건지는 몰라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었다.

그사이, 로버트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이런… 그럼 정보 분석을 더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예, 부탁 좀 드립니다.”

-당신보다는 내가 부탁할 입장이죠. 현지 임무도 관련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할 테니 잘 부탁합니다, 미스터 리.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이제 진짜 빡세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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