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느덧 3월 초순,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지난 며칠 동안 호텔에서 함께 생활했던 마커스, 제이크와 함께 탑승장으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레이첼과 호세.
그중 레이첼이 옅은 미소를 지었고, 호세가 과장되게 양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벌써 그의 목소리가 따갑게 들려오는 듯 느껴질 무렵.
우리 쪽으로 오던 그가 돌연 손으로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하면서 음성을 나직하게 깔았다.
“아, 이제 우리 공공장소에서는 입조심해야 하는 거지? 크흠흠.”
아마 대외협력국에 대한 얘기일 것이다. 호세도 최근에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서 좀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훑는 사이, 마커스가 목소리를 냈다.
“네가 참을 수 있다면 그러든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대꾸에 호세가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하, 너는 컨디션이 좀 돌아왔나 보다? 수술하고 재활까지 했다더니, 몸이 아주 나빠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리, 너는 다쳤는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잘생겨졌나?”
어느새 호세가 내 쪽을 보며 말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하느라 좀 애썼어.”
제이크, 마커스와 함께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함께 헬스, 수영, 사격까지 루틴을 짜서 매일 같이 해 왔었다.
거의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수술하고 재활하는 사이에 근육량이 줄어들면서 체중도 줄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키가 185㎝인데, 몸무게 70㎏대까지 빠졌다.
게임 설정하면서 입력했던 몸무게가 85㎏인 만큼, 거의 10㎏ 이상 줄어든 셈.
마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몸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고, 이번에 함께 운동하면서 상당 부분을 회복시켰다.
그중에 제이크는 더 단단해지고 더 거대해진 것 같았고.
이에 호세의 수다가 자연스럽게 제이크에게 옮겨 가면서 시끌벅적해지는 사이.
“리.”
어느새 내 곁에 레이첼이 다가왔다.
은은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쳐 가는 사이,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락하려다가 회복에 방해될까 봐서 안 했는데, 후유증 같은 건 없어요?”
“다친 다리가 가끔 따끔거리는 것 같기는 한데… 생활하는 데 별로 지장은 없어요. 다 멀쩡해요.”
상흔이 남은 허벅지 아래로 연한 통증 같은 게 있었다.
썩 이상한 느낌은 아니었다.
교통사고가 나서 뼈를 조각조각 맞춘 이후에도 종종 통증을 느껴 봤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지금 느끼는 것보다 많이, 자주 아팠었다.
병원에서도 원인 미상의 통증 정도로 진단하고 그냥 진통제나 줄 뿐.
상담 치료 같은 걸 했지만, 시간만 날렸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따끔거리는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잊을 만하면 발현되는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듣고 있던 레이첼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걱정과 우려까지 비치는 눈빛.
“검진도 안 받았죠?”
“뭐… 예, 운동하고 사격장 다녀오기도 바빠서요.”
“그럼 콩고 다녀오고 검사받아 봐요. 방치해서 심해질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서 호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첼? 리를 노리는 거야? 흐음, 그럼 경쟁자를 한 명 이겨야 할 텐데, 괜찮겠어?”
“경쟁자요? 누굴… 아, UN 조사원이요?”
“그래, 이번에 만날 뻔했는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못 만났었지. 그치?”
남미의 미인, 마리아 오뒤르의 얘기였다.
호세가 날 보며 말하는데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니… 그날 있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는 거야?”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래서 사귀기로 한 거야? 아니면 아직도 사귀지 못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짧게 부정하고 말았다.
따지자면 10년은 젊어진 상태라서 여자를 마다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애써서 만날 생각은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진지한 관계는 더 힘들 것 같았다.
그게 아니어도 애초부터 마리아도 공항으로 마중 나온 뒤에 병원에 함께 가서 식사도 하고 대화나 좀 나눌 예정이었다.
어디 놀러 가서 데이트할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회복이 급선무였고, 마리아 역시 휴가가 끝나고 UN 업무를 보러 돌아가야 해서 만날 필요가 없었다.
즉,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래로 마리아하고는 짧게 통화하고 메시지나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이제는 콩고를 가야 했고.
“…….”
왠지 레이첼이 나를 좀 따갑게 쳐다보는 것 같긴 했으나, 대화가 금세 끊어지고 말았다.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야 되겠군. 각자 자리가 어디야?”
다행히 전부 비즈니스석이었다.
값이 상당히 비싸긴 했으나, 비행 시간이 길어서 후회할 비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편하게 갈 돈이 있었고.
그사이, 다가온 호세가 비행기표를 펄럭거렸다.
“마침 내가 네 옆자리잖아? 흐흐흐.”
다소 음흉스러운 웃음과 함께 장시간의 비행이 시작됐다.
떠들고 먹고 자면서 비즈니스석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파리를 거쳐 다시 비즈니스 좌석에 몸을 실은 뒤.
약 20시간 만에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의 은질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내릴 무렵.
입이 절로 열렸다.
“와… 씨…….”
일종의 탄식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내 옆자리를 타고 왔던 호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오, 젠장. 카마르니아가 그리울 지경이야.”
“그러게. 다시 보니 카마르니아가 선녀였어.”
국제공항인데도 하나뿐인, 그마저도 관리가 부실한 활주로를 시작으로 내리자마자 몸에 들러붙는 후덥지근한 날씨까지, 모두 최악이었다.
더 안타까운 건 이곳이 수도라는 거고, 우리는 더 깊숙이 지방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콩고 극동에 위치한 북키부주의 도시, 고마(Goma).
갈등 국가인 르완다와 국경을 마주한 곳인 데다가, 온갖 무장 단체가 매일 테러를 일삼는 위험 지대고, 위로는 용암호가 끓는 활화산까지 있는 장소였다.
인적 재해에 이어 자연재해까지 있는, 그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현장.
물론 우리가 들어가게 될 군부대는 고마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어쩌면 고마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콩고군을 노리는 적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부정부패로 인한 분열된 내부 세력과 난립한 국내 무장 단체, 갈등 중인 주변국까지.
출장이 확정된 이후로 자료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사정이 심각했다.
‘수백 명에서 수만 명으로 이뤄진 불법 무장 단체가 최소 100개라고…….’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과장된 수치가 아니라, 당사국인 콩고를 포함한 각국 대사관과 UN 산하 기구가 발표한 오피셜이 그랬다.
카마르니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심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야말로 최악이었다.
호세의 수다에 웃음이 났던 것도 잠시, 고마 공항에 내리면서 차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야, 이거 진짜…….’
라레플의 화면으로는 볼 수 없던 것들을 절절히 느낄 무렵.
불쾌함을 견디면서 공항 입구에 나왔는데, 미리 나와 있기로 했던 군부 측 인사도 없었다.
“오, 미치겠군. 벌써 밤중인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호세가 구시렁거리고, 제이크가 전화하길 잠시, 곧 답이 나왔다.
“…오다가 차가 퍼졌다더군.”
“퍼졌다고요? 매복 당했으면 전멸당할 시나리오 아닙니까?”
“가교가 무너졌다고 하던데… 살아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지. 현재 차량을 수배해서 오는 중이고, 곧 도착한다고 하니까 잠깐 기다리면 될 거야.”
“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리고 병기가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한다니까, 호세, 마커스. 두 사람이 받아 가도록 해.”
제이크가 지시를 내리자, 불만을 품던 호세와 불편한 표정을 짓던 마커스도 모두 순순히 수긍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두 사람이 할 일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이미 논의도 마쳤다.
흑인인 마커스는 체격이나 옷차림만 빼고는 현지인과 비슷해서 그리고 호세도 까무잡잡한 편이라 눈에 잘 안 띄어서.
반면에 제이크는 덩치 큰 백인이고, 나는 아시안이며, 레이첼은 여성이라서 지금도 주변 현지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쉽게 말해 온갖 이목을 다 끄는 셈.
조용히 다녀오기 위해서는 마커스가 움직여야 하고, 한 명이 더 움직인다면 호세가 따라붙어야 했다.
그렇게 동물원 원숭이의 신세처럼 기다리는 사이.
우우우웅― 우우우웅―
품속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대외협력국에서 보급한 보안용 핸드폰이었고, 발신자는 국장인 로버트였다.
보통 일은 릴리 모건이 처리하니, 아마 더 중요하거나 비밀로 처리해야 할 연락일 터.
전화를 받자마자, 짧은 안부 뒤로 곧장 용건이 나왔다.
-미스터 리, 혹시 들어 본 이름 중에서 대릴도 있었습니까?
“…대릴이요?”
당연히 아는 이름이었다.
이곳에 오게 된, 피칼과 관련된 배신자 중의 한 명이었다.
정확히는 G&G Corp 버지니아 본사에 있는 간부이면서 피칼의 수하이기도 한 배신자로 콩고에서 피칼과 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세르게이나 월터와 비교해서 무게감이 좀 없지만,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인간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파고들어야 하는 정보도 대릴과 피칼의 관계에 얽힌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주춤했다.
-아니면 다른 이름은 더 없습니까?
“아… 무슨 일이신데요?”
-그가 자살했습니다.
“…네?”
-체포당하기 직전에 입안에 총구를 넣고 방아쇠를 당겼더군요.
이 역시 생각지도 못 한 거였다.
대릴은 원래 체포 과정에서 자살이 아니라, 저항하다가 사살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월터가 자살을 하고.
한데, 기존의 스토리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이거 진짜 어떻게 되려고…….’
난감하긴 했으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피칼의 주요 악역이 다 나온 덕분이었다.
오른팔인 세르게이가 죽었고, 수족 중 하나인 대릴이 자살했으며, 월터는 감시 받는 상황.
즉, 머리인 피칼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핵 개발이든, 뭐든, 진도를 빼기는 어려울 터.
어느새 로버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외의 아는 이름은 없습니까? 특히 피칼과 관련된 이름이 필요합니다.
“피칼과 관련해서 뭐 알아낸 게 있으세요?”
-파악 중인 바로는 그가 사람이고, 세르게이와 대릴, 월터와 관련되었다는 점입니다.
“……!”
나도 모르게 감탄할 뻔했다.
말해 주고 싶던 핵심을 알아서 정확하게 짚어 냈기 때문이었다.
월터만 처리하지 못했을 뿐, 그간 묵묵히 제 역할을 잘 해낸 모양이었다.
물론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아, 그래요?”
-아닙니까? 아니면 다른 게 더 있습니까?
“아뇨. 더는 모릅니다.”
-혹시라도 생각나거나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 후 나오는 게 있다면 구두로 먼저 직보해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보니 조금 의아했다.
로버트가 원래 내부 사정을 잘 얘기해 주지 않는데, 피칼과 관련한 것을 순순히 알려 준 데다가, 또 아는 게 있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즉, 내게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뭘 더 안다고 생각하나……?’
의아했으나, 돌이켜 보면 그럴 만했다.
내가 보였던 행보들이 초인적이었던 만큼, 예지나 회귀, 기타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었다.
사격술이나 체력이 워낙에 뛰어나기도 하지만, 스캇 같은 배신자를 잡아내기도 했고, 알 자마쉬에서 비밀 통로를 찾아낸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 끝에 로버트가 떠올랐다.
‘그래도 비이성적인 걸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본 건 어디까지나 라레플 속 시네마틱 영상 장면이 전부였다.
살아 있는 그는 내 예상과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런 상념에 잠기는 사이.
빵! 빵!
경적이 울리더니, 건물 밖에서 승합차와 소형차 한 대가 나란히 멈춰 섰다.
그리고 조수석에서 군복 차림의 흑인이 내리지도 않고 손짓했다.
벌써 몇 시간 째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했던 콩고군 장교였다.
“…다행히 밤새기 전에 왔네.”
이제 피칼만 잡으면 되는데, 왠지 앞으로 퍽 고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