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어느덧 2월 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단독주택.
국무부 정무차관 휘하 유럽 사무국장, 월터 그레이슨이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은 그는 가장 먼저 도청 감지기부터 꺼내 들었다.
그리고 꺼진 집안의 불을 켜 가면서 방을 돌아다녔다.
도청하기 쉬운 전자기기 근처와 가구, 손이 닿지 않는 곳들을 도청 감지기로 훑는 것이었다.
도청 감지기가 별다른 반응 없이 녹색 LCD 램프만 깜빡거리자, 거실로 나온 월터가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후…….”
이어서 한숨을 뱉는 그의 얼굴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감사에서 발견된 관리 부실로 유급 휴가를 받은 게 불쾌하기도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외협력국장인 로버트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가 왜, 어떻게 자신을 찍어 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알아내려 했으나,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사람을 붙여서 자신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정확히는 감시.
지금도 오는 길에 미행을 당했었다.
정확히는 같은 차종을 세 번 이상 목격했던 거지만, 그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추적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집안 곳곳을 도청 감지기로 확인해 본 것이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음 놓을 일은 아니었다.
미행을 한 만큼, 이 집을 육안으로 지켜볼 사람도 존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정말 재수 없다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할 확률이 높았다.
당연히 로버트의 지시로 이뤄졌을 것이었다.
소속 역시 대외협력국일 거고.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그랬으니까.
아주 짜증 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온갖 문제가 산적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정말 커다란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월터의 임무.
미 국무부 공무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과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신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제 보스를 수행하기는 쉽지 않겠군.’
세르게이와 마찬가지로, 월터 역시 단 한 명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피칼.
세계적화, 혹은 멸망에 다다르는 혁명을 꿈꾸는 그를 제대로 보좌하기가 어려워졌다.
심지어 피칼의 현장 임무를 최전선에서 수행하던 세르게이도 죽은 상황.
거기서 왼팔이자 머리 역할을 하던 자신마저 집 안에 갇힌 꼴이 됐으니, 혁명을 진행하기에 좀 더 어려워질 터.
‘놈이 그렇게 멍청하게만 죽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도 잘 넘어갔을 텐데…….’
그의 눈썹이 씰룩였다.
세르게이가 죽던 날을 월터 역시 생생히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서로 간에 크게 교류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피칼의 대업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동료여서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세르게이는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실력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허무하게 죽을 인간이 아니라,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만한 사람이었고.
그런데 강태가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그르쳤다.
월터도 그런 강태를 제지하기 위해서 수를 썼는데, 로버트가 불쑥 튀어나와 가로막은 게 현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자신에게서 관리 부실이라는 죄목을 찾아냈고, 말단 직원들의 업무 태만이나 수당 과다 청구 같은 자잘한 과오도 잡아내기까지 했다.
물론 그걸 바라던 건 아닐 게 분명했다.
감사 팀을 스위스까지 끌고 왔으니, 자국민 테러 같은 것을 원했을 터.
‘그것까지 안 나와서 다행인가……?’
월터가 짜증과 분노를 삭이면서 현 상황을 판단했다.
세르게이가 죽고, 자신도 움직이지 못하며, 다른 방패막이마저 희생되겠지만, 어쨌든 피칼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게 월터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했다.
또한, 그 누구도 피칼의 이름을 꺼내진 않을 거였다.
피칼의 휘하에 있는 다른 수족들도 능력만큼은 아니더라도, 신념이 상당한 이들이었으니까.
아마 세르게이나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서 대신 움직일 거였다.
물론 자신보다는 부족해서 대업 진행이 원만히 이뤄지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멈추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월터는 피칼을 믿었다.
중세 유럽 왕족 출신, 어마어마한 재력, 사교적인 화술과 호감형 외모, 그리고 분명한 신념까지.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고,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과정이 조금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끝끝내 목적을 이뤄 낼 것이었다.
‘종국에는 전 세계에 혁명이 닿으리라.’
그가 마음을 다잡으면서, 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암호화된 회선을 거친 PDA를 꺼내려던 무렵.
놓치고 있던 변수가 떠올랐다.
강태.
‘빌어먹을 아시아 원숭이 새끼……!’
따지고 보면 일개 현장 요원에 불과했지만, 능력만큼은 정말 초인적인 인물이었다.
월터도 신뢰했던 세르게이의 팀을 전멸시켰으니까.
물론 세르게이의 죽음은 멍청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게 만든 강태를 얕볼 수는 없었다.
샅샅이 파악한 덕분에 그의 실력을 월터 역시 잘 알았다.
‘놈이 미국을 뜨면… 그때는 정말 죽이기 쉽겠지.’
물론 강태를 죽일 만한 세르게이가 진즉에 죽었고, 또한 강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피칼이라면 이 보고를 받고 알아서 판단할 것이었다.
그는 그만한 위인이었으니까.
이윽고 월터는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버리게 될 PDA에 암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 * *
“여기로 하죠. 사인할게요.”
버지니아주의 한 주택 매물을 확인한 강태가 부동산 업자에게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에 공사도 요청했다.
리모델링 겸 업그레이드.
간단한 인테리어 변경에 보안 강화는 물론이고, 목재나 판넬로 이뤄진 내외부의 벽체를 50구경 중기관총에도 뚫리지 않게 바꿔 달라고 했다.
차고도 마찬가지.
더불어 지하실은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폭발물)나 가스 같은 생화학 공격에도 멀쩡한 일종의 패닉 룸 겸 벙커로 개조해 달라고 했다.
추가로 내가 준비해 뒀던 상세 리스트까지 건네주었다.
그리고 공사 담당자가 당황해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 치듯 말했다.
“다 밀고 새로 지어도 되니까, 제일 좋은 것들로만 해 주십쇼. 돈은 상관 없고요. 가서 카드기 가져오면 선수금 결제하겠습니다.”
상대는 군부대와 계약도 하고, 민간에 허리케인에도 버티는 주택과 벙커까지 판매하는 업체였다.
예전부터 알아보면서 미리 준비했던 거였는데,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았다.
노상강도로 보도된 총기 습격을 두 번이나 당한 상황.
살려면 튼튼한 집이 있어야만 했다.
타야 하는 차도 마찬가지.
그래서 미군과 UN에서 사용했다던 B6 등급(7.62㎜ 탄환과 수류탄까지 방어하는 수준)의 중고 SUV를 2대나 구매했고, 차량 정비소에 넣어서 싹 다 고치고 있었다.
이틀 뒤에 정비 후 출고될 예정이고, 주문했던 총기와 탄약도 이번 주에 받기로 했었다.
집과 차량에 둘 예비용 병기들.
그렇게 미국 시민으로서 정착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고, 동시에 떠날 채비도 했다.
필요한 생활용품과 군용 장비를 사 두는 거였고, 그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울 건 없었다.
모든 게 수월했다.
물론 진행하는 게 그렇다는 거지,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서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특히 내가 입 밖으로 냈던 두 이름, 월터와 피칼.
‘로버트가 월터를 못 잡은 게 좀 걸리는데… 그래도 징계도 내리고, 감시하고 있다니까, 뭐……. 이제 피칼 쪽도 슬슬 좀 알아냈어야 할 텐데, 로버트가 어디까지 파악했으려나…….’
내심 신경이 쓰였다.
로버트를 불신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한번 실수했다고는 하나, 그는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상대인 월터도 만만하지 않았을 뿐.
내가 아쉬운 건, 알 수 있는 게 제한적인 현실이라는 거였다.
예정보다 빠르게 대외협력국에 소속돼서 다행이지만, 아직도 다른 일은 그저 추측해야만 했다. 또한 내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 역시도 피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게 없어서 더욱더 아쉬웠다.
거주지나 연구소, 은신처라도 알면 눈 딱 감고 알려 줄 텐데, 알고 있는 거라고는 놈의 간단한 신상 그리고 궤변 같은 신념이 전부였다.
그 생각에 아쉬워할 무렵.
기다리고 있던 내 대외협력국 담당 직원, 릴리 모건의 전화가 걸려 왔다.
-미스터 리! 몸은 좀 어때요?
“다 나은지 좀 됐습니다.”
-다행이네요, 작전 수립이 완료되어서 연락했어요.
“말씀하십쇼, 뭐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모레면 벌써 3월이 되는 시기였다.
총격전이 일어난 지도 대략 2주가 지난 시기.
다행히 그동안에 다른 습격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관련된 연락도 받지 못했었다.
그저 내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릴 뿐.
이에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사이, 금세 핸드폰 너머에서 작전 계획이 넘어왔다.
-지앤지에서 콩고민주공화국 군부와 계약을 맺었어요. 병 교육과 정찰 임무 수행이고, 때에 따라서는 외교인 경호도 포함됩니다.
“…콩고요?”
되물었는데, 놀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행이라는 감정이 컸다.
콩고는 라레플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아프리카 나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연관된 건 G&G Corp 내부에 있는 배신자와 피칼의 연결 고리.
그 생각을 하자마자, 릴리 모건의 목소리가 답을 알려 주듯 이어져 나왔다.
-네, 콩고예요. 국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스터 리의 힌트 덕분에 알아낸 지역이라고 전하게.”라고 하면 된다던데, 맞나요?
릴리가 짐짓 두꺼운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걸 듣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웃겨서 그런 게 아니었다.
로버트가 다행히도 피칼의 이름으로 힌트를 얻어 지역까지 알아냈다는 게 기쁜 것이었다.
‘그래, 이 양반도 유능한 양반이지.’
이는 세르게이가 죽은 시점처럼 게임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이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게임 중후반부에 열리는 맵이었다.
아마 얻을 증거도 꽤 있을 터.
늦기 전에 대답해 줬다.
“네, 국장님께 고생했다고 전해 주시고… 나머지는 회사 일정 따르면 됩니까?”
-그렇긴 한데… 아마 콩고 상황이 좋지 못해서 도착 후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 할 거예요. 비행편도 복잡하고, 무기 수령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구요. 아마 하루 이틀은 현지에서 조달한 총기를 써야 할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공식적인 임무 전달은 지앤지에서 연락이 갈 건데…….
잠시 주춤하던 릴리의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물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다치지 말고, 무사히, 건강하게 돌아와야 해요. 다음에 연락할 때는 성공적인 작전으로… 좋은 일로 연락하길 바라요.
“그러죠.”
짧게 답하고만 말았다.
그녀가 말한 콩고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건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이도가 알 자마쉬보다 훨씬 심하고, 카마르니아와 비슷하거나 심각한 수준.
그곳에 피칼의 부하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없다고 해도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콩고에서는 반군들이 정규군한테 뺏은 장갑차와 전차도 종종 운용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화를 끊고 나름의 각오를 하는 사이.
전화가 걸려 왔다.
릴리가 말했던 G&G Corp의 휴가 복귀 연락 겸 근무지 재배치의 건이었다.
미리 들었듯 갈 곳은 콩고민주공화국, 아프리카의 한가운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