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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62화 (62/185)

62화

스위스, UN 제네바 사무소와 WHO(세계보건기구), 미 공사관 등의 주요 건물이 몰려 있는 제네바의 중심가.

화단과 잔디가 정리된 깔끔한 도로 위로 방탄 차 여러 대가 움직였다.

목적지는 미 국무부 유럽 사무국.

정문의 바리케이드와 출입 차단기를 지키던 해병들이 경계하길 잠시, 차량에 달린 조그만 성조기를 확인하고선 주춤했다.

이어서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서도 익숙한 미 여권과 신분증이 나오길 잠시.

확인하던 해병이 멈칫했다.

“……!”

움찔한 그가 곧장 감독관인 국무부 산하 DSS(Diplomatic Security Service: 외교안보수사대) 소속 파견 요원에게 달려갔다.

차에서 나온 신분증이 국무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감사 팀 소속.

이 소식을 들은 DSS 소속 파견 인원이 차로 다가갔다가 곧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수석에 알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 엔더슨?! 여긴 어떻게…….”

친분이 있어서 반가워했으나, 로버트의 태도는 다소 무거웠다.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비정기 감사 임무로 안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 이것 좀 어서 치워 주게, 아니면 시끄럽게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아아, 알겠습니다. 자, 어서 치워. 당장 입구 개방해!”

DSS 요원의 말에 해병들이 문을 열었고, 검은 차량 3대가 줄줄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물 앞에서 일제히 내려서 진입했다.

로버트도 마찬가지.

“후…….”

건물로 들어가던 그가 한숨을 뱉어 냈다.

내심 긴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도 정말 어렵게 만들어졌다.

공들인 시간만 1개월 이상이었고, 허락받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상대가 말단 직원이라면 더 빠르게 진행했겠지만, 정무차관 휘하 유럽 사무국장인 월터 그레이슨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용의자가 국무부 바깥의 CIA나 국토안보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만약에 타 기구의 간부급이었다면, 한 달이 아니라, 1년이 지나도 감사 허락을 받는 건 불가능했을 터.

물론 이 허락도 그냥 받아 온 건 아니었다.

대가가 있었다.

바로 책임.

이 모든 게 단순 정황으로 끝나고, 증거나 증인을 얻지 못한다면 로버트가 대외협력국에서 물러날 가능성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나이 40대 중반에 퇴직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

당연히 그럴 일은 없었다.

최소한의 정보 유출이나 내통에 대한 증거 확보는 가능했고, 더 나아가서 보다 중요한 자료도 확보할 여지가 있었다.

바로 강태를 향한 최근의 습격.

‘…자국민 테러.’

강태가 미국인이 된 지 얼마 안 됐지만, 중요한 건 기한이나 날짜가 아니었다.

이미 미국인이라는 사실.

사주했다는 자료만 나오면 월터는 감옥에 갈 게 분명했다.

물론 비슷한 흑색 작전이 어디선가 검토되거나 이뤄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련 부서의 일이었다.

정무차관 예하 유럽 사무국장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비허가에 독단적인 행위.

발각되는 즉시 끝이었다.

로버트의 예상대로라면 그렇게 흘러갈 게 분명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월터와 관련된 싹 다 뒤져 본 결과, 관련 자료들이 전부 그쪽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슨… 이놈은 배신자가 확실해.’

직접적인 물적 증거가 나오진 않았지만, 정보 유출의 혐의는 너무나도 분명했고, 관련해서 보상을 받았을 확률도 있었다.

아직 드러난 건 아슬아슬하게 선에 걸친 정도였지만, 감춰 둔 게 더 있을 거였다.

괜히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개자식, 감히 리를…….’

로버트가 현시점에서 비대칭 전략 자원으로 여기는 강태를 떠올릴 무렵.

어느새 유럽 사무국 국장실에 닿았다.

노크도 없이, 로버트가 바로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월터를 바라보며 선포하듯 말했다.

“그레이슨 국장, 디지털을 포함한 모든 자료실의 패스워드를 해제하고 물러나세요.”

“…….”

이에 월터가 잠깐 멈칫하긴 했으나, 곧 자연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출장이 잦은 편인데… 마침 내가 사무실에 있다는 걸 알고 온 모양이군요.”

“대화하러 온 거 아닙니다, 얼른 움직이시죠.”

그러면서 로버트가 부하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물건들을 가져가라고.

그 모습을 보던 월터가 픽 웃고서는 로버트의 손에 들린 종잇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서류나 확인해 봅시다. 가져왔으니까, 뭔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시죠.”

로버트가 짧게 답하면서 서류를 내밀었고, 월터가 이를 받아들었을 때였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외비 외부 유출의 정황.]

일순, 머릿속이 벼락이라도 내려치듯 번쩍거렸다.

저 문장이 뜻하는 바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강태 리의 정보 유출을 말하는 모양이군.’

분명 그의 성과와 신상 정보를 유출하긴 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보상으로 받은 것도 없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입가에 잠깐의 쓴웃음이 고이기를 잠시.

난잡해지는 방으로 시선을 옮긴 월터가 입을 열었다.

“진심입니까? 고작 이딴 이유로 여길 이렇게 쳐들어온다고? 군세 차관이 이걸 허락해 준 거요?”

“그럼 서류를 위조해서 왔겠습니까?”

로버트가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월터의 말마따나 고작 이걸로 압수 수색을 허락받은 건 아니었다.

그가 상상으로만 추론했던 자국민 테러까지 입에 담았었다.

물론 보고서에 적을 수 없는 사안이라 말로 보탠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군세 차관이 흘려듣지 않아서 서명까지 받아 낼 수 있었다.

그게 직접 온 이유 중의 하나였다.

정말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인 만큼, 혹시라도 발생할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무엇보다 상대가 차관보급인 월터였다.

실무자들을 압박할 만한 사람인지라,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있어야 했다.

그렇게 로버트가 눈을 빛내는 사이.

“하하하…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 놓고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단단히 확신한 모양입니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월터가 웃으면서 물었다.

속은 뜨악했으나,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의 관록이나 성격 덕분에 나오는 모습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를 대신해서 이 모든 일을 수행한 사람, G&G Corp 본사에 있는 간부.

그가 모든 일을 뒤집어쓸 거였다.

따지자면 월터가 저지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보만 조금 넘겼을 뿐.

해외 정보기관에 강태의 성과와 신상을 뿌린 거나 공항 근처에서 벌인 총격전도 모두 그가 한 일이었다.

당연히 꿀릴 게 없었다.

모든 게 다 드러난다고 해도, 그가 받을 건 경징계가 전부였다.

고의적인 정보 유출이 아니라, 관리 부실로 몰고 가면 그만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가 로버트를 떠봤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유럽 사무국장인 내가 왜,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랬단 말입니까?”

“이 일을 하다 보니까 깨달은 건데… 세상에는 내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더군요. 그래서 ‘왜’ 같은 이유는 찾지 않습니다.”

로버트가 말하고서는 직접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월터가 또 물었다.

“그러니까 이유가 아니라… 들은 정보를 믿는다는 겁니까? 도대체 얼마나 확실하길래?”

“감사 결과가 나오면 알겠죠.”

“어떻게 국장이나 된 사람이 그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합니까?”

월터가 일부러 로버트의 성질을 긁었다.

이래서 현장 출신은 안 된다는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로버트는 묵묵히 제 일만 했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바라보는 월터의 눈이 다시금 가늘어졌다.

‘흔들릴 놈이 아니야…….’

로버트는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헛소리 하나 흘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고된 현장직 출신다웠다.

그사이, 벼락 맞듯 놀랐던 월터의 속은 어느새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믿을 구석이 있는 것과 별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지……?’

정보 유출의 정황을 파악한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용의 선상을 업무 협조 기구까지 넓게 잡으면, 조사 대상을 거의 1,000명 이상으로 계산할 수도 있었다.

줄여도 백 단위.

한데 로버트는 거기서 자신을 콕 집어내서 달려왔다.

상급자에게 결재까지 받은 걸 보면, 징계까지 각오하고 온 게 분명했다.

말인즉슨, 단순히 정황만 알고 온 게 아니라는 뜻.

확신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 감사 대상이 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설령 이번 일을 수사했어도 내가 아니라 지앤지 본사부터 털었어야 하고, 그것도 이렇게 빨리 처리할 수 없는 건데…….’

총격전도 오늘에서야 두 번째로 진행한다고 했었다.

그것도 진행 중이거나 시작도 안 했을 터.

한데, 로버트는 이 방에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수모를 당하는 월터의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자신이 타깃이 됐는지.

‘이 정도면 누가 내 이름을 말해 준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외의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로버트의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흘러갈 것 같지도 않았다.

악착같이 증거를 찾아내서 경징계라도 받게 만들 터.

그렇지 않더라도 당분간은 아주 번거로울 게 분명했고, 이후로도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거였다.

로버트가 자신을 범인으로 단정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즉,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진 않더라도, 모든 일이 아주 불편하게 돌아갈 건 확실했다.

결국 월터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 * *

도로의 총격전을 후속 요원에게 인계하고, 다시 차에 올라서 현장을 이탈했다.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도 되나 싶을 무렵.

전화가 걸려 왔다.

담당 직원인 릴리 모건을 생각했는데, 발신자는 평소와 다른 번호였다.

그러나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꺼낸 핸드폰은 대외협력국에서 준 거고, 그건 단 두 사람만 연락해 오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릴리가 아니라면…….’

한 사람, 로버트뿐이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예상했던 음성이 건너왔다.

-미스터 리, 일 처리 들었습니다. 고생했어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저 혼자 한 것도 아니고 뭐…….”

대답하는 사이, 왠지 한숨 같은 소리와 함께 로버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리가 말했던 그 이름… 아쉽게도 당장 처리하기 힘들 듯합니다.

“예?”

분명 차에서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의지가 넘치던 사람이었다.

설마 월터가 도망갔나 싶었는데, 내가 묻기 전에 금세 설명이 이어졌다.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 오판이었습니다. 그가 나보다 한발 앞선 것 같더군요.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쓸 것 같습니다.

“…그럼 처리는 어떻게 됩니까?”

-아직 제대로 된 감사는 실시도 못 했지만… 그에 대한 치명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해 봐야 관리 부실로 경징계를 받게 될 겁니다. 감봉, 근신, 아니면 대기 발령… 그 이상은 어려운 수준이죠.

“아…….”

내가 로버트의 능력을 너무 신임했고, 동시에 월터를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미 본토 내에서 테러를 지원하기 전까지 안 걸린 놈이었다.

아마 로버트의 함정에서도 한발 빼 놨을 터.

-그래도 다른 곳과의 연관성을 찾고 있으니, 정보가 흘러간 곳이 있다면 그곳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레이슨도 당장 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제가 주목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까…….

“좀 아쉽네요. 국장님은 괜찮고요?”

-관리 부실을 찾아내긴 했으니까 대외협력국이나 내게 타격은 없을 겁니다. 그를 붙잡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여기서 그레이슨을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 안 되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끝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그래서 하는 말인데…….

놀란 나를 두고 로버트의 말이 이어졌다.

-가능하면 일찍 당신의 작전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작전이라면…….”

-지앤지에서의 위장 임무입니다. 일은 계속될 겁니다. 아직 대외협력국의 타깃들은 많으니까요. 아마 아프리카 쪽으로 갈 것 같은데, 혹시 원하는 지원 팀이 있습니까? 당신과 호흡이 잘 맞는다면, 그 팀도 같이 배치할 예정입니다.

역시나 생각도 못 한 전개로 흘러가고 있기에 주춤하길 잠시.

늦기 전에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아, 동유럽의 안드레이 모루스 팀이요.”

전에 카마르니아의 호텔에서 잠깐 만나서 UN OCHA 조사 팀을 인계해 갔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종종 도움이 됐던 실력 좋은 팀이었고.

-안드레이 모루스라…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카마르니아 호텔에서 봤었어요.”

-호텔에서……?

“예, 뭐… 대화 좀 해 봤는데, 괜찮은 사람 같더라고요.”

-음, 일단 알겠습니다.

잠깐 정리하듯 답한 뒤.

로버트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럼 아프리카에서도 성공적으로, 그리고 무사히 임무 수행하길 기원합니다.

“아, 예. 국장님도 잘되시고요.”

-그래야죠, 당신이 만들어 갈 성과를 보려면… 그럼 끊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동시에 운전하고 있던 제이크가 나를 잠깐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그 말에 꺼진 핸드폰을 보면서 대답했다.

“아프리카로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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