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말할 수 없습니다. 미스터 리가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멈칫했던 로버트가 목소리를 냈다.
그도 내막을 공유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순 없었다.
국무부의 많은 부분이 기밀 처리된 것처럼 배신자와 관련된 얘기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강태를 불신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가 정보 팔아먹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로버트가 제일 잘 알았다.
내부 심사 전에 탈탈 털어 봤었으니까.
다만, 국무부는 물론이고, 대외협력부도 비밀을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관련 내용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다.
애초에 대외협력국 내부에서도 배신과 관련된 정황을 아는 것도 몇 명이 채 안 됐다.
신뢰하는 직속 팀장 정도.
그 이하 직원들은 최근 TF(Task Force)의 감사도 비정기적인 감사의 일환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일부러 감춘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관련 내용을 알수록 그 얘기가 새어 나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배신이나 비리 따위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안에는 실수나 협박, 도청 따위로도 아는 사실이 바깥으로 흘러나갈 가능성도 포함됐다.
즉, 알고 있는 사람 자체를 줄여야만 했다.
그게 국무부의 기본이었다.
미 행정 부서 중에 기밀이 가장 많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에 말을 아꼈으나, 강태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사람 이름 같은 걸 하나 들었는데…….”
그러면서 천천히 입이 열리고, 로버트가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근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는 강태가 그동안 보여 준 현장에서의 초인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외협력국의 현 상황 때문에 그랬다.
승인도 못 받고, 업무 협조는 물론이고 지원도 없으며, 자체 능력으로만 일을 꾸려야 해서 손이 부족한 상황.
누군가의 말이 작은 힌트가 되거나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그 주인공이 강태니까 좀 더 기대를 품을 뿐.
이에 진득하게 바라보는 사이, 잠깐을 고민하던 강태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슨이라고 압니까?”
일순, 로버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배신자라는 말에도 표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무조건반사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로버트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월터 그레이슨?!’
배신의 가능성이 있는, 100명이 넘는 최초 리스트에 담긴 이름이었다.
그중 유일한 차관보급 인물.
정확히는 정무차관 예하 유럽 사무국장에 재임 중인 자였다.
당연하게도 로버트가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직급도 직급이지만, 그가 소속된 곳도 막강하기 이를 데 없는 부서라서 그랬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 외의 사무국이 아닌 유럽 사무국.
유럽에서 벌어지는 외교 정무의 모든 분야에 간섭하는 데다가, 업무 협조의 차원에서 정무가 아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비롯한 군사 정보까지 손대는 곳이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로비 비용만 해도 대외협력국의 예산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내부 부서끼리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로버트는 틀림없이 배정되는 예산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니 군세 차관도 깜짝 놀라면서 겁을 집어먹었을 터.
한데, 그런 사람이 강태의 입에서 나왔다.
물론 이름인 월터까지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그레이슨이라는 글자가 유럽 사무국장일 건 분명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그랬다.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로버트의 흔들리던 시선이 뒤늦게 멈췄다.
‘어떻게 그 사람을…….’
주춤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이미 흥분하기는 했으나,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는 순간부터는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속을 가다듬은 로버트가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아, 그게… 카마르니아에서 제가 기절했잖습니까?”
“네, 과다 출혈이었죠.”
허벅지의 혈관이 터져서 카마르니아에서 급하게 수혈했었고, 다행히 금세 깨어났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제대로 된 허벅지 수술을 받고, 지금 이곳에서 쉬는 상황.
로버트도 잘 아는 거였다.
그걸 왜 말하나 싶은 눈으로 바라볼 때였다.
“그때 기억이 흐릿했었는데… 쉬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얼핏 들은 기억이 나더라고요.”
“……?”
로버트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사이.
강태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슨이라고 중얼거리더라고요. 마지막에 죽은 놈한테서요. 그리고 뭐라더라… 피칼? 그런 말도 했는데, 그건 이름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요.”
별거 아닌 것 같은 가벼운 말이지만, 강태가 나름 고심해서 한 중요한 얘기였다.
월터 그레이슨은 현 사태의 배후로 보이고, 피칼은 핵전쟁의 주범이니까.
물론 이런 방식보다는 좀 더 준비하고 타이밍을 노려서 말해도 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월터도, 피칼도.
그런 만큼 두 사람의 이름을 빨리 말해 줘서 헛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게 도와야 했다.
물론 피칼은 알려 준다고 당장 어쩔 수 없겠지만, 월터는 달랐다.
그는 국무부 고위 공무원으로서 배신을 내내 저지르다가, 미국 본토 내 테러를 돕고 나서야 들켜서 자살하는 놈이었다.
즉, 꼬리를 잡기까지 오래 걸린다는 뜻.
도로에서의 총격전도 월터가 꾸몄을 가능성이 큰 만큼, 강태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잡아야만 했다.
아니면 고작 30분 이동해 놓고 갱들한테 또 공격당할 게 뻔한 탓이었다.
특히나 미국은 백 단위의 ㎞는 우스울 정도로 넓은 땅인지라, 이동하는 데 몇 시간, 혹은 하루 이틀은 걸리는 게 당연한 나라였다.
말인즉슨 30분 거리도 운전하지 못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뜻.
그럴 수는 없었다.
미국 시민이 된 만큼 원하는 새 총기를 구입해서 사격하며 감을 익혀야 하고, 방어하기 용이한 주택과 유사시에 사용할 만한 방탄차도 하나 사 둬야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30분 이상은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결론은 하나.
월터를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세르게이보다 좆같은 놈이지, 씨팔 거…….’
물론 세르게이는 피칼의 오른팔답게 분쟁 지역의 테러와 핵미사일 개발이라는 더 심각한 일을 저질렀지만, 월터는 개인에게 더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정말 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피 말려 죽이려는 건지는 모를 일.
강태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어느새 충격을 가다듬은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다른 말이나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글쎄요. 그때 기절을 하는 바람에 기억이 좀 흐릿해서요.”
“알겠습니다. 그레이슨, 피칼과 관련된 사안은 제가 처리하죠. 어디 가서 발설하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대충 들어도 관련자들 아닙니까? 배신자일 수도 있고.”
“혹시…….”
로버트가 입을 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
강태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봤으나, 그 뒤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초능력자.
‘말이 안 되겠지…….’
그레이슨의 이름도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처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어떤 분야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로버트는 강태의 자료를 볼 때마다 수없이 많은 가설을 세우고 고민해 왔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내곤 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초능력자라는 단어야말로 강태를 가장 설명하기 쉬운 간단한 방법이었다.
아마 독실했다면 신의 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간 로버트가 확인했던 각종 영상 자료나 기록물의 결과가 그랬다.
굳이 병원까지 직접 찾아와서 강태의 검사 결과를 확인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
물론 초능력자라고 의심할 만한 자료는 없었다.
혹시나 검진 결과에서 이상 현상이 있을까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혈액이나 각종 성분은 아주 건강한 성인 남성이었고, 체력 수준만 상위 0.01% 수준이라고 표시된 게 전부였다.
거기다 예전에 실시했던 각종 내부 심사 테스트도 깨끗했다.
전화, 메일, 인터넷 사용 내역 등등.
이건 초능력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만, 걸리는 게 아예 없진 않았다.
‘…스캇 에반스.’
강태가 처음 발견한 배신자.
원래 제이크의 휘하 부팀장이었던 그리고 작년까지 심사 결과에서 부패와 비리 정황이 없던 용병이었다.
강태가 그를 잡아 냈었다.
무슨 얘기를 들었다면서, 문짝을 강제로 열고 노트북까지 꺼내 왔었다.
마치 확신하듯.
한데 심문 과정에서 스캇이 아주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그것도 강태와 관련된 것들에서만.
‘리에게는 결단코 코인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했었지.’
물론 그보다는 욕설이 더 많이 섞여 있긴 했으나, 중요한 건 그가 강태와 술도 안 먹었고, 아무것도 얘기한 게 없다고 진술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더 파고들진 않았었다.
그것 하나를 빼고는 모든 게 다 맞아떨어졌고, 강태도 깨끗했었으니까.
결국에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로버트는 강태를 초능력자와 비슷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바람과도 같았다.
강태가 정말 슈퍼 솔져거나 히어로이길 바라는 마음.
세계 평화, 미국의 안보 같은 이유가 우선이긴 하지만, 로버트는 전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간 작전을 치르다가 숨이 끊어진, 그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부하만 수십 명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강태가 위험한 순간에 격정적으로 반응한 것도 거기서 나온 감정 중의 하나였다.
특히나 대외협력국의 현장 요원은 미 정부와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비밀 조직이어서 죽게 되면 추모도, 명예도 받지 못할 터.
그 생각 끝에 로버트가 준비해 뒀던 걸 하나 더 내밀었다.
“리스트 확인해 보고 추가할 게 있으면 체크해 두세요.”
“무슨… 아!”
“기존 장비를 모두 가져왔고, 총기나 탄은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강태의 장비 목록이었다.
비싼 돈 들여서 샀던 것부터 알 자마쉬에서 사용한 총기 종류도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확인을 마친 강태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완벽한데요.”
“일단 병원 나오는 순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두겠습니다만, 주마다 법이 다르니까, 잘 확인해서 소지해야 할 겁니다. 여기서 워싱턴 D.C만 넘어가도 법이 많이 달라서 분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들었어요. 존… 사망한 지앤지 직원한테서요.”
강태가 멈칫하며 말을 잇고, 상황 수습을 지시했던 로버트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유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외협력국하고 관련 없을 텐데, 어떻게 지원 안 됩니까? 가족한테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좀 처리해 주세요. 아, 그레이슨하고 피칼도 부탁해요.”
강태의 말에 로버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내막을 알고 떠드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중에 피칼은 아는 바가 없어서 복귀하자마자 바로 찾아봐야 했다.
비슷한 단어가 들어간 모든 활자 서류와 음성, 영상 기록물을 뒤지게 될 거고, 거기서 그레이슨이나 세르게이와의 연관성을 전수 조사로 찾아낼 예정이었다.
물론 피칼이 사람인지, 사물인지조차 모르는 만큼 시간이 적잖게 걸릴 터.
그러나 보통은 아닐 것이었다.
세르게이가 죽는 순간에 말했다고 했으니까.
“…처리가 어느 정도 되면, 리의 퇴원도 진행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아니다, 제가 필요하면 저한테 말하세요.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는 게 편할 것 같거든요.”
그 말에 로버트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 그래도 리를 투입할 작전을 고려 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