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른 오후,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마커스의 휠체어를 밀면서 출국장을 나올 무렵, ‘G&G Corporation’이 인쇄된 A4 용지를 든 사람이 보였다.
아마도 마중 나온 회사 직원일 터.
예상이 맞다는 듯 종이를 들고 있던 이가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와우! 말로만 들었던 그분들이시군요. 뉴스 잘 봤습니다.”
“하하… 예, 반갑습니다.”
“각각 강태 리, 마커스 워싱턴 씨. 맞으시죠? 혹시 이쪽이 워싱턴이고, 이쪽이 리는 아니겠죠? 하하하!”
썰렁한 개그에 쓴웃음만 짓자, 그가 알아서 말을 이었다.
“저는 편하게 존이라고 불러 주세요. 오늘 여러분들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보험 접수를 대행하고. 그리고…….”
말하던 그가 돌연 서류 가방을 열기를 잠시.
뭔가 뒤적거리더니 내게 뜯지도 않은 두툼한 우편물을 하나 내밀었다.
“이것도 전달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리. 축하드립니다.”
“……?”
뭔가 해서 봤더니, 전에 본사로부터 연락 왔었던 영주권이었다.
뜯어 보기를 잠시, 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거 갖고 다니시면 되고, 이따가 정보도 새로 적어 주셔야 하거든요? 여기 보시면…….”
그러면서 부스럭거리던 존이 서류 가방에서 봉투를 재차 꺼내었다.
뭘 또 주나 했는데, 이번에는 마커스도 받았다.
“원래 여기서 드리려고 한 건 아닌데, 얘기하다 보니까… 미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 이런.”
어느새 봉투를 열었는지, 마커스의 감탄이 들려왔다.
왜 그러는지 나도 금세 깨달았다.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게 G&G Corp의 새 계약서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조건이 크게 상향된 상태.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던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에게 미리 들었던 내용 중 하나였다.
‘월급이… 오, 맞네.’
얘기했던 대로 4만 달러 이상.
정확하게는 기본급만 약 48,000달러였고, 1년 연봉으로 58만 달러에 근접했다.
한화로 대략 7억 원이 훌쩍 넘는 돈.
아마 보너스 몇 번 받다 보면 연봉은 10억이 훌쩍 넘어갈 것 같았다.
그것도 기밀이나 세금이 아니라, 정당한 수익.
내용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팀 다 새로 하는 거죠?”
“예? 아, 예. 그분들은 2주 전에 계약을 새로 마쳤을 겁니다.”
그 말에 마커스가 계약서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다들 계약 기간이 꽤 남은 거로 아는데, 갑자기 왜 진행하는 겁니까? 그것도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방식으로.”
“아마 최근의 공로 때문일 것 같은데… 어디 문제라도 있나요? 알기로 업계나 연차 고려해서 최고 수준으로 산정했다던데. 싫으신 건 아니죠?”
“아, 그렇진 않습니다. 갑작스러워서 물어본 겁니다.”
“하하, 그러실 수 있죠. 이해합니다. 저도 이런 경우가 드문 편이라……. 그래도 현장 일만큼 갑작스럽진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바로 사인해도 됩니까? 받은 김에 해서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 지금 하시게요? 지금 하셔도 좋죠. 자, 여기 펜 받으시고…….”
갑자기 이뤄진 사인에 나도 펜을 들 무렵.
전화가 걸려 왔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던 마리아의 연락이었다.
-리! 지금 공항이야?
“어, 공항이야. 방금 직원 만나서 대화 좀 했는데… 어디야?”
말하면서 공항 내부를 둘러보려던 무렵.
“……?”
두 사람이 내 시야에 걸렸다.
방금 만난 존과 마커스가 아니라, 꽤 먼 곳에 있던 건장한 남성들이었다.
활동하기 좋은 워커에 통이 넓은 청바지 그리고 품이 큰 패딩 점퍼를 입은 차림.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주변을 주시하는 눈빛이나 시선 처리가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예상대로 내게 신호가 왔다.
눈 아랫부분을 문지르듯 손끝을 대는 모습.
담당 직원인 릴리 모건에게 미리 들었던 아군을 의미하는 암호 중의 하나였다.
나도 비슷하게 자세를 한번 잡아 주자, 날 보던 이들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당히 자연스럽고도 신속한 모습.
‘…다들 한가락 하는 양반들이네.’
아마도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훈련 깨나 받은 특작 요원일 것이었다.
짐작하는 사이, 마리아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처럼.
-아, 어떡하지. 지금… 늦을 것 같아. 30… 아니면 35분? 40분……?
“흐흐, 늘어나네. 그러면 차라리 병원으로 와.”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뭘… 휴가 쪼개서 오는 거잖아? 안 와도 되는 건데.”
-아냐, 가고 싶었는데……. 미안해, 그럼 병원으로 가도 될까?
“그래, 뭐. 병원으로 와.”
가볍게 전화를 마치는 사이, 마커스가 눈썹 하나를 올리며 물어왔다.
“애인이 못 온대?”
“애인은 아니고… 그냥 친구지, 친구.”
“아, 그래. 널 너무 좋아하는 친구였지. 하여튼 잘됐군. 호세의 말처럼 애인이 있으면 좋긴 좋거든.”
“아직 아니지만 뭐… 그렇다 치자.”
“나도 와이프한테 병문안을 오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잡담으로 이어지는 사이, 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럼 저희도 병원으로 가시죠, 밖에 차량 준비를…….”
“아뇨, 총포상부터 들렀다 갑시다.”
공항 밖으로 안내하려기에 얼른 말을 잘랐다.
“네? 거긴…….”
“이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영주권이 들어 있는 우편 봉투를 흔들자, 존이 멈칫했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되긴 되는데… 바로 총포상부터 가시게요? 병원 검사하고 재활 끝나고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떨지…….”
“아뇨, 총부터 삽시다. 비무장이라서… 좀 불안하달까요, 좀 그래요.”
가벼운 농담만은 아니었다.
손발이 달달 떨릴 만큼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내심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권총 한 자루라도 있어야 적에게 응사하든, 뭘 하든 할 테니까.
그러자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불안하다고? 네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있는 게 낫잖아?”
“으음, 그건 그렇지. 너한테 총이 있다면 무서울 게 없을 테니까.”
그렇게 대화하던 무렵, 존이 눈치를 봤는지 스윽 목소리를 냈다.
“그럼 차라리 우리 회사와 업무 협약을 맺은 곳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좀 돌아가야 하긴 하는데…….”
“오래 걸려요?”
“아마 들렀다 가면 30분 정도 더 걸릴 겁니다.”
“괜찮네요. 그럼 들렀다 갑시다.”
내 대답에 마커스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했고, 존도 수용한 듯 바깥으로 손짓했다.
“자, 그럼 이쪽으로 모시죠.”
“예, 알겠습니다.”
대답이 흔쾌히 나왔다.
릴리 모건에게 전해 들었던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고에 비해, 아직까지는 아주 좋았다.
방금 재계약을 마쳤고, 이따가 여자인 친구도 만나고, 검사 겸 재활 목적으로 좀 쉬기만 하면 될 테니까.
거기다가 받게 된 활동비도 좀 쓸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살아야 하니까 집도 있어야 하고, 차도 있어야 했고, 내 총도 필요했으니까.
당연히 위시 리스트도 어느 정도 준비한 상황.
뒤에 경호원 같은 이들이 따라다니고 있긴 했지만, 별일만 없다면은 뭘 하든 상관없었다.
경호해 준다는데 나쁠 것도 없었고.
그렇게 공항을 나가자, 검은색 밴이 한 대 서 있었다.
휠체어까지 통으로 실을 수 있게, 짐칸 비슷하게 개조된 차량이었다.
이에 마커스를 싣고, 보조석에 앉은 다음이었다.
뒤에서 운전석과 연결된 창을 열었다.
“여기 총은 없습니까?”
“아, 총이요?”
“네, 혹시 모르니까요. 뭐 돌격 소총 같은 건 없습니까?”
내 말에 존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현장에 계셨다 온 분은 역시 다르군요. 여긴 분쟁 지역이 아닌 미국이라서 안 갖고 다닙니다. 사실은 그것보다 주마다 총기 소지법이 달라서 갖고 다니기가 힘들죠. D.C를 사이에 둔 버지니아와 메릴랜드만 해도 총기 규제 차이가 엄청 크거든요.”
그러면서 존이 웃어 보였다.
나도 미국은 알 자마쉬나 카마르니아하고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안전할 거라고.
타깃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거기다 경호원들까지 있었으니까.
물론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는 장비는 필요했다.
“권총도 없습니까?”
“아, 있긴 합니다만… 갖고 계시게요?”
“네, 총포상 다녀오면 돌려드릴게요.”
“아… 하하, 알겠습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M&P고, 10발들이 탄창을 낀 겁니다.”
그의 설명과 함께 M&P를 받았다.
9㎜ 파라블럼탄을 쓰는 글록과 비슷한 디자인의 권총.
습관적으로 약실과 탄창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10발이요?”
“네, 많이 부족하죠? 하하, 말씀드렸던 메릴랜드 주법이 최대 10발이라서 거기에 맞춘 겁니다.”
“어… 거긴 제 스타일은 아니네요.”
“하하하하, 그런가요?”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이.
금세 차가 출발했고, 어느새 공항 근처의 큰 도로를 타고 달렸다.
주변의 건물이 금세 사라지고 도로만 남은 모습.
이를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데, 새삼 미국 땅덩이가 얼마나 넓은지 체감했다.
전에 제이크와 만났던 오리건주에서도 느꼈던 거였다.
이런 데서 교전하면 쉽지 않겠다고.
그사이, 운전석에서 존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이쪽이 총포상입니다. 영점 잡을 수 있게 사격도 되는 곳이라 좋습니다, 회사 직원 할인도 되고요.”
“그건 좋네요.”
그렇게 대답하고, 차량이 옆쪽으로 빠져나갔다.
차선이 두 개뿐인 2차선 도로.
그때였다.
“어억?!”
존의 놀란 소리와 함께 차가 흔들렸다.
급정거였다.
끼이이이이이익―!
그것도 반 바퀴를 돌아가면서 멈추는 상황.
귀를 찢는 마찰음이 끝나면서 차가 도로를 대각선으로 막듯 멈춰 섰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풀면서 존에게 상황을 물으려던 순간.
타다다다다다다당!
총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마커스를 붙들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어졌다.
투다다다다다다당―!
캉! 피융―! 카강!
차가 종이 호일처럼 뚫리며 사방으로 총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미쳤군, 씨발. 미국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커스가 탄식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총을 고쳐 잡으면서 문 쪽으로 기어갔다.
방향을 봐서는 앞쪽에서만 탄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뒤로 내릴 무렵.
“리, 조심해.”
마커스의 말과 함께 슬쩍 문을 열었다가, 공항에서 봤던 두 요원을 목격했다.
그들도 교전 중이었다.
정확히는 우리 뒤에 붙어 있던 적들을 사살하는 상황.
‘뒤는 눈먼 총알만 아니면 안전하겠고…….’
판단을 마치면서, 대각으로 가려진 차체를 따라서 상체를 숙이고 다가갔다.
아주 천천히, 조심히.
방탄복이 없어서 모습을 확 드러냈다가는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운전석 부근에서 차창 쪽을 살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존이 이미 사망한 탓이었다.
그것도 대응조차 못 하고 총알 세례를 맞아 절명한 모습.
“아…….”
탄식으로 감정을 정리하고, M&P를 들면서 한 발씩 옆으로 나갔다.
사격 각도를 점차 넓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시야에 이질적인 게 보였다.
사람 형체, 정확히는 한쪽 무릎과 허벅지, 발이었다.
타앙―! 타탕!
첫 발에 적이 쓰러지면서, 남은 두 발이 순식간에 따라 나갔다.
어깨와 머리에 각 한 발.
보이는 것부터 차례로 맞힌 것이었다.
“뭐, 뭐야?! 어디서 쏜 거야!”
적의 목소리였다.
다소 투박한 영어가 튀어나오고, 총성도 따라서 주춤했다.
그 순간에 각도를 더 넓혔다.
점진적으로.
그리고 보이는 것부터 차례로 맞혔다.
탕! 타당!
거의 연발 같은 속사.
비명도 못 지르고 한 명을 더 보내자, 고함과 함께 총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투다다다다당!
캉! 카강!
차 엔진을 때려 대는 파열음이 울리는 사이.
옆으로 다시 발을 옮기면서 차에 가려져 있던 적이 보이길 기다렸다.
한 발씩, 한 발씩.
카마르니아에서 했던 CQB 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형체가 또 보이는 순간.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이번에 2발로 머리까지 맞힌 뒤에 불쑥 나갔다.
적의 총성이 멈추고, 동시에 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도망이었다.
혼자 남은 놈이 당황해서 뛰는 것일 터.
빠르게 나아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양발을 하나씩 맞혔다.
동시에 철컥, 소리와 함께 슬라이드가 젖혀지며 텅 빈 약실이 드러났다.
탄을 전부 소비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달리던 놈은 바닥에 엎어진 상황.
놈을 의식하며 총기를 노획하려던 무렵, 뒤에서 다가온 묵직한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익숙한 워커를 신은, 공항에서부터 따라온 대외협력국의 요원들이었다.
“리, 그만해도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맡죠.”
“그럽시다. 근데… 하나만 물읍시다.”
“말씀하세요.”
“지금 이거… 확실히 타깃이 된 거죠?”
“전달받은 바에 따르면…….”
요원이 잠깐 말을 고르는 것처럼 주춤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체할 말이 없다는 듯한 모습.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