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정보 유출의 정황을 확인한 로버트는 빠르게 대외협력국 내부 감사 TF(Task Force)부터 꾸렸다.
정보 유출의 범위가 넓다 보니, 대외협력국부터 단속하려는 것이었다.
목적은 단 하나, 배신자 색출.
그러나 바람과 달리 결과가 일찍 나오지는 않았다.
검증된 인력이 소수에 불과한데, 그 인원만으로는 실물 자료와 디지털 기록물을 모두 파악하기 버거운 탓이었다.
그 결과, 3주가 지난 뒤에야 보고서가 나왔다.
가장 먼저 내용을 살핀 로버트가 근심을 덜듯 한숨을 흘려냈다.
“후…….”
내용이 꽤 많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 안에 강태와 관련된 정보 유출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있는 건 관리 부실이나 업무 태만, 추가 수당 편법 수령 같은 것들.
그러나 한숨과 다르게 보고서를 보는 로버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드러난 잘못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보가 대외협력국에서 유출된 게 아니라면, 배신자는 관련 내용을 공유하거나 업무 협조를 한 곳에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버트가 알아내는데 제한이 있는 곳들이었다.
소속 직원도 아니고, 죄를 밝힐 권한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찾아봐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대외협력국이 소속된 국무부를 시작으로 세르게이의 시신 확인 등을 도운 CIA와 테러 정보를 공유한 국토안보부, 강태의 관련 정보를 파악해 준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까지.
지난 3주 동안 파악해 본바, 감사가 필요한 최소 인원만 무려 100 단위가 넘어갔다.
혐의점을 늘리거나 확대하면 수백, 수천 명은 가뿐히 돌파할 터.
물론 손대지 못할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나하나 전수조사를 하라면 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직급도 말단 직원부터 차관보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로버트가 제아무리 세다고는 해도 이걸 전부 들쑤실 순 없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국무부의 실세 중 한 명이자, 직속 상관인 군세 차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3주간 보완한 자료까지 들고서.
“엔더슨 국장입니다, 차관님.”
그렇게 노크하고 들어갔으나, 돌아오는 답은 그의 기대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진심입니까? 이 사람들을 다 감사하자고요?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 선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차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럼 내 선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렵지만, 그래도 위에 보고하면…….”
“장관님을 해고시키려고 작정한 겁니까?! 갑자기 왜 이래요? 그동안 잘해 왔잖아요?”
“차관님, 내부 자료… 그것도 강태 리의 정보만 고의적으로 흘려 보냈습니다. 이건 핵탄두나 탄도미사일 개발, 수입을 방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입니다. 비유하자면 매국이나 반역에 가까운 …….”
“그만.”
로버트의 길어지려던 설명이 한 단어에 잘려 나갔다.
이어서 차관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요, 왜 그러는지는 잘 알겠어요. 보고 받아서 압니다. 그 아시안을 훌륭한 전략 병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었죠. 하지만 엔더슨 국장이 가져온 건 확실한 증거보다는 정황에 가깝고… 거기다 그는 아직 우리 국민도 아니고, 기껏해야 계약한 위장 요원 중의 한 명일 뿐이에요.”
로버트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태는 저격수를 비롯해 최신식 AR-15 계열 소총으로 무장한 9명의 적을 제거한 전적이 있었다.
다해서 13명.
이는 스페셜포스의 1개 분견대인 12명보다 한 명 많은 숫자였다.
즉, 혼자서 스페셜포스 1개 분견대를 모두 죽이고, 거기다 한 명을 더 죽였다는 소리였다.
강태가 죽인 이들이 허접한 반군이 아닌 세르게이의 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스페셜포스와 실력 차이도 크진 않을 터.
이에 로버트가 대꾸하려던 때였다.
“하지만 강태 리는…….”
“압니다. 세르게이의 죽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고, 수많은 테러 분자를 사살했죠.”
동시에 차관이 화두를 돌렸다.
강태 개인의 능력에서 기구 간의 힘 싸움으로.
“…하지만 이 정황만으로는 CIA에 공문을 보낼 수 없어요. CIA는 단편적으로도 우리 국무부보다 많은 예산을 받는 곳이에요. 그리고 국토안보부는 예산 규모가 비슷한 곳이고, 국가안보국이 그나마 적긴 하지만, 그 힘과 위세가 결코 약하진 않죠. 당신도 잘 알 것 아닙니까, 엔더슨 국장.”
“…….”
차관의 부름에도 로버트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강태의 실력에 대한 게 아니라, 각 부처 간의 힘과 정치로 옮겨 간 탓이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로버트 역시 겪어 봤다.
기구 간의 기 싸움과 정치 싸움으로 업무 효율이 떨어졌던 상황들.
그리고 그건 대외협력국이나 CIA만이 아니라, 미국에 설립된 수많은 기구가 해당됐다.
CIA가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건, 규모도 크고, 업무 분야도 넓고, 가진 돈과 힘이 대단해서 더 이슈가 됐을 뿐.
이에 로버트가 입을 닫는 사이, 차관이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국장이 가져온 목록에는 차관보급까지 있어요. 정황만으로 이 사람들의 주머니를 다 뒤지는 건 어려워요. 상대가 미 본토에서 테러를 지원했다는 정황이라면 모를까… 영주권자의 신상 유출 정도로 움직일 순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순히 기록된 자료로만 보면 강태는 영주권자였고, 상대는 힘센 기구였으니까.
하지만 로버트 역시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배신자를 가만히 둬선 안 되니까.
“정황까지 나왔는데 이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배신자가 이 사안을 내부에서 묵인했다는 걸 알면… 그때는 말씀하신 것처럼 미 본토에 테러 같은 것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
그 말에 차관이 바로 대꾸하지 않길 잠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한 로버트의 시선이 쉽게 포기할 것처럼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허튼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젊을 때는 현장 요원이었고, 이후에는 사무와 행정을 보기 시작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 수많은 테러리스트를 제거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이렇게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한 수 접어 줄 필요가 있었다.
신뢰의 문제든, 사기 진작 차원이든.
판단을 마친 차관이 조금 아쉬운 허락을 내놨다.
“비공식적으로 사후 처리나 필요한 지원을 허가할 테니까, 문제 발생하지 않게 조심히 진행해 봐요.”
“알겠습니다.”
다소 맥이 빠지지만, 그냥 고개를 숙이고 나와야 했다.
능력도, 권한도 안 되는 일을 강제로 진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고 로버트도 이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미 각종 기구와 업무 협조 과정에서 알력 싸움도 숱하게 겪어 봐서 잘 알았다.
그래서 내키진 않으나, 거기에 맞는 계획도 세워 왔었다.
‘…결국은 환자에게 부탁해야겠군.’
강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독일에서 수술을 마친 그에게 비공식 작전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종의 함정, 혹은 미끼 역할.
강태의 자료를 일부러 흘린 배신자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것도 확실한 게 아니라,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국무부 타 부서나 CIA, 국토안보부, 국가안전국을 손댈 순 없으니, 다른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을 전부 시도해 봐야만 했다.
군세 차관실을 나온 로버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 *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대형 병원.
“아, 어디까지 얘기하셨죠?”
내 병실에 들어서면서, 기다리고 있던 조범용에게 물었다.
대화 좀 나누다가 통화하러 나갔다 온 탓이었다. 상대인 조범용을 만만하게 봐서 그런 건 아니었다.
대외협력국의 담당 직원인 릴리 모건에게서 전화가 온 탓이었다.
그나마 통화가 짧아서 괜찮았는데, 막상 들은 얘기는 무거워서 마음이 편하질 못했다.
아니,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입국한 뒤에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누군지도, 뭘 하는지도 그리고 정말 움직이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제 진짜 막가는구나…….’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라레플 어디에도 내가 타깃이 되는 미션은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적이 나를 조준할 순 있었다. 아니, 당연히 가능했다.
라레플은 오픈 월드 FPS 게임이니까.
다만, 그건 전장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지, 워싱턴 덜레스공항에서부터 진행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게임 후반부에 미국 본토에서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미국 주요 도시에서 시가전을 벌이긴 했지만, 그건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은 그 눈속임을 할 세르게이도 없고, 테러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
사뭇 당황스러웠으나, 그렇다고 미국에 안 갈 수도 없었다.
갈 만한 곳도 없을뿐더러, 어차피 나한테는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안전하지 못하면, 다른 나라도 비슷할 터.
차라리 대외협력국이 뒤를 봐주고, 내 팀원들이 사는 미국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종료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조범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를 맞이한 것이었다.
“아, 별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근데 허벅지는 많이 나으신 겁니까? 잘 걸으시네요.”
“네, 뭐… 생활할 정도는 됩니다.”
“아휴,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자국민이 입은 부상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조범용이 그러면서 허허,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눈치 보는 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자국민이나 대한민국, 우리나라 등의 어휘를 좀 많이 사용한 데다가 중간에 한국 대학 병원에서의 치료나 검사를 권하기도 했었다.
아마 영주권 취득을 비롯해 앞으로의 국적까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했다.
여러 국가에서 나한테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판이니까.
한국이라고 가만있을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소극적이라서 아쉽기까지 할 무렵.
예상대로 그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한국을 떠날 계획도 갖고 계시는 겁니까?”
“이민이요?”
내가 분명하게 짚자,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하하… 그렇습니다. 이민을 권하는 나라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예, 벌써 사인했는데요.”
그의 의문에 확답을 해 줬다.
“…네? 사인이라면… 아, 독일? 아니면 미국입니까?”
“미국이요.”
어차피 곧 서류상으로 처리가 될 문제라 가볍게 대꾸했는데, 조범용은 자못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국적을…….”
“예, 포기해야죠. 저도 사정이 좀 있어서요.”
대외협력국과 관련된 거라 말을 가리자, 알아서 오해한 조범용이 주춤하며 물어왔다.
“…사정이라고 하시면, 미국에서 회유 같은 게 있었던 겁니까?”
“회유요? 뭐, 미국만 했겠습니까?”
“…아, 그럼 그 소문들이 다 맞겠군요. 분쟁국에서 테러리스트 제거한 공과를 세웠다는… 정말 개탄스럽군요, 선생님 같은 분을 몰라보고 놓쳤다는 게…….”
“그럴 수도 있죠, 살다 보면 뭐…….”
과거와 천지 차이로 바뀐 태도에 그러려니 하는데, 물음이 또 이어졌다.
“그럼 국적도 완전히 옮기시는 겁니까?”
“아마도요.”
“그러면… 미국이 저희의 우방국인 만큼, 선생님께서도 한국이 어려울 때는 도움을… 좀…….”
대화의 끝부분에 나온 본심인지 부탁인지 모를 말에 웃고 말았다.
“그럼요, 충분히 돕죠. 제가 국정원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한국은 좋아하거든요. 국적은 바뀌어도, 핏줄은 한국 거잖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마친 뒤.
조범용이 일어나서 꾸벅 고개 숙이고 떠날 무렵, 때 맞춰서 휠체어를 끈 마커스가 등장했다.
수술을 잘 마치고 3주간의 회복 끝에 제법 멀쩡해진 모습.
그런 마커스가 웃는 낯으로 말을 걸어왔다.
“리, 인기는 여전하네. 출국 준비는 다 했어?”
“어어, 다 했어. 이것만 들고 가면 돼.”
그의 말에 가방을 챙겨 들며 일어났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서 뭔지 모를 불확실한 타깃이 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