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국정원과의 통화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되었듯, 독일계 인물과의 대화도 짧게 끝났다.
안부와 인사, 내 성과에 대한 감탄 정도가 전부.
시간적인 여유가 넘치는 걸 봐서는 홈그라운드라고 마음을 놓은 듯 보였다.
얘기를 마치고 떠나는 길에 한 말도 수술 잘 마치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나 독일만 그랬고, 다른 나라는 아닌 모양이었다.
국정원에서는 약속을 잡자는 문자를 보내왔고, 다음으로 영국 억양의 영어로 연락이 왔으며, 끝으로 프랑스 억양이 강한 사내가 전화를 해 왔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로 총 5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셈.
병실이 1인실이라서 다행이었다.
다인실이었다면 편하게 통화하기가 좀 어려웠을 테니까.
‘허… 선거철에 전화 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놈의 연락이…….’
헛웃음이 절로 나올 때였다.
또 전화가 걸려 왔는데, 이제서야 등록된 번호가 표시됐다.
마리아 오뒤르.
카마르니아에 파견됐던 UN OCHA 조사 팀의 일원이자, 내게 관심을 보였던 남미계 미인으로 근래에 몇 번 정도 연락했던 사이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도 짧게 연락했었고.
곧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아까부터 계속 통화 중이던데… 많이 바쁜 거야?
“아냐, 나는 한가해. 상대가 바쁘지.”
-그럼 통화해도 돼?
“어어, 해도 돼.”
-다행이다, 혹시 병원에 언제까지 있어? 금방 떠나는 건 아니지?
“아마 며칠, 아니면 몇 주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수술 끝나야 알 수 있을걸.”
-많이 심각한 거 아니야?
“아냐, 뭐… 괜찮아.”
-그럼 내가 병문안 가도 될까? 모레 정도에 휴가가 날 것 같아서…….
“여기로?”
-응, 안 될까?
“아니, 그야 당연히…….”
남미계 혼혈 미인인 마리아가 온다는데,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여자를 싫어할 사람도 아니고.
이에 흔쾌히 대답하려다가 주춤하고 말았다.
이 병실을 감시하고 있을, 내게 전화했을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마리아를 주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감시를 넘어서서 직간접적으로 접근할 여지가 있었다.
운이 나쁘면 평범하게 일하는 그녀의 생활마저 꼬이거나 번거로워질지 모를 일.
물론 수술 직후에 병문안을 온 그녀와 병실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주의를 끌 만한 행동을 하진 않겠지만, 날 찾아온 것만으로도 마리아 역시 관찰 대상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게 다 내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내가 가진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방금까지 5개국의 정보기관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아… 좀 애매할 것 같은데…….”
-응? 안 되는 거야?
“아,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좀 복잡해.
-복잡하다고?”
“어, 말하기가 좀 그런데… 차라리 미국에 가서 만나는 게 낫겠어. 여기는 좀 그래.”
-혹시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거야? 카마르니아 일이 뉴스에도 나왔던데…….
“아, 그래. 비슷해. 근데 문제가 되는 건 아니고, 그냥 복잡한 거라서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도와줄 건 없구? 증언이나 진술서 같은 건…….
“하하하, 그런 건 마음만 받을게. 괜찮아.”
말끝에 쓴웃음이 났다.
휴가까지 쓰면서 병문안을 오겠다는 미인을 오지 말라고 거절한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돌아오는 답이 나쁘지 않아서 괜찮았다.
-그럼 미국에 오게 되면 미리 연락해. 내가 공항으로 갈게.
남미 억양이 조금 묻은 그 말에 알겠다고 답하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당장 여자를 못 만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은 삶이었다.
그때는 서른아홉이 될 때까지 결혼은커녕,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봤고, 아는 여자조차 없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인생이었다.
다만, 내게 더 중요한 건 빠르게 회복하고 난 뒤에 피칼을 찾아서 핵전쟁의 위협을 막는 일이었다.
물론 그게 내키는 대로 되진 않겠지만, 될 수 있으면 내 관심사도 그쪽에 둬야 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흘러갈지 감도 안 잡히니까.
‘이제 타이밍 봐서 피칼 이름도 스윽 말해 줘야 하는데… 미국에 들어가서 국무부 들렀을 때 언급하면 되려나…….’
그렇게 말해야 하는 타이밍을 나름 고르는 사이.
사람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국무부에 로버트 말고도 라레플의 캐릭터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월터 그레이슨.
그도 배신자였다.
스캇처럼 정보를 넘겨다 주는 작자였는데, 스캇하고는 사회적인 위치나 부류가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일개 용병이 아니라, 새까만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고위 공무원.
그것도 국무부 차관보급이었다.
대외협력국 국장인 로버트와 비슷한 수준일 터.
당연하게도 스캇에게 그랬듯 행동하기 어려운 인간인지라, 여러모로 고민이 됐다.
‘이 새끼를 어떻게 한다…….’
이전까지는 대외협력국 소속도 아니고, 국무부에 갈 일도 없어서 그냥 인지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 일이 진척된 만큼 월터를 방관할 순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그는 스캇의 노트북을 훔쳤듯 소지품 하나 훔친다고 처리 가능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훔쳐서도 안 됐다.
월터는 나하고 조금의 연관성도 없어서 거짓 핑계 같은 것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비서가 업무 시간 내내 있고, 출장 중에는 경호원까지 배정됐다.
즉, 고민 좀 한다고 해서 해결 가능한 악당이 아니라는 뜻.
“하…….”
한숨이 나왔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월터의 배신 행위가 결국에는 발각된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세르게이가 미국 본토에 테러하기 직전.
월터는 테러 준비를 돕다가 들켰고,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입안에다가 권총을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겨서 생을 끝냈었다.
범죄자들의 흔한 죽음 중의 하나인데, 문제는 그게 게임 후반부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더 있었다.
이제 그런 스토리는 없고, 세르게이도 죽었다는 사실.
망망대해가 펼쳐진 것만 같았다.
‘세르게이가 뒈졌다고 배신을 그만두진 않을 새낀데… 어떻게 하려나…….’
골치가 아프고, 가늠도 어려워서 생각을 반복할 무렵.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리―
그러나 전하고는 좀 달랐다.
로버트로부터 받았던 작은 손가방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가 말했던 담당 직원일 터.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 담당이 될 여직원이 자신의 소개를 해 왔다.
-미스터 리? 반갑습니다.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저는 앞으로 미스터 리의 업무 보고와 활동비 지급, 패스워드 고지, 그 외의 특이사항을 전반적으로 관리하게 될 릴리 모건이라고 해요.
그 뒤로 내가 짧게 인사하자, 카드 패스워드를 고지했고, 주의 사항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미스터 리, 당신이 우리의 일원이 된 걸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당신의 힘이면 미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아, 예. 나도 잘 부탁합니다.”
그녀의 장황한 인사에 짧게 인사했다.
계속해서 고민한 탓이었다.
월터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물론 그런다고 해서 해답이 될 만한 게 곧장 나오진 않겠지만, 생각을 미뤄 둬서도 안 됐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야 했다.
특전사에서 배운 것도 그랬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건 일단 포기하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고, 최선을 다해야만 이룰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 면에서 내게는 좌우명이기도 했다.
내 전부였던 부대에서 반병신이 되어 떠난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죽고 싶을 때도 악착같이 버티며 살았었고.
그게 지금의 나였다.
* * *
늦은 오후,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서류 가방을 든 로버트가 여객기에서 내리고 있었다.
밤샘 근무와 왕복 16시간 이상의 비행으로 그의 안색이 상당히 나빴는데, 막상 표정은 괜찮았다.
입꼬리에 미미한 웃음이 걸릴 정도.
이틀 내내 생고생한 성과가 그의 서류 가방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강태가 서명한 대외협력국과의 계약서.
‘…이제 비정규전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겠어.’
미국의 비정규전 능력은 이미 세계 최고인 만큼, 아래 순위에 있는 국가들은 완전하게 따돌리게 될 것이었다.
물론 정확히는 강태의 능력을 측정해 봐야겠지만, 예상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었는데, 로버트가 특히 눈여겨본 건 따로 있었다.
강태에게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이는 단순히 아쉬운 부분이 있고, 개선할 점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바로 의지와 행동이었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하고, 노력하는 자세.
강태는 스스로의 실력이 대단한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배우려고 하고 있었다.
계약서에 요구했던 것들만 봐도 분명했다.
최신 전술 교리에다가 각종 교육 이수와 장비 지원 등을 요구했으니까.
‘여기서 더 발전한다면… 웬만한 무장 집단은 혼자서도 해산시키겠군.’
수십 명 단위의 불량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열세의 상황에서도 열악한 무기로 사살한 적이 있으니, 그건 논할 필요도 없었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활동하는 수백에서 수천, 만 명 단위로 이뤄진, 장갑차와 다연장 로켓포까지 소유한 대규모 반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카마르니아에서 보낸 제이크의 보고만 해도, 강태가 전술 교리를 실시간으로 바꾸며 고쳤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게 강태의 쓰임을 고민하면서 대외협력국 사무실로 도착했을 때였다.
로버트의 눈매가 좁아졌다.
“……?”
입구에서부터 부서장급인 팀장 한 명이 그를 마중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중요하거나 긴급한 일이 있으면 미리 나와 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전화나 문자 등의 연락조차 없었고, 기다리고 있던 팀장 역시 표정이 무겁고도 초조하다는 게 그런 때와 많이 달랐다.
로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나?”
“국장님… 그게, 혹시 들은 내용이 있으십니까?”
“똑바로 말해, 뭘 들었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그…….”
팀장이 재차 주춤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강태 리에 대한 자료를 고의적으로 흘린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지금 그 말…….”
로버트가 말을 뱉다가 이를 꽉 다물고 말았다.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떠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기도 했기에, 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
“…보고서 있나?”
“예, 저희 쪽 정보원의 제보와 감청 자료가 있습니다.”
“내 방으로 갖고 와.”
“알겠습니다.”
팀장이 자리를 뜨자, 로버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밤새서 일하고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 성과를 올렸더니, 그걸 덮을 만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건 G&G Corp 직원이었던 스캇의 일탈과는 급이 다른 사건이었다.
그는 국무부와 조금도 상관없는 군 출신의 일개 용병에 불과했지만, 지금 나온 배신자는 국무부나 업무 협조를 해준 CIA, 국토안보부의 직원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세르게이 볼코프 건으로 포상도 아직 안 나갔는데…….’
로버트의 눈 밑이 시커메지는 사이.
금세 보고서가 올라왔다.
예상대로였다.
국무부와 CIA, 국토안보부 중 한 곳에서 강태의 관련 자료가 유출됐었다.
마치 신인 배우의 프로필이라도 돌리듯.
그러자 로버트의 머릿속에 최근 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떠올랐다.
‘…독일에 다녀온 게 천만다행이군.’
로버트가 안도의 숨을 흘렸으나, 내부의 배신자가 발생했다는 생각에 그 끝이 한숨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까지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