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로버트의 시선이 문장을 몇 줄 더 읽어 내려갔다.
단어 여러 개가 적혀 있었다.
각종 병기 테스트와 최신 전술 교리 학습, 주특기 교육 등등.
주로 작전에 도움이 될 만한 사안과 실력 육성과 관련된 단어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끝에는 강태가 처음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팀원들도 모두 계약하길 바라고, 같지는 않더라도 좋은 보상을 받길 원한다고.
‘확인을 좀 해 봐야겠는데…….’
항목이 꽤 많아서 주춤했으나, 로버트가 직업적인 본능으로 단어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한 것과 가능한 것 그리고 신경을 써야 할 것들.
그 안에 불가능한 건 없었다.
어느 정도 타협을 봐야 하겠지만, 전부 가능했다.
물론 핵전략 잠수함 같은 건 요청해도 지원해 줄 순 없지만, 애초에 강태가 무리한 걸 바라진 않을 것이었다.
작전에서의 결과는 비현실적이지만, 강태라는 사람 자체는 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대화 방식이나 음식 취향 같은 사소한 것들도 마찬가지였고.
이에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전부 가능합니다만… 조정이 필요합니다.”
강태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이.
금세 말이 이어졌다.
“우선 문제될 만한 것부터 말하자면… 처음에 말했던 팀원과 관련해서 할 얘기가 좀 있습니다.”
“예, 편하게 말씀하시죠.”
“이미 관련해 내부에서 진행한 자료가 있습니다. 기구의 존재가 1급 기밀인 만큼 사전에 취합한 정보로 임시 테스트를 거치게 되는데…….”
그러면서 로버트가 잠시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어 갔다.
“후보 중 한 명이 과거 부상으로 인해 왼손 약지와 소지 일부가 굽혀지지 않으며, 장거리 출장으로 인한 가정불화의 조짐이 있고, 전쟁 스트레스로 인한 악몽을 정기적으로 꾸고 있습니다. 해당 단점들로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했었는데,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말하는 걸 보니까, 동료 중의 한 명인 것 같네요.”
혹시나 해서 뱉은 대답이었는데, 로버트가 거기에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호세 페레즈입니다.”
“…….”
강태가 그제야 멈칫했다.
호세에게서 손가락이 고장 났다는 농담조의 말을 오래전에 듣긴 했었지만, 그 외의 구체적인 말들은 모두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세가 가정불화에 악몽을……?’
내부 심사에서 걸린 사실만 알고 있던 강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건 게임 어디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내용이었다.
특히나 호세는 팀에서 가장 시끄럽고 유쾌한 사람이라서 짐작도 못 한 문제들이었고.
이를 눈치챈 로버트가 의견 관철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 외의 예도 있지만, 호세 페레즈로 대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를 비롯한 동료와의 계약은 추후 관련 검사를 진행하고 상황이 나아진 뒤에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기구의 보안과 존속을 위해서라도 그 일은 천천히 상황을 봐 가면서 추진하는 게 나을 겁니다. 이건 호세 페레즈와 우리 기구 그리고 미스터 리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말끝에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로버트가 말에 힘을 줬다.
“그리고 계약 이후에는 최고의 요원들로 팀을 꾸리게 될 겁니다. 원한다면 요원 리스트를 주고 고를 수……”
“아뇨.”
“있게… 네?”
강태가 불쑥 말을 끊었다.
“팀은 그대로 가야 합니다. 안 바꿀 겁니다.”
“…말했듯이 호세 페레즈는 합격점 미달이고, 현재 마커스 워싱턴도 부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또한, 현재의 팀도 노출되기 시작해서…….”
로버트가 재차 설명하려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잘 알고, 또한 믿는 건 우리 팀밖에 없습니다. 제이크 러셀, 레이첼 포스트, 마커스 워싱턴, 호세 페레즈. 이 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등을 맡겨 온 전우이면서, 또한 강태가 라레플에서 봐 왔던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외협력국의 테스트에서 합격점 미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조금 부족한 정도지, 결코 일을 못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임무만큼은 결점 없이,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수행한 이들이었고.
그럼에도 게임에서는 핵전쟁을 막지 못했지만, 지금은 세르게이가 죽었으니 핵전쟁 예방도 가능할 것이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고.
강태가 생각하는 사이, 로버트는 방금 나온 말을 다시금 짚어 보고 있었다.
‘…관계가 끈끈한 수준이 아니라, 신뢰가 절대적인 수준으로 보이는군. 그만큼 신뢰한다면야, 굳이 해체해서 반발심을 살 필요는 없지. 일단은 유지하는 쪽으로 가야겠고…….’
그의 머리가 다시금 빠르게 회전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어느 정도는 로버트의 재량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호세나 마커스에게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게 아니라, 합격 기준에서 조금 부족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 둘을 잘 이용한다면은 강태를 원하는 방향으로 컨트롤 할 가능성도 있을 터.
판단을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서 진행하겠습니다만, 우선 테스트를 진행하고 합격점 미달일 경우에는 심리 치료나 외상 후 장애 수술 같은 보완을 병행하면서 작전 활동을 하게 될 겁니다.”
“오, 그건 좋네요.”
“그리고…….”
로버트가 다음 화두로 넘어갔다.
“작전지역마다 주 병기를 운반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시간적인 문제가 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외교관이나 군사 훈련 목적으로 수송기나 차량을 이용해 들여와야 할 터.
스케줄을 만들고 진행하는 것도 번거로울 게 뻔했다.
비용도 적잖이 써야 할 게 분명했고.
이를 로버트가 바쁘게 계산하는 사이, 강태가 미소를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전까지는 조달받은 병기 쓰죠, 뭐.”
이전에 현지에서 받았던 MP7이나 M4도 당연히 쓸 만한 무기들이긴 했지만, 손에 익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자잘하긴 해도 각종 장비들을 부착하고, 영점을 잡으며, 사격 감각을 찾는 것도 번거로웠고.
당연하게도 반나절 정도는 그런 사소한 준비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실수하거나 아쉬운 부분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 성공한 6~700M 저격도 마찬가지였다.
2~3주 정도 되는 적응 기간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루 이틀 만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원래의 스토리와 전혀 다르게 세르게이가 사고사로 죽은 시점.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뭐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세팅이 완료된, 익숙한 무기를 들어야 했다.
소수점 이하의 초 단위라도 줄여서 위험 요소를 하나라도 더 줄일 수 있도록.
그게 강태가 의도한 바였다.
어느새 속으로 정리를 마친 로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장비 이동도 처리하고… 그럼 조율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미리 준비했던 걸 말하겠습니다.”
“예, 하십쇼.”
강태의 다소 무덤덤한 말에 로버트가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회유를 위해 준비해 온 것들을 풀 때였다.
“먼저 설명할 건 자금입니다.”
* * *
“어… 예예, 좋네요.”
로버트에게 돈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춤하며 대답했다.
그의 말이 내 예상을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계약금 100만 달러 즉시 지급, 매달 10만 달러의 활동비 지급, 거기에 G&G Corp 재계약 및 임금 상승까지.
어마어마했다.
한 네다섯 배만 더 줘도 충분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아예 10배를 훌쩍 넘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정말 억 소리 나는 설명에 움찔한 사이, 그의 설명이 덧붙었다.
“매달 지급되는 활동비는 카드로 지급되며, 이는 국무부 기밀 예산으로 분류되는 자금입니다. 미 하원 의장도 세부 내역을 열람할 수 없도록 법제화되어 있어서, 미스터 리가 원하는 모든 곳에 쓸 수 있습니다. 주로 작전지역의 정보 구입이나 뇌물 공여, 장비 수급에 많이 쓰입니다.”
“근데… 어우, 국무부 예산을요? 제가?”
“미국인이 미국 예산을 쓰는 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어… 뭐, 그렇긴 한데…….”
또다시 놀랐다.
매달 억 이상의 세금을 마음대로 쓰게 될 줄이야.
내 표정이 기대대로인지, 로버트가 왠지 만족하는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지앤지에서의 재계약도 성과를 고려하여 진행될 수 있도록 해 놓겠습니다. 연차가 낮아서 너무 많은 금액 산정은 어렵고, 기본 수당을 월 4만 달러 이상 수령할 수 있도록 조정해 두겠습니다. 활동비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그래도 투명하게 세금 처리된 돈이라서 공개적으로 쓰기에 적절할 겁니다.”
“아… 예, 좋네요.”
즉, 활동비에 월급을 더하면 매달 월 14만 달러, 한화 1억 7천만 원이 넘는 거금을 준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계약금 100만 달러는 서명하는 즉시 나온다고 했고.
‘역시 천조국 클라쓰…….’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계약서에 적어 둔 훈련장이나 최신 전술 교육, 장비 지원 등에 대한 설명.
이건 예상한 수준의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제한은 있되,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규모.
당연히 전부 만족스러웠다.
무제한으로 이거저거 다 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거기다가 받은 것도 많으니, 이제 앞으로 수천 달러짜리 방탄판을 갈면서 돈 걱정을 할 일은 없었다.
곧 로버트가 미소를 띠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럼 이곳에 서명하면 됩니다.”
“예, 합시다.”
흔쾌히 서명을 마치자, 로버트가 작은 손가방을 하나 내밀었다.
“앞으로 사용하게 될 핸드폰과 카드가 들어 있습니다. 핸드폰은 보안 처리가 된 제품이고, 카드에는 방금 말했던 계약금과 첫 활동비가 들어있습니다. 암호는 담당 직원이 연락하여 발급할 거고, 매주 혹은 비정기적으로 변경 후 통보할 겁니다.”
“이야, 준비를 다 하셨었구나?”
“지금이 아니면 접근이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예? 어렵다고요?”
천하의 미국, 그것도 국무부 소속의 비밀 조직이 접근이 어렵다니?
지금처럼 오면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할 때였다.
“곧 알게 될 겁니다.”
로버트의 말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 듯 차량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럼… 미스터 리, 수술 잘 마치고 미국에서 다시 만나길 기다리겠습니다.”
밴 안에서 그와 다시 악수를 나누는 사이, 차 뒷문이 열리면서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어서 그를 따라 내리는 순간.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이제야 통신이 터지기 시작한 것처럼 핸드폰 알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를 돌아보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타고 온 차량이 환자 이송용이 아니라, VIP 경호에 쓰일 만한 차량이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문짝도 두꺼웠다.
감청 방지에다가 웬만한 방탄도 가능할 터.
‘…돈 생긴 김에 저런 거나 사야겠는데?’
이어서 고가의 차량과 장비 따위에 플렉스 할 생각을 하는 사이, 이제는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발신자는 저장하지 않은 번호.
혹시 담당 직원인가 싶어서 통화를 수락했을 때였다.
-아, 이강태 씨?
한국말이 들려왔고,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전에 인천공항에서 인사드렸던 조범용이라고 하는데, 기억하십니까?
법무부 명찰을 맸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출국하는 과정에서 나를 따로 잡아 뒀다가, 금세 태도를 바꿨던 사람.
“아아, 알죠.”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통화 가능하시겠습니까?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당시에 국정원이라는 신분을 숨긴 것 같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묘하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말투는 아주 정중해서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특전사 시절에는 아주 고깝기만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무슨 상전 대하듯 하고 있었다.
“예, 그러세요.”
가볍게 대답했다.
마침 로버트와 얘기가 끝난 직후에 온 전화여서 무슨 내용을 말할지도 궁금했고.
곧 핸드폰 너머에서 말이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근래 카마르니아에 입출국하셨는데… 그곳이 독립 이후부터 흑색 경보 발령으로 체류가 금지된 국가라서 관련 처리를 좀…….
“아, 여권 금지 이런 거요?”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과장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 아닙니다! 군경 합동으로 테러리스트를 제압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저희 법에 예외적 여권 사용이라고 체류를 허용하는 제도가 있는데, 그 부분을 사후 처리해 드리고, 관련 설명도 좀 드리고… 또, 최근에 미국 영주권까지 발급받으셨잖습니까? 그것과 관련해서도 말씀을 듣고…….
왠지 모르게 나를 회유하려는 것 같은 말이 점점 길어질 때였다.
스윽, 옆에서 그림자가 졌다.
“……?”
병원 직원이 휠체어를 끌고 있었는데, 어느새 곁에 건장한 사내 한 명이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충 봐도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 같진 않았다.
걷는 폼이며 눈빛이 보통이 아닌 걸로 봐서는 특작 요원이거나 관련된 곳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상의 또한 통이 큼직하니 권총도 한 정은 숨긴 듯했고.
틈틈이 보여 주는 주변을 훑는 깔끔한 시선 처리는 상당히 프로페셔널한 전문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짧게 멈춘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다른 소속이거나 나라가 다른 모양.
그러자 로버트의 말이 떠올랐다.
‘곧 알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주 명확했다.
내가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국제적인 주요 인사라도 된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던 때였다.
어느새 병실 앞에 도착했는데, 입구에서부터 정장을 차려 입은 사람이 내게 악수를 건네왔다.
독일식 억양이 섞인 영어와 함께.
“드디어 만나는군요, 미스터 리.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잠깐 들어가서 얘기 나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