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
잠기운을 닦아 내듯 마른세수를 하던 로버트의 시선이 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강태.
이동식 침대에 실린 마커스가 먼저 나오고, 강태가 승무원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서 나오고 있었다.
경유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제이크와 레이첼, 호세는 없는 상황.
로버트의 시야에 강태가 들어왔다.
많은 영상 기록과 활자로 파악했었던 첫 실물을 바라보던 순간.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로버트의 동공이 화악 넓어졌다.
강태의 시선이 아주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던 탓이었다.
마치 서로 알던 사이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옆이나 뒤에 있는 지인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날 알아본 거겠지.’
물론 강태가 자신의 정확한 신분 따위를 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마 직업군이나 계통 정도를 짐작했을 터.
‘그렇게 티가 나나……?’
로버트가 스스로의 옷차림을 다시 살펴봤다.
위장한 현장 요원들이 정체를 서로 짐작하는 아이러니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객이나 사업가 흉내를 내도 마찬가지.
조금이라도 티가 나면 지금처럼 종종 눈치를 채는 것이었다.
왜 그러는지도 이해됐다.
평범하게 꾸민다고 해도 살벌한 눈빛이나 유사시 대처를 위한 습관적인 손발 위치까지 감추지는 못한 탓이었다.
더구나 요원들도 남을 세세히 뜯어 보는 게 습관이 된 부류였고.
지금도 이 공항에 그런 사람이 두엇 정도 있었다. 그들의 목표가 강태인지는 몰라도, 로버트의 모습이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책상에 앉아서 행정 업무를 맡고 있지만, 젊었을 때만 해도 현장 요원으로서 흑색 임무를 여러 번 수행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강태는 이미 제이크로부터 특유의 감각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게 영적인 건지, 초인적인 능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썰미 하나만큼은 끝내준다는 뜻.
수상하거나 인상적인 부분을 바로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역시… 대단하군. 여기까지 오길 정말 잘했어.’
로버트는 한번 본 것만으로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어제 워싱턴 D.C에서 밤샘 근무하고, 8시간짜리 직항 비행기를 타고 졸아가면서 힘들게 온 보람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바쁜 와중에 실물이나 보자고 온 건 아니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강태의 미국 시민권 발급과 대외협력국과의 계약.
다만,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이 반드시 동시에 이뤄져야 했다.
시민권을 먼저 얻은 뒤 차근차근 대외협력국과의 계약을 진행하려던 원래 계획과 달라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더 급해진 탓이었다.
이전부터 진행하던 강태의 영주권 발급이나 미국 귀화 일정도 앞당기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강태의 실력이 점점 더 노출되면서 주요 정보기관에서 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미국 내 CIA나 국토안보부, FBI까지 이미 강태의 입국과 동시에 포섭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미국 밖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강태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로버트가 소식을 알고 있는 나라만 해도 여러 개.
그중에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강태를 치료하게 될 독일이었다.
‘아마 BND(Bundesnachrichtendienst: 독일 연방정보국)에서 움직일 텐데… 그들보다 앞서려면 이 순간밖에 없지.’
다소 불리한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강태와 마커스의 수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강태 역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자고 했었고.
그나마 다행인 건 강태의 가치를 정확하게 아는 게 대외협력국밖에 없다는 사실인데, 그것도 그를 데려와야 의미가 있었다.
중간에 다른 나라에 뺏겨서는 안 됐다.
반드시 데려와야만 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로버트가 고생하면서 날아온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강태에게 다가갔다.
“강태 리,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는 지앤지의 연락을 받고 온 국무부 대외협력국의 국장 로버트 엔더슨이라고 합니다.”
“아, 예. 저도 반갑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이강태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며 악수를 나누는 사이.
로버트가 늦기 전에 말을 이었다.
“다행히 부상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몸 상태가 괜찮은 건 맞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할 얘기가 있고, 또 전달할 것도 있는데… 병원으로 가는 길에 얘기를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예, 그럼요. 편한 대로 하세요. 차도 준비하신 거죠?”
“맞습니다. 지앤지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말하던 로버트가 다시금 강태를 훑었다.
‘전장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더니… 제이크의 평가가 정확했군. 영상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를 보게 됐으니…….’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강태는 자신이나 국무부에 대해서 의문을 갖거나 놀라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었다.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보일 뿐.
로버트로서는 강태가 예상보다 더 대담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로버트가 승무원으로부터 휠체어 손잡이를 건네받아 움직였다.
목적지는 공항 앞에 주차된 환자 이송용 밴.
강태를 휠체어 통째로 탑승시키고, 보호자용 좌석에 앉은 로버트가 운전석과 연결된 창에 짧게 노크해서 신호를 줬다.
이에 차량이 천천히 출발할 무렵.
휠체어를 끌고 오면서 입을 닫고 있던 로버트가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미스터 리, 우선 최근 작전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대단히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로버트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시간을 두다가 목소리를 이었다.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사안은 기밀로 취급되며,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유출될 경우에는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겁니다. 이해했습니까?”
어떻게 보면 다소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무턱대고 쏘아붙인 건 아니었다.
그동안 강태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제이크의 조언을 받아서 선택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직설적이고 빠른 화법.
사람에 따라 스타일이 다른데, 특히 강태는 에둘러 말하거나 점진적으로 얘기를 이어 나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예상처럼 강태가 편안하고도 만족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럼요, 계속 말씀하십쇼.”
다만,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 되기에 로버트가 말에 무게를 실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강태도 조용히 바라보길 잠시.
긴장을 조성하듯 로버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우리 미 정부는 세계 평화와 미합중국의 안보를 위해, 미스터 리가 미 국무부 산하 기구와 계약하여 숭고한 임무 수행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음…….”
드디어 강태가 반응했으나, 놀라거나 당황한 모습은 아니었다.
현 상황을 단순히 감상하는 듯한 모습.
실제로도 다르지 않았다.
‘이야… 이거 느낌 있네…….’
장소가 백악관이나 국무부 같은 시설은 아니었지만, 직접 찾아온 로버트의 말이나 눈빛에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가 약한 사람들은 일단 서명하고 볼 정도.
잠깐의 틈에 로버트가 몇 장의 서류를 내밀면서 얘기를 이어 갔다.
“…이건 산하 기구와의 계약서입니다. 더 구체적인 사안은 서명 후에 들을 수 있고, 우선 대략적인 내용을 말하자면… 우리는 주로 테러 정보 취득과 테러리스트 제거 등의 흑색 임무를 전담하는 위장 부서로, 소속된 위장 요원들은 주로 외교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특수부대나 특작 요원의 신분 발각이나 임무 실패가 우려되는 경우에 투입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소속 요원들의 신분은 1급 기밀로 취급되어 작성한 계약서는 향후 30년간 그리고 기밀 연장되어 평생 공개되지 않을 겁니다. 즉, 모든 일을 민간인 신분으로 진행한다는 말이고…….”
길어지는 얘기 속에서 강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긍하거나 그의 말에 공감한 게 아니라, 그냥 말이 물 흐르듯 잘 나와서 반응한 게 전부였다.
애초에 설명 같은 건 크게 관심도 없었다.
관련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뿐더러, 핵전쟁을 막으려면 어쨌든 대외협력국과 계약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넙죽 사인하진 않을 것이었다.
강태가 그동안 라레플을 하면서 느꼈던 그리고 라레플 속에 들어와 실작전을 수행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을 깔끔하게 정리해야만 했다.
쉽게 말해서, 필요한 걸 받아 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 여기에 오면서까지 착실하게 준비해 뒀었다.
이어서 나오는 로버트의 말이 시작이었다.
“…이 일에 대한 지원과 보상은 확실하게 이뤄질 겁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강태가 태연하게 말했고, 로버트가 반응하기 전에 얘기를 이었다.
“일이야 뭐… 충분히 할 순 있어요. 근데 말씀하신 지원하고 보상 얘기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미국인도 아니잖습니까?”
“아닙니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미국 시민권 발급 절차가 진행될 겁니다.”
“저요? 시민권이 나와요?”
“미국은 외국인에게 자국의 안보를 맡기지 않습니다.”
로버트의 단단한 대답에 강태가 주춤하면서 다시 물었다.
“아, 그럼 언제 나오는 겁니까? 설마 금방 나오는 겁니까? 시민권 취득 조건 같은 건 필요 없이?”
게임 속에서는 이런 디테일까지 본 적이 없기에 묻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영주권이 나왔다는 소식에 이것저것 검색하면서 알아봤는데, 시민권은 과정이 쉽지 않았었다.
아니, 몇 개월 이상 체류하지 않으면 영주권마저 박탈될 터.
한데, 돌아오는 답은 아주 간단했다.
“네, 일주일 안에 모두 처리될 겁니다. 사회 보장 번호를 발급받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미 정부를 돕는 많은 정보원과 조력자들에게 시민권을 발급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그럼 한국 국적은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국 여권법에서는 다중 국적자가 타 국적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서약하는데, 그러면 유사시에 한국에서는 미국이 제대로 지원하거나 개입할 수 없어서 안 됩니다. 저희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미국인으로 대우받길 바랍니다. 그래야 미국이 제대로 지원하고 개입할 수 있습니다.”
“오…….”
이 역시 게임에서는 안 나온 디테일 한 사안이어서 강태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로버트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서명하게 되어도 지금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게 될 동료도 제대로 알게 될 겁니다.”
제이크와 레이첼을 암시한 말이었는데, 강태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봐 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계약서에 같이 사인하면 어떻습니까? 정체 숨기고 일하는 것도 좀 그렇고, 서로 알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설마 현재 찰리 팀을 말하는 겁니까?”
로버트가 짐작하며 물었고, 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왕이면 손발 맞는 사람들이 좋잖아요. 그리고 능력도 좋고, 믿을 만하고요.”
“그 부분은…….”
로버트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제이크와 레이첼이 소속됐으니 둘은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세와 마커스까지 소속시키는 건 다른 문제기 때문이었다.
둘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약간의 후유증을 겪고 있고, 가정이 있어서 심리적인 문제가 생길 소지도 있었다.
물론 그 정도가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부 임시 테스트에서 걸린 상황.
그러나 강태를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인 만큼, 딱 잘라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버트가 고민하는 사이, 강태가 입을 열었다.
“잘 좀 봐주세요, 다들 충분히 괜찮은 사람들인데.”
플레이 했던 게임 속에서도 이미 일어났던 그리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본토에서의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제이크의 주도로 모두가 대외협력국과의 계약서를 새로 썼었다.
사망하더라도 기밀이 유지되는 기록으로라도 남길 바란다는 이유였고, 그럴 자격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마커스든, 호세든, 전부 내부 기준에서 조금 아쉬울 수준일 뿐.
결코 계약할 수 없는 불순분자는 아니었다.
이를 아는 강태가 말을 던져 놓은 것이었고, 로버트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로버트의 입이 열렸다.
“…혹시 요구할 사안이 더 있습니까?”
“아, 예.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예 적어 드릴게요.”
강태가 어느새 로버트에게 받았던 만년필을 서류 빈칸에 바쁘게 놀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로버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런… 그저 담대할 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 정체를 진작에 간파했던지, 제이크나 레이첼이 들켰던지… 뭐가 됐든 역시 보통은 아니군.’
모르고서는 이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최소한 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이런 능력도 작전 중에 꼭 필요했다.
수치화하거나 개념화하기 어려운 능력이지만, 이런 눈치나 감각이 생과 사의 순간을 가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로버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작성을 마친 강태가 완전히 새로워진 계약서를 내밀었다.
“자, 다 됐습니다.”
“…….”
강태가 적어 넣은 것들을 살피던 로버트의 눈이 흔들렸다.
‘훈련장 확보에 생활비와 보상금 지급, 작전에 필요한 모든 장비 지원, 평소 사용하던 병기와 장구류 백 퍼센트 국경 운반…….’
그의 생각보다 뭐가 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