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밤 11시,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늦게까지 야근을 마친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가 막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직 차고지도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 번호는 대외협력국 당직실.
차 문을 잠그던 그가 주춤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본능적으로 이 연락이 단순 착오나 오류 따위였으면 했는데, 이어지는 내용에 눈을 끔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
평소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보고 내용이 당최 믿기 어려워서 반사적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당직자의 빠르고 긴 보고가 개틀링 기관총 탄환 세례처럼 쏟아졌다.
-…카마르니아 육군 특전대 대대장 막심 바예프와 휘하 대원 한 명이 사망했고, 찰리 팀은 부팀장 마커스 워싱턴과 강태 리가 중상, 제이크 러셀 팀장이 경상을 입었으며, 세르게이 볼코프의 시체를 확보했다는…….
로버트가 턱, 차에 기대며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수많은 말 중에 치명상처럼 뇌리에 파고든 단어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리가 중상이고… 볼코프의 시체라니……?’
전혀 다른 의미긴 하지만, 강태와 세르게이는 현 미국 안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벌어진 일도 대단히 충격적인 것들이었고.
이에 로버트가 주춤하길 잠시, 마른세수를 하고서 당직자에게 상황을 묻고는 늦지 않게 지시했다.
“…대안 프로토콜 가동 여부 상세히 파악해서 보고하고, 추가 작전도 준비시켜 놔.”
-알겠습니다, 국장님.
“그리고 볼코프의 시신 파악도 신속하게 진행하고, 리의 회복에 필요한 자원도 전부 투입해. 상태도 최대한 빠르게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하고. 나는 사무실로 복귀할 테니까, 그사이에도 긴급 사안 있으면 바로 연락하게”
그 말을 끝으로 로버트가 전화를 끊었고, 방금 내렸던 차에 다시 올랐다.
이어서 차고지 출입문을 다시 열면서, 비상등을 점등하고 빠르게 집을 빠져나갔고, 그와 동시에 직속 상관인 군세 차관에게 구두로 직보했다.
세르게이의 사망과 강태의 중상 소식을.
이어서 나머지는 상세 파악 후 추가 보고하겠다고 한 뒤, 조용한 알링턴의 밤 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부아아아앙―!
중형 세단이 엔진음을 내며 내달리는 사이.
놀라서 흔들렸던 로버트의 시선은 어느새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하긴 했으나, 생각해 보면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세르게이의 죽음.
물론 그를 생포하거나 심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죽음 역시 선택 가능한 옵션이라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한 악의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안타까운 건 작전 중에 강태가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인데, 그래도 준비한 게 있는 만큼 치명상만 아니라면 크게 위험하진 않을 것이었다.
로버트가 언급한 대안 프로토콜에 관련 계획이 들어 있는 덕분이었다.
예컨대 전투 및 구조 지원 등을 위해 주변 국가인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공항에 수송기와 헬기가 대기 중이고, 의료 지원을 이유로 카마르니아 국립병원에 미 정부와 연계된 정형외과 및 응급의학과 의사들을 미리 파견한 사실 등등.
거기다 유럽 특수작전사령부에서 차출한 대원 몇이 옐브루스 산맥을 타고 들어가 가까운 거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만약 추가로 필요한 게 있다면, 그게 뭐든 다 지원할 생각이었고.
그렇게 로버트가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사무실로 들어오자, 때맞춰 대략적인 보고서 초안이 올라왔다.
부하 직원으로부터 서류를 받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국장실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든 로버트가 가만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시신은 세르게이 볼코프와 외관상 99% 일치함. 현재 조직 일부를 채취하여 래피드(Rapid) DNA 분석기로 확인 중, 약 90분 뒤에 검체와의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파악됨.]
[…이강태는 총상 처치 및 수혈 중이고, 관절이나 신경에 손상이 없을 것으로 예상됨.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으나, 곧 깨어날 것으로 보임.]
로버트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을 먼저 읽으며 안도의 숨을 흘렸고, 이어서 궁금한 부분을 확인했다.
바로 세르게이의 죽음.
‘리가 쏘긴 했는데… 사망 원인이 교통사고라고?’
탄환에 의해 타이어가 터졌고, 핸들 조작을 못 하고 단독으로 들이박았다는 내용만 있었다.
아마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인한 충격이 심했을 거라는 추측과 함께 의학 전문 용어도 같이 적혀 있었다.
두부 손상, 흉부 손상, 간 열상, 다발성 외상 등등.
사망 원인이야 그렇지만, 순수하게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는 로버트의 판단뿐만이 아니었다.
제이크의 보고도 같았다.
[…이강태의 사격 능력을 고려할 때, 뒤 차창으로 머리를 저격하지 않고 일부러 타이어를 조준 사격하여 터뜨린 것으로 보임.]
근중거리만 아니라, 장거리 사격마저 탁월한 실력자가 고작 몇십 미터의 타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타이어를 전부 터뜨렸다는 대목만 봐도 분명했다.
즉, 결론은 하나였다.
‘그럼 세르게이 역시 리가 죽인 셈이군.’
구체적인 전투 내용과 드론 및 바디캠 영상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 역시 강태의 활약이 어마어마할 건 분명했다.
보고하기에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이었다.
강태의 귀화에 필요한 것이든, 앞으로의 작전에 필요한 지원이든, 뭐가 되었든 원하는 것을 받아 내기에 수월할 터.
물론 중상을 입을 만큼 상황이 힘들긴 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넘어가도 됐다.
따지자면 과정이 덜 중요한 셈.
모든 절차를 다 지켜서 완벽한 과정을 선보여도, 결국 결과를 못 내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전 임무에서 드러난 강태의 돌발 행동을 굳이 꼬집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쨌든 결과가 최우선이었으니까.
로버트로서는 올라오는 보고에 맞게끔 수습만 잘하면 됐다.
그렇게 보고서 정독을 마칠 무렵.
로버트의 입에 미소가 걸렸고, 연한 웃음소리도 났다.
“하하하…….”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가자, 그제야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대외협력국 창설 이래 최대의 적인 세르게이가 죽었고, 강태가 최대 업적을 세웠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상황.
‘세르게이나 배후의 흔적이라도 찾길 바랐는데… 그놈이 죽을 줄이야…….’
물론 그가 죽었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세르게이의 뒤를 이을 만큼 위험한 놈들이 줄줄이 있었고, 그들을 모두 제거해야만 했다.
물론 그 일을 위해서는 여전히 강태가 필요했고.
‘리의 치료와 휴식만이 아니라, 영입도 좀 더 앞당겨야 되겠어.’
다만, 그 전에 프로토콜 상황을 점검하고 관련된 언론 보도도 준비해야 할 터.
로버트가 언제 웃었냐는 듯 입가의 미소를 지워 냈다.
그의 일은 이제부터였다.
‘…잠은 글렀군.’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나는 휠체어에 타고, 마커스는 이동식 병상에 누운 채, 남은 찰리 팀과 함께 병원을 나와서 밴을 탔다.
그사이에 카마르니아 육군 특전대가 경례까지 붙여 주면서 배웅해 줬는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조금 짠했다.
짧은 기간임에도 교육하고, 함께 훈련한 덕분일 터.
물론 그들이 내가 원했던 만큼 빡세게 훈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카마르니아 육군 중에서는 가장 열심히 했던 군인들이고, 나름대로 잘 따라와 준 교육생들이었다.
그래서 서로 간의 유대도 조금이나마 쌓았고, 작전에서도 내가 좀 더 피해를 감수했었다.
저 사람들이 안 죽었으면 싶어서.
경례 대신에 말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간 고생들 했습니다. 다음에는 건강하게 만납시다.”
그 말을 끝으로 밴에 올랐고, 곧 카마르니아군 콘보이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독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중요한 수술.
물론 여기서도 응급 수술이나 수혈을 진행해서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걸로는 아직 모자랐다.
제대로 된 수술을 받으려면 더 나은 장비와 의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선진국이라고 부를 만한 곳.
여러 나라가 있으나, 그중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독일이었다.
그래서 링거를 달고서 밴에 탔었고, 환자 대우를 받아 가면서 여객기에 가장 먼저 탑승하게 됐다.
비행 시간은 약 4시간.
그간 탔던 비행기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환자도 충분히 이동할 만한 거리였다.
한데 조금씩 긴장이 됐다.
수술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꿰매고 봉합하는 작은 치료는 라레플 속에 들어온 이후로 여러 번 해 봤고, 큰 수술은 10년 전 게임 밖에서 교통사고가 나면서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수술했던 의사가 내 골반뼈와 무릎뼈를 조각조각 퍼즐 맞추듯 조립하느라 온종일 고생했다고 했었다.
고정 핀이 수십 개가 들어갔다는 말도 해 줬었고.
이후로 거의 반병신이 돼서 절뚝거리며 살긴 했지만, 그래도 수술 자체는 경험해 봐서 두렵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독일.
라레플에서도, 현실에서도 가 본 적이 없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에 구현되지 않았던 루크의 묘지나 한국에 가 보기도 했지만, 그건 휴가 때 내 선택으로 가는 거였다.
지금처럼 임무 직후에 타의에 실려 가는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세르게이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서 내심 당황스러웠다.
물론 피칼의 행동 대장 격인, 중간 보스인 그가 죽었으니 한결 낫겠지만.
그의 배후에 있는 흑막, 피칼은 아직 건재했다.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이고 핵미사일 개발 실험이나 세르게이 외의 다른 부하들은 모두 멀쩡했으니까.
‘독일에서 암살이나 테러 당해서 뒈지진 않겠지? 그럼 개죽음인데……. 국무부가 뒤를 좀 봐줄 것 같아서 괜찮을 것 같기도 같긴 하지만, 피칼이 세르게이가 죽은 걸 보고도 가만 있을는지 확신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피칼이 감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건데, 그것보다 나쁜 건 그가 히틀러 뺨치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 나간 놈이라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언변도 제법 좋고, 중세 유럽 귀족 혈통이라 돈도 많고, 그에 따른 인맥도 여기저기 많이 가지고 있었고.
쉽게 말해서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여태 세르게이의 흔적을 지우고 대외협력국을 따돌린 것만 봐도 사이즈가 나왔다.
물론 내가 본 거라고는 아주 짧은 시네마틱 영상이 전부였지만, 살다 보니 그게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튼 최대한 빨리 피칼의 흔적을 추적해서 찾아내어 잡아야만 했다.
문제는 그걸 아직 대외협력국이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운이 좋으면 알 수도 있지만, 알기 힘들 것이었다.
다른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도 전에 세르게이가 갑자기 죽어 버렸으니까.
이에 비행기에 오르고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고민하다가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국장하고 만나서 슬쩍 찔러 줘야겠네.’
세르게이가 죽기 전에 한 말이라고 거짓말을 좀 섞어 볼 생각이었다.
다른 방법을 좀 떠올려 봤지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세르게이의 시체를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거니와, 거짓말 하나 덧붙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름이나 사람이라는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죽어 가는 세르게이의 입에서 무의식 중에 흘러나온 것처럼 꾸미면 그럴싸할 거고, 그걸 들은 로버트도 바로 돌아가서 악착같이 찾아볼 테니까.
무리수 같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스토리가 확 틀어진 만큼, 마냥 기다리기 어려운 탓이었다.
좀 더 빨리, 속도를 내도록 도와야 했다.
그리고 피칼을 찾아내야 했고, 그를 죽이든 체포하든, 뭘 해야만 했다.
핵전쟁이라는 엔딩은 몰라도, 이제 거기까지 가는 나머지 스토리가 심하게 꼬여 버렸을 테니까.
그렇게 온갖 생각을 하면서 독일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주춤했다.
승무원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공항에서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아주 잘 아는 얼굴.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였다.
‘이 양반하고 벌써 만나……?’
미국에서 만나려면 앞으로 한 달 뒤에나 볼 줄 알았는데, 아예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 그것도 내 앞에 와 있었다.
세르게이가 갑작스레 뒈져 버린 효과가 벌써 나타나는 것 같았다.
내 앞날도 이제부터 싹 바뀔 터.
한데 참 웃기게도 그를 보는 순간, 긴장이 사라졌다.
눈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스카우트하러 오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