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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52화 (52/185)

52화

세르게이가 죽었다.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린 건 아니었으나, 그의 숨이 끊어졌다는 건 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적을 많이 사살해 봐서 아는 게 아니었다.

양팔이 축 늘어진 채 엎어진 모습이 시체 같았고, 미동조차 없는 걸로 봐서는 숨도 안 쉬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세르게이가 사람이 아닌 시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씨이팔.”

욕이 절로 나왔다.

세르게이는 죽어 마땅한 놈이지만,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물어볼 게 너무 많아서 그랬다.

그의 배후에 있는 진짜 흑막, 피칼에 대해서.

그리고 핵미사일을 개발 중이거나 실험 중인 장소, 그 외에 아는 테러리스트들 등등에 대해서는 내가 아니더라도 고문 기술자들이 알아볼 게 수두룩했다.

그래서 명중시킬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었다.

일부러 살려 두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는 그가 쪽문에서 확 튀어나올 때였다.

웬 덩치가 나오길래 반사적으로 쇄골 윗부분을 조준했다가 익숙한 얼굴과 형체에 주춤하면서 차마 쏘지 못했었다.

거긴 방탄판이 가리지 못해서 맞으면 치명상을 입거나 사망할 가능성이 큰 탓이었다.

쉽게 말해, 죽을까 봐.

그래서 대신 RPG-7 사수와 기관총 사수를 차례로 사살하고 난 다음, 멀어지는 픽업트럭 뒤창의 머리통을 조준하다가 포기했었다.

머리는 무조건 즉사할 테니까.

대신 눈에 보이는 테크니컬의 바퀴 세 개를 적중시켰었다.

차를 세우려고.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악셀을 얼마나 쳐 밟아 댄 건지, 벽에 거하게 꼬라박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뒈진다고……?’

상상도 못 했었다.

무슨 공익광고도 아니고,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인한 교통사고라니?

세르게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라레플에서의 스토리만 떠올려 봐도, 세르게이는 미국 본토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최후까지 교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캐릭터였다.

그 과정에서 아군 한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고.

당연하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전투 능력이든, 현장 지휘든.

뭐, 결국에 이 꼴로 죽긴 했지만, 그건 내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벌인 실수일 것이다.

아마 제대로 준비했다면 내 숨통이 끊어졌을 수도 있었다.

이에 짧았던 잡생각 뒤로 혹시 몰라서 목덜미에 손가락을 댔는데, 금방 떼고 말았다.

역시나 맥박은 뛰지 않았다.

한숨이 또 나오는 사이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육군 특전대 몇몇이 눈치 보면서 다가왔었는데, 그 사이를 뚫고 후미에 있던 제이크가 등장한 것이었다.

“리!”

“아, 팀장님.”

“거기 무슨 일 있나?”

제이크가 다가오면서 물어봤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의 눈이 열린 운전석으로 향했다.

반응은 뚜렷했다.

몸이 멈추더니 눈동자도 흔들린 것이다.

세르게이를 알아봤을 터.

“…….”

그가 아무 말도 못하고 세르게이의 맥박을 재확인했는데,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이해됐다.

대외협력국 제거 대상 1순위가 갑자기 시체가 됐으니까.

아마 나보다 속이 더 복잡할 것 같았다.

이에 잠자코 바라보던 무렵.

“어?”

내 몸이 휘청했다.

뒤에 있던 육군 특전대 대원이 받쳐 줬는데, 때마침 다리도 풀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내리자마자 왜 이러는지 이해됐다.

카고 바지 허벅지 부분이 탄환이 스쳐 간 듯 터져 있는 상태였고, 그 아래로 불그죽죽하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출혈이 꽤 진행된 것으로 보였다.

“리?”

어느새 제이크가 날 돌아봤는데, 숨을 들이마시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가슴도 뻐근했다.

허벅지에서 상체로 시선을 올리니 플레이트 캐리어 가슴 부분이 터져 있었다.

그제야 교전 중에 탄환 두 발 정도가 박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에 레스토랑에서 맞았던 도비탄 같은 게 아니라, 정확히 내 몸통을 노리고 쏘아진 탄이었다.

방금까지는 바빠서 넘어갔는데, 사태가 끝나니 충격이 밀려오는 듯했다.

아마 갈비뼈 몇 개가 금이 가거나 부러졌을 터.

동시에 뒤에 있던 병사에게 완전히 기대면서 체중을 다 내주고 말았다.

“팀장님……?”

제이크를 부르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몽롱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목소리에도 힘이 빠지는 걸 보니, 피가 상당히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눈을 껌뻑거리는데, 우습게도 철야 훈련 하던 때가 떠올랐다.

피로감을 못 이기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나도 모르게 졸았던 순간.

지금이 그때와 비슷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그렇게 시야가 점점 저물어가듯 흐려지는 사이.

제이크는 내 허벅지에 지혈대를 걸고 있었고, 차를 가져오라는 듯 소리치고 있었다.

물론 내 귀에는 고함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귓속이 물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제이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당장 차 가져와… 어서…….”

그 소리를 끝으로 어느덧 심해에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귀가 멍하기를 잠시, 눈도 감겼다.

동시에 방금 있었던 교전이 꿈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어렵게 만들었다.

적 10명 중에서 1명만 육군 특전대 대원이 사살했을 뿐, 9명을 내가 처리했으니까.

그들에게 차마 맡기지 못했다.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숙달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여서 다치거나 죽는 상황을 염려했던 것이었다.

마커스가 실려 가고, 대대장인 막심과 대원 한 명이 작전 시작과 동시에 전사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좀 무리했었다.

만약 육군 특전대 대원들에게 어느 한 구역을 맡겼다면 내가 덜 다쳤겠지만, 대원 몇 명은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적들은 미숙한 병력을 놓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내 방탄판에 박힌 2발의 탄환과 허벅지를 스쳐 갔거나 관통했을 탄환이 그 증거였고.

결과적으로 나는 피가 모자라서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대원들을 전부 살렸으니 목표한 것 중 하나는 해낸 셈이었다.

물론 몇몇이 파편이나 도비탄에 다쳤으나, 그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감안해도 될 문제.

내가 쓰러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짐작하건대,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에 구멍이 나서 죽어 가는 게 아니니까, 아마 수혈 좀 하면 금방 해결될 터.

나보다 중요한 건 마커스였다.

‘제발 멀쩡하게 살아라…….’

지금의 나로서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세가 갔으니 그를 믿어야 했고.

그 생각을 끝으로, 끝까지 붙들고 있던 정신을 놓쳤다.

속리산에서의 무수면 대대 전술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와 잠드는 것처럼.

* * *

강태의 허벅지부터 지혈한 제이크가 차량 이동을 빠르게 지시하고서 조치에 들어갔다.

우선 멜빵을 풀어 총기를 제거했고, 이어서 플레이트 캐리어의 급속 해체 손잡이를 당겨서 장비를 풀었으며, 끝으로 옷을 잘라 내어 추가 상처 부위가 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순식간이었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베테랑 응급실 의사보다 빠르게 해낸 제이크가 다시금 강태를 훑고서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하아…….”

불행 중 다행으로 치명상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강태의 가슴팍에 주먹만 한 검보라색 피멍이 두 개나 생겨 있었고, 어깨와 팔 부위에 총탄과 파편 따위가 스쳐서 상처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런 건 참고 넘어가도 될 정도였다.

걸리는 건 출혈과 기절인데, 그것도 아주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피가 미친 듯 터져 나온 게 아니라, 제법 천천히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안전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전 시간을 생각해 보면 체내 혈액이 그렇게 많이 빠져나가진 않았을 것이었다.

판단을 마친 제이크가 차량을 기다리길 잠시.

쿠그그그그!

부아아아아아앙―!

지면에서 들리는 거친 소리와 함께 엔진을 울려 대는 테크니컬 한 대가 등장했다.

카마르니아 육군 특전대의 차량.

레이첼이 운전하는 것이었다.

“……?!”

뛰어간 병사들이 운전해 오는 줄 알았던 제이크가 멈칫했다.

더 멀리 있던, 무전으로 소식을 전했던 레이첼이 질주해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레이스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크가가가각―!

흙바닥이 갈리는 소리가 울리며 차가 멈춰 서자, 레이첼이 급하게 소리쳤다.

“제이크! 리를 실어요! 어서!”

레이첼이 평소 내뱉던 팀장이라는 단어 대신, 고함치듯 제이크의 이름을 부른 뒤.

제이크가 거의 반사적으로 강태를 들어다 뒷좌석에 실었다.

그리고 세르게이의 시신까지 챙기던 순간.

레이첼이 바쁘다는 듯 클락션을 울렸고, 제이크는 시신을 집어던지면서 트럭 뒤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레이첼이 급악셀을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육군 특전대 대원들이 움직이려던 때였다.

“레이첼?!”

멈칫한 제이크가 그녀를 부르자, 무전으로 답이 돌아왔다.

이미 뒷말이 뭔지 다 안다는 듯.

-대원들은 알아서 올 거예요, 출발 직전에 미리 얘기했어요. 그런데… 그보다는 지금 리가 중요하잖아요. 아, 지금 정확한 상태는 어때요? 확인했죠? 많이 심각한가요?

침착하면서도 걱정이 실린 바쁜 물음들이었다.

제이크가 덜컹거리는 짐칸에서 한 손으로 강태를 붙잡은 채 대답했다.

“육안상으로는 허벅지 총상을 제외하고 큰 외상은 없어.”

-음, 그럼 정확한 건 상세 진단을 해 봐야 하지만, 우선은 출혈로 인한 실신이라고 봐야 하겠네요. 예상 출혈량은 얼마나 되나요?

“많진 않을 거야, 출혈 속도가 좀 느린 편이었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후… 미리 병원에 연락해 두세요, 수혈 준비하라고.

“근데 그전에 운전을 좀 안전하게 하는 게 낫겠어. 짐칸이 많이 흔들리거든.”

과속에 난폭 운전을 하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결빙된 도로를 피해 얼지 않은 비포장 길을 더 험하게 달리고 있었고.

곧 레이첼이 살짝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딱히 티가 나지는 않는, 여전히 빠른 속도.

레이첼이 변명처럼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이보다 천천히 갈 순 없어요. 너무 늦으면 리가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출혈로 인한 기절 이후에는 뇌 기능 장애, 아니면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더 나쁜 경우에는 사망에 이르기도 하고.

물론 지혈만 제때 이뤄진다면 상황이 악화되진 않을 것이었다.

레이첼 역시 이를 잘 알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커스가 저격을 당해 급하게 후송된 상황에서 강태까지 기절해서 쓰러졌으니까.

순식간에 팀 전력 40%가 증발한 셈이었다.

물론 머릿수로 구분할 때만 그랬고, 실제 전투력으로 따지면 강태가 팀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사실상 팀이 와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특히나 강태는 미국의 품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인재인 만큼 죽거나 불구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레이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제발 멀쩡하기를…….’

이게 미국의 이익을 고려한 건지, 동료애나 다른 감정 때문인지 모를 일.

그녀도 당장 어쩔 도리가 없으니, 힘껏 악셀만 밟았다.

부아아아아앙―!

목적지는 가까운 국립 병원.

이미 작전 수립 과정에서 부상자 후송까지 얘기됐던 곳이었다.

테크니컬을 빠르게 응급실 입구에 세웠던 레이첼은 제이크가 강태를 짊어지고 뛰어내리는 걸 보면서 한숨 돌렸다.

“후으…….”

그렇게 차를 제대로 주차하려던 찰나.

그녀의 눈에 카마르니아군 차량 여러 대와 마커스를 후송한 테크니컬 차량이 보였다.

“…….”

마커스는 아마 응급 수술 중일 터.

나란히 차를 세운 레이첼은 뒤늦게서야 할 일을 떠올렸다.

현 상황 보고.

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던 그녀가 번호를 채 누르지도 못했다.

손끝이 너무 떨린 탓이었다.

돌아보니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걱정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배운 대로 심호흡을 깊고 느리게 반복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붙잡으려던 순간.

치직, 짧은 잡음과 함께 무전음이 들려왔다.

-찰리 다섯. 찰리 셋은 수혈 시작할 예정이고, 큰 이상 없이 깨어날 거라더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강태를 뜻하는 통신 음어에 레이첼의 눈이 깜빡거리는 사이.

희망적인 내용이 연이어 나왔다.

-찰리 넷도 수술 중인데… 병원에 도착할 때 의식을 차렸다더군. 아마 둘 다 건강하게 돌아올 거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등허리에 힘을 주고 있던 레이첼이 완전히 풀어지듯 기대어 앉았다.

남아 있던 일말의 긴장감까지 사라진 것이었다.

그사이, 제이크의 목소리가 또 이어졌다.

-…그리고 뒤에 타깃의 시신이 있어.

“정말 다행… 네? 타깃이요?”

-직접 확인해 봐.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렸다가 얼어붙고 말았다.

짐칸에 실린 시신 때문이었다.

상태는 엉망이지만, 얼굴이나 외형은 그녀가 잘 아는 사람임이 확실했다.

대외협력국의 1순위 수배자, 세르게이 볼코프.

레이첼의 입이 벌어졌다.

“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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