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며칠 뒤, 12월 26일.
크리스마스가 끝난 다음 날 오전.
해가 뜨기도 전에 연병장에 2개 소대인 32명의 육군 특수전 대원들이 모였다.
나름 카마르니아의 정예부대라고 오와 열은 맞추고 서 있었는데, 막상 보고 있자니 조금 짠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작전을 한다거나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를 버텨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육군 특전대의 모습 자체가 안쓰러운 것이었다.
러시아 위장 패턴의 전투복에 독일의 H&K가 아닌 파키스탄제 MP5, 거기다 자국에서 만든 민무늬 헬멧까지.
게임 속에서 봤던 거라서 낯선 건 아니었으나, 안쪽도 영 안 좋았다.
적을 사살하기 위한 탄은 동유럽에서 가공한 저급 제품이었고, 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방탄판은 맞으면 장기가 터져 나갈 것 같은 중국산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게임에도 없는 디테일이라 기가 막혔는데, 호세도 같은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담배를 문 그가 고개를 저었다.
“오우, 저 친구들이 걸친 게 전부 몇 개국이나 되는 거야? 우리 국적까지 따지면 올림픽까지 가능하겠어.”
나도 피식 웃음이 났는데, 마커스가 호세의 어깨를 툭 쳤다.
“담배나 꺼, 준장 오고 있으니까.”
“아, 방금 피웠는데…….”
호세가 끄트머리만 잘라 내고 주머니에 넣는 사이, 계급장에 별을 단 준장이 연단에 섰다.
나름 첫 실습이라고 나와 준 것 같긴 한데, 연설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피곤한 데다가 실작전이 코앞이기 때문이었다.
제법 우렁찬 경례를 끝으로 준장이 내려갔고, 실질적으로 우리 훈련을 도와줬던 대대장, 막심이 올라와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줬다.
주로 ‘할 수 있다’, ‘해내자’, ‘보여 주자’ 같은 말들이 전부였지만, 나름 괜찮았다.
병사들의 이어진 경례 구호가 아까보다 우렁차게 변했으니까.
경례를 받은 막심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
“전 대원! 차량 탑승!”
그 말과 함께 병력이 차로 오르는 광경을 지켜봤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괜히 머리를 긁게 됐다.
러시아 위장 패턴과 비슷하게 색칠한 도요타 픽업트럭에 올라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경기관총을 멋대로 설치한 차량.
사실상 무장단체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다시금 호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량에 대한 말은 아니었지만, 현 상황에 대한 얘기였다.
“후… 어쨌든 작전은 괜찮았으니까, 문제없겠지. 그렇죠, 팀장?”
“그래, 작전 계획은 괜찮았어.”
호세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묻고, 제이크가 짧게 답했다.
그 말마따나 내가 봐도 작전은 준수했다.
이미 작전지역의 날씨나 토질, 건물 구조, 민간인 통행량, 그 외의 주의 사항 같은 것은 진작에 파악했고, 카마르니아 육군 정찰대에서 동유럽에서 공여받았다는 구식 무인정찰기까지 운용한다고 약속해 준 덕분이었다.
거기다가 레이첼도 작전지 근처에서 개인 드론을 띄울 거였고, 그사이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이동할 예정이었다.
목표는 주요 건물 1채, 의심 건물 2채.
나와 제이크, 호세가 사전에 분배받은 팀을 이끌고 투입될 거고, 거리와 후방은 마커스가 배정받은 인원들이 경계하기로 되어 있었다.
작전 유출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구체적인 계획도 한 시간 전에야 논의한 상황.
모든 게 좋아 보이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반군들이 손수 제작하거나 개조한 중화기나 IED 같은 사제 폭발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만한 위험은 늘 감수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힘껏 훈련하고 비싼 장비를 착용하는 게 일이었고.
그러나 단 하나, 라레플의 스토리가 좀 걸렸다.
핵전쟁이야 큰 줄기니까 그대로 흘러가겠지만, 세부 스토리가 너무 많이 바뀐 탓이었다.
특히 카마르니아에 온 이래로 더 심해져서, 이제 예상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원래는 거점 3곳 정도 싹 털어 버린 다음에 세르게이 부하들 찾아내서 조지러 가는 건데…….’
생각을 끝맺음할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 테러처럼 말도 안 되게 빡센 교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세르게이가 부하들을 보내 놓고 함정을 파 놨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평소대로 흘러간 게 없었으니까.
물론 구식 무인정찰기가 떠 있고, 사전 파악을 마쳤으니 낫겠지만,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부하 넷이나 뒈졌는데, 세르게이도 가만있을 것 같진 않았고.
아마 이 사실을 제이크와 레이첼이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세르게이의 이름을 들먹일 순 없으니, 가만히 기다렸다.
어쨌든 다들 베테랑이고, 다쳤던 것도 회복됐으니 뭐라도 해낼 터.
“자, 우리도 탑시다, 팀장. 저기 테크니컬(Technical: 민간 무장 차량)… 아니, 육군 특전대 친구들이 시동 걸었습니다.”
호세가 그러면서 급하게 빨았던 담배를 튕겨 내며 운전석에 올랐다.
바로 막심의 무전이 들려왔다.
-찰리, 여기는 하우스. 간격 유지하면서 잘 이동하기 바람.
“찰리 수신 양호.”
제이크가 답했고, 운행과 동시에 선두 차량에서 정보가 담긴 무전들이 넘어왔다.
도로 상황, 움직이는 민간인이나 수상한 정황 등등.
이를 들으면서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옐브루스산에서부터 뻗쳐 온 산줄기와 구릉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봐도 장관이었다.
물론 멋져서 쳐다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저기 어디에 아마 세르게이가 있을 건데…….’
알기로 핵미사일을 개발했던 지하 군사시설이 저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폐쇄된 시설이라는데, 게임에서 지도나 좌표를 보여 주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먼저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대외협력국도 모르는 사실인데, 내가 가서 먼저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에 바라보길 잠시, 어느새 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다 왔어?”
호세에게 묻자, 답하기도 전에 무전이 돌아왔다.
-여기는 럭비공, 도로 결빙으로 저속 운행 중… 각 차량 주의 바람.
럭비공은 선두 차량의 음어였으니, 앞에서부터 느리게 간다는 뜻이었다.
이내 호세의 눈이 백미러로 튕겨서 마주쳤다.
“그렇다는데?”
“허…….”
짧게 헛웃음이 났다.
연병장에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현실의 다양성과 열악함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라레플에서는 장면 전환으로 넘어갔으니 모를 일이지만, 여기서는 30분 넘게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 작전지였다.
한데 시속 50㎞로 신속 투입이라니?
나도 모르게 창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옆에서 레이첼이 속을 안다는 듯 내 걱정을 덜어 줬다.
“늦게 도착한다고 해도 날씨가 흐려서 감안할 정도는 될 거예요. 먹구름이 심해서 점심부터는 눈도 꽤 온다고 했고요.”
“그래요, 눈 오기 전에 시마이… 아니, 마무리나 잘됐으면 좋겠네요.”
“무인정찰기도 띄웠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나는 은퇴 직전에 짬처리 한 것보다는… 레이첼이 조종하는, 올해 생산된 멀티콥터를 믿을래요.”
레이첼의 드론을 말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하드 케이스 백팩에 담아서 갖고 다니는 물건으로 억 소리 나는 물건이라고 들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초소형 드론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수십만 달러가 아니라 100만 달러가 넘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녀의 드론 운용 실력은 손에 꼽는 수준이니, 나로서는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레이첼의 답이 이어졌다.
“공여받았어도 성능은 괜찮을 거예요. 그보다는 조작하는 게 더 중요한 거라서…….”
“그래도 레이첼의 조종 실력이 더 낫잖아요?”
“음,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의 확답을 듣고서야 잡념들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당장 믿을 수 있는 건 우리 팀뿐이니까.
“그럼 잘 좀 부탁합시다.”
* * *
세르게이는 러시아의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에서 육성된 군인이었고, 이후 러시아의 정보기관인 FSB(Federal Security Bureau)의 알파 그룹을 거친 최정예 엘리트였다.
물론 지금은 현역에서 퇴역한 지 수 년이 흘렀는데, 그래도 전투 감각만큼은 여전했다.
당시의 훈련과 작전이 본능처럼 남아 있기도 했거니와, 그사이에도 현역 못지않은 테러를 계획하고 수행한 덕분이었다.
현역 시절에는 없던 상흔들이 온몸에 빼곡할 정도.
그만큼 죽을 위기도 여러 번 있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현역 시절과 다르게 투입 전 고고도 정찰기와 위성 등을 통한 ISR(Intelligence, Surveillance, Reconnaissance: 정보, 감시, 정찰) 지원은 물론이고, 초저고도 비행 가능한 수송 헬기와 조종사도 없으며, 최후의 상황에서 구출해 올 만한 구조 전문 부대도 따로 없었으니까.
즉, 세르게이 혼자 싸워야 하는 셈이었다.
유능한 수하들이 있긴 했지만, 세르게이는 그들과 함께 싸우는 현장 요원이면서 또한 지휘관이고, 끝으로 모든 걸 계획하고 승인하는 야전 사령관의 역할도 겸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는 작전지역에서 약 500M 떨어진 위치에 있는 QRF(Quick Reaction Force: 신속대응군)의 현장 지휘관 역할을 맡았고, 무전 감청을 실행하는 본부이기도 했으며, 대기 중인 스나이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최종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런 세르게이는 현재 작전 강행과 중단, 지연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은 탓이었다.
‘빌어먹을 무인정찰기에 좆같은 저격 각도, 엿같은 시계(視界)라…….’
세르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작전을 강행해서 좋은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무인정찰기가 반경 300M를 감시 중이어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고, 정상적인 저격 소총도 두 자루뿐이라서 일사불란하게 적을 처리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물론 암시장에서 구한 저격 소총이 제법 있긴 했는데, 그건 전부 사용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동유럽에서 민간 개조되거나 중국과 인도에서 넘어온 저급품이기 때문이었다.
거리라도 가까우면 그냥 사용하겠지만, 그럴 순 없었다.
공여하면서 부활한 고물 무인정찰기가 반경 300M를 훑는 상황이었으니까.
고로, 제대로 된 장거리 사격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나이퍼들이 제 몸처럼 갖고 다니던 저격 소총을 써야 했다.
그게 지금은 15명 중에서 단 두 명뿐이었고.
고심 끝에 세르게이가 입을 열 때였다.
무전 잡음과 함께 720M 밖에서 대기 중인 저격수의 목소리가 헤드셋으로 전달됐다.
-월계관, 여기는 첨탑. 시계 불량으로 식별 불가한 차량 5대 작전지역으로 접근 중이며 차량과 작전지역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행동 지시 바람.
“첨탑 잠시 대기. 글러브에서 시야 확보 가능한지?”
세르게이가 곧장 다른 곳에 위치한 저격수에게 물었고, 그나마 나은 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글러브, 시야 확보… 일부 가능. 탱고(Tango: 타깃의 약어) 차량 식별됨.
“작전지역에 정차 시 저격 가능한가?”
-차창이 더러워서 식별 불분명하므로 완전 하차해야 가능함. 이상.
완전히 하차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그래도 저격이 가능하니까 다행이었다.
무인정찰기까지 띄운 상황이고 저격수들은 제한된 장소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해야 했으니까.
이내 세르게이가 지시를 하달했다.
“첨탑, 여기는 월계관. 탱고가 완전 하차할 경우 사살하도록. 가능한가?”
-여기는 첨탑, 사살 가능하며 지시대로 하겠음. 이상.
저격수가 고작 둘뿐이고, 상황도 나빴지만, 세르게이가 결국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전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은신처 지하에서의 매복과 교전도 있었다.
그래서 작전 중단과 지연을 고민했던 것이기도 했고.
다만, 여기서 죽이는 게 가장 깔끔했다.
은신처에서 교전하기에는 사전에 미사일 연구자들을 빼내야 하고, 그럼 연구가 잠시나마 중단되기 때문이었다.
관련 자료나 미사일 재료들도 번거롭게 옮겨야 했고.
‘모든 게 개좆같지만, 차라리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만에 하나, 아군 구출 상황이나 적 차단, 및 시가전 상황에서는 QRF인 세르게이와 휘하 병사 10명이 무장 개조된 테크니컬 차량을 타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보다 좋은 건, 저격 소총으로 왜 죽었는지도 모르게 깔끔하게 보내 버리는 것이었고.
그리고 곧 아까보다 더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우스, 하우스. 여기는 캐노피. 작전지역 접근 확인되었으며, 현재 특이 사항 없으나, 남쪽 220미터 지점에 민간인 세 명 주의 바람.
감청 중인 카마르니아군의 무전 음성이었다.
곧 세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첨탑, 글러브. 여기는 월계관, 적 포착 즉시 사살하고 후보고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