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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44화 (44/185)

44화

빌라 앞에서의 총격전은 예상치 못했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죽는 장소가 여기도 아닐뿐더러, 게임에서도 이곳을 감시하는 장면은 아예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짐작을 못 했던 건 아니었다.

좀 하긴 했었다.

내가 추측했던 것과 방향이 달라서 문제였을 뿐.

‘이거 어쩌면 스토리가 생각보다 많이 틀어졌을지도 모르겠는데……?’

다시 생각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놈들이 갑작스레 나타날 수는 있어도, 내가 아는 상황에서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예컨대 놈들이 실험 중인 미사일 실험장에서, 혹은 그들이 동원한 테러 집단과 함께.

물론 조금씩 바뀌어서 상황이 악화되거나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한데, 그 수준이 아니었다.

숙소를 옮긴 직후에 방탄복과 M4도 없이 잠깐 내려갔다가, 정말 우연하게 세르게이의 부하들을 마주한 탓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백 프로 감시하는 거지.’

과장된 생각이나 망상이 아니었다.

나와 시선을 섞었던 놈은 세르게이의 부하였고, 놈이 하던 행위 역시 명백한 관찰이었으니까.

세르게이가 나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놈의 성미상 모르기가 어려울 터.

그래서 이 정황을 대외협력국에 알리기 위해서 제이크에게 제법 구체적으로 말했었다.

러시아계의 백인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고.

물론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부하’라는 단어를 제외하긴 했지만, 어쨌든 뜻은 잘 전달됐을 것이었다.

대외협력국이 반걸음씩 늦긴 해도 모자란 곳은 아니었으니까.

따지자면 충분히 유능했다.

카마르니아 현지 경찰의 태도가 그 증거였다.

총격으로 사람이 죽었는데도 빌라 앞에서 비자 확인과 가벼운 질문 몇 개로 상황이 마무리됐기 때문이었다.

따로 불러서 조사하거나 구금하지도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총을 들었고, 예정됐던 군부대 교육까지 나갔다.

당연하게도 마음을 놓진 않았다.

총격전을 했던 그날부터 쭈욱 경계해 왔었다.

육군 특전대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군용 철조망이 부대 바깥을 감쌌고, 위병소도 있었지만, 마음먹으면 들어오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었다.

특수부대라고는 해도 기준 미달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저번에 깜빡하고 벗어 뒀던 플레이트 캐리어는 물론이고, 방탄 헬멧과 보안경도 착용했으며, 혹시 몰라서 4안 야투경까지 보조 파우치에 담아 왔다.

거기에 5.56㎜탄 180발, 9㎜권총탄 51발도 챙겼고, 대검도 2개나 챙겼다.

고립의 가능성을 우려해서 비상식량도 가져왔고.

쉽게 말해, 완전 무장이었다.

원래 알 자마쉬에서 썼던 HK416이 아닌 M4라는 게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예전에 한미 합동훈련 하면서 써 보기도 했거니와 미국 제식 총으로 쓸 만하다고 알려진 편이었으니까.

이에 카마르니아 육군 특전대 부대에 들어와서도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리.”

다소 낮은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그녀가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빌라 앞에서의 일 때문에 그래요?”

따로 말한 것도 없는데, 레이첼이 짐작하듯 말한 것이었다.

역시나 눈치가 좋았다.

그녀가 내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 옆구리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진심이에요. 이곳이 육군 특전대라서 하는 말도 아니구요.”

“……?”

방금 내가 했던 생각이 그대로 나오기에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볼 무렵.

레이첼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 그럴 필요 없이 분담하는 걸로 해요.”

동시에 그녀가 더욱더 나직하게 목소리를 줄여 왔다.

“작전지에서 수거한 화물을 나눠 들거나 교대로 드는 게 더 그럴듯한 비유겠네요.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아닌 척해도 내 눈에는 다 보이니까 거짓말도 하지 말구요. 만약 그게 좀 부끄럽거나 말하기 꺼려지면 작게 고개만 끄덕여요. 내가 저 세 사람한테 경계를 할 수 있겠냐고 돌려 말할게요.”

“뭘 그렇게까지…….”

“푸흐, 그러면 짐을 좀 내려놔요. 저 셋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지금 너무 과민해 보이거든요. 오늘만이 아니라… 지난 며칠 내내, 맞죠?”

정확했다.

총격전 직후로 스토리가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에 좀 긴장을 했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까지 받은 건 아니었지만, 주말 내내 나름대로 경계에 신경을 썼었다.

정확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걸 레이첼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팀장과 부팀장, 호세… 다들 신뢰하잖아요. 동료로서의 관계든, 팀으로서의 능력이든. 애석하게도 당신처럼 대단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맡은 바 임무는 충분히 해내는 사람들이잖아요. 아, 그 안에 나도 포함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맞아요?”

“그럼요. 제가 팀 아니면 누굴 믿겠습니까? 레이첼도 그렇고.”

“다행이네요. 그럼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지 말아요. 우린 팀이잖아요.”

레이첼이 그러면서 지그시 눈을 마주하다가 목소리를 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혹시라도 심리적으로 힘들거나 그러면 말해요. 당연히 내가 아니라 본사의 심리 상담가나…….”

“아휴, 됐어요. 멘탈은 강철이라서 튼튼합니다.”

“그래요, 그럴 것 같았어요.”

내가 걱정을 중간에 잘라 내자, 레이첼이 예상했다는 듯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누나 같았다.

외동으로 살았고, 친척조차 왕래가 없어서 만난 적이 없는 데다가 부대에도 죄다 형·동생뿐이었지만.

걱정해 주는 누나가 있다면, 그게 레이첼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 꾸준하게 동료로서 대우해 주고, 또한 여러 면에서 도움도 줬기 때문이었다.

‘내가 레이첼을 너무 계산적으로만 봤나…….’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레이첼은 라레플 속에서 작전과 임무를 수행하던 유능한 위장 요원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교류가 종종 연출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뭔가는 없었다.

나도 그런 감성보다는 캐릭터와 시나리오 위주에 반했었고.

하지만 지금은 게임이 아닌 현실인만큼, 분명 레이첼도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터.

그사이, 다시금 내 옆구리를 툭 친 레이첼이 앞서 걷기 시작했고, 그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따지면 내가 오빠긴 한데 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요새 라레플 바깥에서의 내 나이를 헷갈리다 못해서 종종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실이고 자시고를 따지는 게 아니었다.

그냥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약 4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바쁘게 보낸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이전의 인생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남은 인생에 미련이 있진 않았다.

어차피 고됐을 삶이니까.

그저 특전사였던 10년의 세월이 나만의 추억으로만 남고, 함께했던 선·후임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다른 건 아쉬운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곳의 나는 교통사고로 골반과 무릎이 다쳐서 절뚝거리는, 배 나온 아저씨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신체가 멀쩡하다 못해 튼튼한 청년이었고.

비교할 수 없었다.

그사이, 어느새 도열한 수십 명의 육군 특전대 앞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육군 특전대 대대장 막심 바예프입니다.”

내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콧수염을 두껍게 길러서가 아니라, 육군 특전대의 훈련을 맡으면서 종종 봤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당시 시나리오의 감독관이기도 했었다.

대원들 앞에서 CQB나 시가전 등의 사격 과정을 시범 보여야 하고, 그 시범 결과에 따라 점수가 책정되며, 점수에 따라 회사에서 보너스가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그 보너스로 장비를 고치거나 구입할 수 있었고.

물론 그건 내가 플레이 했던 라레플의 시스템일 뿐이고, 현실은 달랐다.

제이크에게 받은 파일로 미군 전술 교리를 익힌 나보다는 몇 년 전까지도 복무했던 다른 팀원들이 시범자로 더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설명자도 마찬가지.

“반갑습니다. 저는 제75레인저연대와 그린베레를 거쳐서 델타포스에서 6년간 복무했던 마커스 워싱턴입니다.”

대원들에게 박수를 받은 마커스가 전술 교리를 설명했고, 이어서 호세를 데려다가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내가 활약할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격실 진입 방법은 지금까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졌습니다만, 제가 전역할 즈음에 새로 전파됐던 방법을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그린베레나 델타포스에서도 해당 방법을 쓰니, 주의 깊게 듣기 바랍니다. 호세, 천천히 움직여 봐. 그래, 자… 여기서 크로스나 다이렉트로 바로 진입하는 대신, 이렇게 문앞을 사이드로 빙 둘러 가면서 내부를 파악하는 방법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자칫 위험해 보이지만, 내부를 80% 이상 미리 확인할 수 있어서 크로스나 다이렉트로 들어가는 것보다 피격률이 떨어집니다. 또한 관찰 시간이 증가해서 부비 트랩 예방에도 좋습니다.”

동시에 호세가 게걸음을 하면서 판자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거기에 나도 빠져들었다.

10년 전에 복무했던 특전사 시절에는 없던 거였고, 이번에 처음 보는 격실 진입 방법인 데다가 그 움직임이 상당히 세련됐기 때문이었다.

“오…….”

작게 감탄까지 나왔다.

그러자 문뜩 예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알 자마쉬의 훈련 센터.

그곳에서 들었던 내 스타일에 대한 말이 불현듯 기억난 것이었다.

1인 CQB 코스를 거치면서 기록 경신을 했음에도, 제이크가 내게 녹슬었다고 했고, 마커스와 호세 역시 불필요하다던가 아쉬웠다고 말했었다.

당시에는 조금 놀라서 주춤하는데 그쳤었다.

특성 3개를 갖고도 총을 놨던 10년의 세월을 가리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이크가 곧장 고칠 필요는 없다고 했었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상당히 달랐다.

그저 격실에 들어가는 동작일 뿐인데도 아주 안정적이고, 깔끔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모습.

생존율 상승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크으, 그때 이 실력들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다시금 감탄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당시 모니터로 동시 송출됐던 영상을 봤을 때는 크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들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눈여겨보고 배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보다 시간이 늦을 뿐, 잘했다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마커스가 동작을 짚어 가면서 발의 위치를 알려 주고, 움직일 순서를 짚어 준 데다가 호세가 그걸 아주 천천히 구현해 줘서 모든 게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역시 미국의 1, 2티어 특수부대다웠다.

‘와, 이게 SSS급 클래스의 수업인가…….’

동시에 주춤했다.

나도 혼자서 발을 움직여 보다가 깨달은 것이었다.

‘그때 1분 50 몇초 어쩌고 했는데… 잘하면 거기서 몇 초는 더 줄이겠는데?’

작전에서는 소수점 이하의 시간으로도 생사가 갈리는 만큼, 몇 초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 죽을 위기에서 간발의 차로 구해 낼 정도는 될 터.

다시금 각오를 단단히 했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팀원의 목숨을 넘어 이 세계를 구하는 일이었으니까.

거창하다 못해 오글거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뒈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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