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특급 호텔에서 수도 외곽의 낙후된 빌라로 짐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카스피해 연안이긴 하지만, 아스팔트 포장마저 안 돼서 먼지가 날리는 주택가였다.
당연히 빌라 시설도 그만큼 낙후되어 있었다.
이에 호세가 농담거리 삼아서 한두 마디를 했으나, 군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휴가가 아니라, 일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그랬듯이 군인이라면 이것보다 열악한 곳에서 생활해 본 경험도 많았을 테고.
이에 내부를 휘 둘러보기를 잠시, 어느새 제이크가 상황을 정리했다.
“나와 리가 한 방, 마커스와 호세가 한 방, 레이첼이 한 방을 사용하도록 하고, 취침은 22시부터 06시까지. 하루 4회. 2시간 간격으로 불침번 진행하도록.”
“그러죠, 팀장. 으음, 그러면 우리 방은 이걸로 하겠습니다?!”
호세가 잽싸게 방 하나를 고르며 들어갔고, 독방을 쓰게 된 레이첼은 알아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방으로 향하면서 제이크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리, 그때 얘기나 좀 해 봐.”
“그때라면… 레스토랑 테러요?”
“그래, 나중에 보니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흐릿하더군.”
“머리도 다쳤다고요? 검사는 받았어요?”
“괜찮아. 두개골에 금만 갔어.”
“…머리에, 금이? 아니, 저기… 진짜로 병원에 더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심하진 않아, 거기서도 결국 퇴원 처리를 해 줬잖나?”
“배를 열었다가 닫고, 머리까지 깨진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내 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분명 제이크가 가겠다고 통보하고, 병원에서 어쩔 수 없이 보내 주는 장면이 절로 상상될 무렵.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날 어땠나?”
“뭐… 보고서에 쓴 그대로죠. RPG가 날아오는 걸 보자마자 저도 잠깐 기절했었고, 깨어나서는 응사하면서 최대한 열심히 버티고…….”
대답하던 와중에 제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읽어 봤어. 내가 말하는 건 네가 느꼈던 감상이야. 전에 말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미리 말해 주라고, 그런 게 없었냐는 말이지.”
“아…….”
제이크가 예전에 작전을 마치고 나서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레스토랑에서도 말해 줘야 하는지를 잠깐 생각했었는데, 결국에는 입을 닫고 말았었다.
안 그래도 제이크가 건너편에 서 있는 수상한 차량을 인지한 탓이었다.
즉, 상황 대비를 아예 못 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굳이 말을 보태는 것보다 필요한 경계와 보고를 하는 게 낫다고 봤다. 그리고 ‘감’을 빙자해서 미래를 예지하는 것도 내심 불안했다.
안 그래도 초인적인 사격 실력이 눈에 띄는 상황이고, 한국에서도 자신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이후로 말이나 행동을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었다.
물론 사격이나 훈련까지 대충할 순 없으니 여전히 최선을 다했지만, 대신에 의심될 만한 말은 좀 아끼는 편이었다.
이에 제이크의 깊은 눈을 마주하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안 좋았죠, 뭐.”
“어떻게? 따로 느낀 게 있었나?”
“그런 건 없었죠.”
“…그렇군.”
왠지 아쉬워하는 듯한 모습을 바라볼 무렵.
제이크의 품속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고, 전화를 받은 그가 몇 번 대답하더니 금세 통화를 마쳤다.
딱 봐도 일과 관련된 전화였는데, 내 짐작이 맞다는 듯한 설명이 들려왔다.
“군부대 훈련 말이야. 주말 지나고 월요일부터 하기로 했어. 육군 특전대의 교육을 맡는다더군.”
이른바 카마르니아의 1티어 특수부대.
카마르니아의 육군 특전대는 미국의 델타포스나 영국의 SAS를 표방해서 만든 부대인데, 실제 수준은 감히 비교할 정도가 못 됐다.
따지자면 아프리카의 군부대와 비슷했다.
그것도 이집트나 알제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의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강력한 특수부대가 아닌, 부패와 지원 부족 등으로 망가진 아프리카 내륙 국가의 부대들.
제이크 역시 미리 언질 받은 듯 알려 줬다.
“전체적인 수준이 많이 떨어져서 현역 부대원들을 신병처럼 가르쳐야 할 거야.”
“그래야겠죠, 근데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알던 스토리와 맞는지 확인하려 물었는데, 다행히 예상과 맞는 답이 돌아왔다.
“1개월 단위로 하게 될 텐데, 기간 연장도 염두에 두라더군.”
아마 라레플 스토리대로 세르게이의 흔적을 찾은 모양이었다.
말인즉슨 세부적인 변화가 있기는 해도 메인 스토리가 여전히 변함없이 흘러간다는 소리였고, 내 각오대로 놈을 죽일 가능성도 커진다는 뜻.
그사이에 제이크가 날 바라보면서 물었다.
“리, 군인들을 가르쳐 본 적 있나?”
“후임 교육한 건 빼고요?”
“그래, 다른 부대에서 가르쳐 본 경험 말이야.”
“그런 적은 없는데, 대신에 그린베레한테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한미 합동 훈련으로 해마다 교육하고 훈련 진행했었거든요.”
“잘됐군, 내 노트북으로 바로 파일 보내 줄 테니까 미리 확인해 둬. 아마 비슷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이크와 짧게 대화를 마치고, 그의 말대로 교육 커리큘럼 파일을 확인할 즈음.
투다다다다다―
아주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쏴 갈기는 소리가 몇 번을 더 반복해 들리고 연한 폭음도 이어졌다.
“…….”
가만히 있었다.
호텔에서처럼 움직이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 동안 귀를 기울여서 다른 소리가 있는지 듣기만 했다.
제이크가 입원하고 난 뒤, 5일 동안 호텔에서 매일같이 들은 소리라서 배경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제이크도 병실에서도 총성을 들었다고 하더니, 그 역시도 잠시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그리고 순간, 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 호텔에서 헤어졌던 마리아가 전화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처음 보는 연락처였다.
미국 국번으로 시작하는 사무실 번호.
의아함에 받는 순간, 누가 왜 걸었는지 금방 알았다.
-지앤지 버지니아 본사의 소피입니다. 전화 받은 분이 강태 리,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린카드가 이곳 사무실에 도착했어요. 당신은 지금 카마르니아에 출장 근무 중인 걸로 확인되는데, 어떻게 해 드릴까요? 보관할까요? 아니면 발송할까요?
“…….”
어마어마한 속도에 주춤했다.
영주권을 달라고 말한 지 고작 2주밖에 안 지났기 때문이다.
새삼 배후에 있을 국무부의 파워를 다시 느꼈다.
보통은 2주가 아니라, 최소 2개월씩 걸렸고, 중간에 뭔가가 꼬이면 거기서 2개월이 더 추가되기 때문이었다.
한데 나는 2주 만에 허가가 난 것도 아니고, 아예 도착을 해 버렸다.
이에 고민하기를 잠시, 고개를 저었다.
“휴가 때 가지러 갈게요.”
휴가까지 남은 시간이나 여기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오다가 잃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오는 셈이니까.
특히나 카마르니아는 매일같이 총성이 들리는 부분 승인국으로 멀쩡한 게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비행도 금지됐다, 허용됐다 오락가락하니, 물류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이윽고 내 판단이 맞다는 듯한 본사 직원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휴가 나올 때 연락해 주세요. 그린카드 준비해 놓을게요.
“알겠습니다.”
-축하드려요, 출장 근무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세요.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 뒤로 통화를 마치자, 마찬가지로 노트북으로 커리큘럼을 보던 제이크가 내게 턱짓했다.
“무슨 일이야?”
“영주권이요. 지금 사무실에 도착했대요.”
“잘됐군, 다음 휴가 때 가지러 가면 되겠어.”
2주 만에 도착한 건 신경도 안 쓰는지, 제이크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말했다.
“혹시라도 집이나 차를 사게 되면 내게 말해.”
“팀장한테요?”
“그래, 그쪽으로 관리해 주는 지인이 있거든.”
“아… 그래요?”
국무부 직원일 게 분명했지만, 굳이 티 내지 않고 모른 척했다.
“잘됐네요. 구입하게 되면 말씀드리죠.”
“그래, 이번 일에 대한 성과금도 나올 테니까, 잘 모아서 괜찮은 거로 사 두라고.”
“알겠습… 아, 월급날?”
어느새 11월 말일로 월급날이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이에 핸드폰으로 들어서 은행 계좌를 확인했다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추가 보너스인 미화 4만 달러, 한화로는 약 5,0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 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돈을 보고 기쁘다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벌써 세 번째라서 익숙해진 게 아니었다.
쓴 돈이 많은 탓이었다. 애초에 이 바닥에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장비 가격이 대체로 그랬다.
툭하면 수백 달러, 수천 달러 아니면 만 달러 이상.
물론 알리 익스프레스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중국산 최저가 제품을 갖다 써도 됐다.
따로 내규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나 성능을 넘어서서 목숨도 보장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인증받은 고가의 장비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갔다.
특히 나는 아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장비 하나 때문에 삐끗해서 핵전쟁을 못 막으면, 돈이 억만금이 있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물론 핵 방공호 시설을 마련해 놓고 숨으면 목숨은 유지하겠지만, 끝장난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근사한 집에서 사랑하는 와이프,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려서 사는 게 꿈인 탓이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돈은 돈이 아니었다.
일단 모든 장비를 최상으로 갖춰 놔야 했다. 저렴한 건 아끼는 게 아니라 손해였다.
즉, 값비싼 것들로 치장한 지금이 기본인 셈이었고.
이에 남은 잔금을 보면서 추가할 만한 장비를 떠올리고 이런저런 계산을 할 즈음이었다.
“리, 차량에서 PDA 가져왔나?”
노트북으로 교육 자료를 보던 제이크가 내게 턱짓하며 물었다.
나침반과 지도, 그 외의 메모 목적 따위로 쓰이는 밀스펙(MIL SPEC) 내비게이션 제품을 말하는 것이었다.
“트렁크에 있던 건 다 가져왔는데… 없습니까?”
“콘솔 박스는?”
“아…….”
하필 내가 앉았던 자리였다.
“가져오겠습니다.”
얼른 일어났고, 부탁한다는 제이크의 말을 들으면서 빌라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휑하니 울리고, 찬 기운이 몸에 스밀 무렵.
어느새 건물 입구의 철문에 다다랐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습관적으로 좌우를 둘러봤을 때였다.
“……!”
시야에 낯익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이동 중인 은색 구형 프라이드 뒷자리에 탄 백인.
어떻게 보면 차에 탄,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인데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인상이 너무나도 익숙한 탓이었다.
비니를 눌러써서 가린 대머리와 날카롭다 못해 사나운 인상.
짐작하기로는 적일 것이다.
내게 익숙한 얼굴은 대개 적 아니면 아군뿐이니까.
이에 고심하기를 잠시, 다행히 늦지 않게 캐릭터 하나가 떠올랐다.
‘…아, 쫄따구!’
세르게이의 수족 중 하나였다.
여전히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엑스트라인데, 이미지가 인상적이어서 잊지 못하고 있었다.
캐릭터 조형을 잘못했다고 생각했었다.
엑스트라가 인상적이라서 괜히 기억에 남았으니까.
그 증거로 차량에 함께 탄 나머지 3명은 세르게이라는 연관성을 두었는데, 아직도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냥 지역 주민처럼 생긴 탓이었다.
물론 분위기는 달랐다. 아주 잠깐 본 게 전부지만, 칙칙하다 못해 살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히 모두 세르게이의 부하라고 봐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내 오른손이 권총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M4를 매달고 왔다면 M4를 잡았을 텐데, 가진 건 부무장인 글록17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끝이 권총집에 닿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글록17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씨팔.’
욕설이 절로 떠올랐다.
교전 중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격발했을 텐데, 상황이 갑작스럽고 애매해서 고민이 된 탓이었다.
거기다 적의 무장 상태도 모르고, 현 상황도 아는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아직 건물 안의 그늘에 잠겨 있어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한 걸음만 나가면 햇볕에 노출될 터.
나가 봐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
스킨헤드와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주의 깊게 쳐다보다가, 그늘 속의 나까지 알아본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글록17이 내 오른손에 들려 나왔다.
동시에 총구가 그늘 밖으로 뻗어 나가면서 햇볕을 받았다. 겨울의 따듯한 햇빛이 내 양손과 손목까지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마침 차량도 내 옆을 지나가는 때였다.
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
지나쳐 가는 차량을 향해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총 11발.
우선 보이는 대로 머리 쪽을 노렸다. 그 뒤로는 타이어를 맞혀서 펑크를 냈고.
순식간이었다.
무력화된 듯 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이십 여 미터를 더 굴러간 프라이드가 주차된 차를 때려 박았다.
쿵―
다소 싱거운 소리가 날 무렵.
‘…남은 탄 6발.’
계산을 마무리하고 좌우를 살피며 건물을 나선 뒤, 주차된 차들을 엄폐물 삼아서 움직일 때였다.
“……!”
차창 너머로 총구가 보였고, 이어서 섬광이 번쩍이듯 보였다.
타다다다다당―!
프라이드 안에서 총알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생존자가 있다는 소리.
아마도 머리통이나 뇌 대신에 얼굴 일부가 관통당해서 살아남은 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보이는 머리통은 전부 맞혔으니까.
광대나 볼, 턱, 생명에 지장 없는 부분들이 뚫렸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이런 사례를 겪는 건 처음이었다. 부대에서 교육 받으면서 들어나 봤을 뿐.
이에 주차된 차량에 숨은 채, 슬쩍 내다볼 때였다.
타다다다당!
피융―! 티팅! 팅!
총성과 함께 탄이 날아들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꼴에 특수부대라고 내 위치를 파악하고 쏜 모양이었다. 물론 얼굴이 박살 났으니 제대로 맞히진 못했을 것이고.
헛웃음이 났다.
“허…….”
PDA를 가지러 나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아주 심심한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렇게도 다이내믹할 줄이야.
그사이, 건물 입구에서 우리 찰리 팀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빠릿빠릿한 움직임에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제이크가 상체를 숙이고서 내 곁으로 뛰어왔다.
내가 세팅해 뒀던 M4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