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UN OCHA 조사 팀의 일정은 전부 중단됐다.
다행히 그들 중에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레이첼이 기절했었고, 나도 몇 바늘을 꿰맸으며, 제이크는 복부를 갈라서 쇳조각을 빼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위험 지역에서 경호를 하다 보면 간혹 발생하는 일이라, 유별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전장이 레스토랑이라는 게 문제였다.
안전지대인 그린 존으로 여겨지던 장소.
심지어 공식적인 행사 첫날로 지역 국회의원과 오찬을 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여러 명이 총기를 난사하다가 사살당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넘어갈 만하지만, 수십 명이 대전차 로켓포를 쏘고 경기관총을 난사하는 건 봐주기가 어려웠다.
또한, 내 기억에도 전혀 없는 일이었다.
제이크와 레이첼이 총 한 발 못 쏘고 나 홀로 분투한 것도 마찬가지였고.
그린 존이 이 모양이면, 그 바깥은 더 위험할 가능성이 컸다.
게임에서도 여러 번의 소규모 교전이 있었던 걸 떠올려 보면, 그것 역시 중화기로 무장한 심각한 전투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기절이나 수술로 끝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고.
그런 이유로 지원하러 온다던 G&G Corp의 동유럽 지부 팀의 목적은 이틀 만에 우리를 데리러 오는 걸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임무 종료라는 뜻.
“카마르니아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복귀하게 생겼네요.”
소식을 들은 레이첼이 말하면서 짐을 쌌고, 내 커다란 전술 배낭을 넘겨다보면서 물었다.
“근데 정말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그냥 위험하대서… 고립될 가능성도 있으니까, 필요한 걸 다 가져온 거죠, 뭐.”
그녀에게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복귀한다는 신호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카마르니아를 떠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찰리 팀이 UN OCHA 조사 팀의 경호나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우리 말고도 다른 팀들이 있고, 동유럽 지부에서 와도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게임 플레이를 해 봤고, 시네마틱 영상을 봐서 잘 알았다.
그건 구실일 뿐.
여기 온 진짜 목적은 세르게이 추적이었다.
흔적이 나오게 되면서 2개월은 더 머무르는 게 원래의 시나리오였고.
물론 시나리오가 틀어졌음을 깨닫긴 했지만, 그래도 메인 스토리는 여전할 것이었다.
피칼의 핵전쟁 계획이든, 세르게이의 테러든, 대외협력국의 추적이든.
그렇게 어수선한 오전이 지나갈 즈음,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팀장 대행으로서 오전 내내 들락날락하던 마커스.
“나와 봐, 동유럽 지부에서 왔어.”
“빨리 왔네요.”
레이첼이 잘됐다는 듯 일어났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방을 나갔다.
복도에 용병들 여럿이 서 있었다.
MP7 기관단총에 글록17 한 자루씩을 착용한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
5.56㎜와 7.62㎜ 탄환을 쓰는 돌격 소총에다가 M203 휴대용 유탄 발사기를 장착하고, 등에는 대전차 화기인 칼 구스타프까지 멘, 그야 말로 중무장 상태였다.
‘와… 이거지, 이거. 드럽게 멋있네.’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이 정도 무장은 돼야 무쌍을 찍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어제의 전투도 못 한 건 아니었지만, 고작 MP7 기관단총 한 정으로 버텨야 해서 여러모로 실력 발휘가 제한됐었다.
사실상 강철 멘탈 덕분에 버티고 이겨 냈을 뿐.
아니면 판단도 힘들 가능성이 컸다.
어제만 해도 주방 안으로 RPG-7 탄이나 수류탄 같은 게 들어올까 봐, 심각할 정도로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면 5명이 전부 폭사할 상황이니까.
그런 면에서 동유럽 지부에서 온 아군의 무장은 아주 훌륭했다.
곧 마커스가 그중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드레이, 준비를 단단히 했군.”
“아무렴, 자네가 크게 좆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거친 대답을 한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동유럽계 혼혈 백인의 외모.
누군지 쉽게 알아봤다.
라레플을 플레이 하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동유럽 지부의 팀장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안드레이 모루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우크라이나계 인물로, 게임 플레이 중에 도움을 꽤 주는 동료였다.
그가 동유럽과 프랑스의 어감이 절묘하게 섞인 영어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 개자식들을 몰살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겠군. 전에도 보너스를 500% 가득 받았다던데? 그것도 당신 맞나?”
“아, 맞아.”
“흐흐흐,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지만… 오늘은 바쁘니, 나중에 만나게 되면 질펀하게 놀아 보자고.”
그가 악동처럼 웃는 사이에 마커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오늘 복귀하는 거 아니었어?”
“맞아, 오늘이지. 하루 쉬었다 가도 될 텐데, 피곤하게시리……. 쯧, 그래서 그 UN에서 왔다는 짐덩이들은 어디 있나?”
“아니, 조사 팀 말고 우리는 안 가나?”
안드레이가 답하고, 마커스가 정정하며 물었을 무렵.
의아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무슨 소리야? 난 그 짐덩이들만 회수하기로 했어.”
“다른 지시는 없었나?”
“그래, 본사에 연락해 봐. 이 병신들이 가끔씩 일을 빼먹곤 하잖아.”
“…알았어, 연락해 볼게.”
그렇게 마커스가 핸드폰을 빼 들고 잠깐 등을 돌리는 사이.
안드레이가 날 스윽 보며 물었다.
“이봐, 아시안. 그 델타 괴물은 병원에 있다면서?”
“우리 팀장?”
“그래, 어쩌다가 병원에 있는 거야? RPG 탄을 몸으로 막다가 멍이라도 든 건가?”
“아니, 파편이 몇 개 박혔어. 좀 큰 걸로.”
“흥, 쉬고 싶었던 거겠지, 괴물이 어떻게 파편 몇 개로 병원에 눕겠어. 안 그런가?”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너는? 혼자서 놈들을 몰살한 것치고는 아주 깨끗한데? 또 다른 괴물인가? 겉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말이야.”
“사람이야, 그냥 뭐… 운이 좀 좋았지.”
“운이라니? 40, 50명을 행운으로 죽일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인가? 신이지. 아, 혹시 기독교 신자라면… 신성모독이든 뭐든, 좋을 대로 생각해. 난 신을 안 믿거든. 정 꼬우면 한판 붙어도 좋아. 대신 치료비는 자기 돈으로 하고.”
“뭘 그렇게까지… 난 괜찮아. 근데 우리 팀장은 독실한 신자일 텐데……?”
“그래, 알아. 개같이 독실하더군. 덕분에 왼쪽 어깨가 부서졌었어. 지금 생각해도 좆같은…….”
“부서졌다고? 왜?”
“그 괴물이 주먹을 휘두르길래 흘려 내려고 숄더롤을 했었는데… 그게 안 통하더라고.”
“아…….”
무슨 말인지 잘 알았다.
복싱 선수인 메이웨더가 어깨로 주먹을 흘리거나 막듯이 흉내를 내다가 실패했다는 소리.
그럴 만했다.
제이크의 주먹은 주먹이 아니라, 사실상 해머에 가까웠으니까.
이윽고 내 생각과 같은 말이 그대로 나왔다.
“시발, 내가 착각한 거였어. 그건 주먹이 아니라 해머나 토마호크라고 봐야 해. 어깨를 맞았는데 거의 기절할 뻔했었거든. 차라리 총에 맞는 게 나을 정도로 말이야.”
“…그럴 것 같네.”
“아마 복싱 자세를 잡고 팔로 방어했다면… 팔이 그대로 쪼개졌을 거야.”
그렇게 안드레이와 잡담을 짧게 나눌 무렵.
마커스가 돌아왔다.
“안드레이, 네 말이 맞았어, 전달이 제대로 안 됐더군.”
“하, 그럴 줄 알았어. 앉아서 컴퓨터나 하는 새끼들이 뭐 그리 실수를 많이 하는지 모르겠군. 전장이었으면 반 정도 썩어서 묘지에 파묻혀 있겠지, 안 그런가?”
그 말에 마커스가 방문에 노크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컴퓨터를 하는 거겠지.”
“오, 정답이군!”
그러더니 곧 마커스가 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나오십시오, 복귀를 도울 경호 팀이 왔습니다.”
“자, 빨리빨리 나오쇼.”
옆에서 안드레이가 재촉하는 사이.
곧 문이 열리고 UN OCHA 조사 팀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볼 무렵, 대열 중간에서 사람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리.”
마리아 오뒤르, 어제 만나서부터 나한테 관심을 보였던 남미의 미인.
그녀가 왜 내게 오는지 잘 알았다.
불침번을 서던 새벽에 찾아오는 바람에 대화하고 연락처까지 교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 있던 건 아니었다.
얘기들을 좀 나누다가, 방을 따로 잡으면 안 되겠냐는 말까지 나온 것이었다.
그건 다시 생각해도 심히 고민되는 것이었다.
멀쩡하다 못해서 아주 튼튼한 29세의 몸뚱이를 가진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딴 데로 피까지 쏠렸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침번 중이라서 결국 마리아를 돌려보내야 했었다.
어제 습격이 있었고, 제이크가 병원에 남아 있기도 했고.
지금은 아마도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을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녀가 나를 껴안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연락할게, 리. 꼭 전화받아야 해.”
“그래, 알았어.”
대화하면서 가까워진 덕에 말을 편히했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입술에 입맞춤까지 했다.
쪽, 그리고 미련이 남은 듯 등을 돌릴 때였다.
안드레이가 히죽 웃어 보였다.
“능력도 좋군, 하루 만에 여자를 꼬드겼나?”
“그러려던 건 아닌데…….”
“저 여자는 특별히 보호해 주지, 딴 놈들이 찝쩍대지 못하게.”
“하하… 알았어.”
“믿어도 돼, 내가 약속 하나는 잘 지키거든. 그리고 마커스! 이거 받아, 사무실의 머저리가 주라더군.”
어느새 안드레이가 마커스를 향해 차 키를 툭 던졌다.
“푸조 검은색, 뒷자리 520번의 SUV야. 안에 쓸 만한 것들도 좀 실어 놨으니까, 알아서 골라 써.”
“병기 말이야?”
“그래, 중화기를 상대하려면 그걸로는 턱도 없잖아?”
“…쓰지 않길 바라야지.”
“그런 기도는 교회에 가서 하라고, 여긴 무슬림들 천지니까.”
안드레이가 그러면서 등을 돌렸다.
“그럼 살아서 다시 보자고. ”
그가 복도를 빠져나가는 사이, 마커스도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도 받은 걸 확인하러 가지.”
그렇게 걸음을 옮겼고, 주차장에서 안드레이가 말했던 푸조 SUV도 금방 찾아내었다.
곧장 짐칸부터 열었는데, 금세 미소가 걸렸다.
“이제 좀 낫네.”
M4 여러 정에 5.56㎜ 탄 박스, 거기다 대전차 화기인 AT4도 여러 개가 실려 있었다.
또한 이 푸조 SUV 역시 딱 보니 방탄 차량이었다.
생각과 동시에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량 방탄도 B6 등급이네요, 흰색 UN 차보다 훨씬 낫겠어요. 그런데… 부팀장, 여기 잔류한 이유가 뭐예요?”
그녀가 어느새 마커스에게 물었고, 나도 그를 쳐다봤다.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는데, 답이 금세 나왔다.
“계약이 진행 중이라서 며칠 더 걸리겠지만, 아마 훈련 교관으로 군부대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더군. 그 전까지는 여기 대기하면 돼.”
다행히 게임하고 같았다.
훈련 교관으로 카마르니아에 머물면서, 병사들과 함께 실전 경험을 핑계 삼아 실 작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정확히는 세르게이와 관련된 놈들을 체포하는 대외협력국의 업무.
그런 이유로 우리 찰리 팀이 앞장서고, 현지 병력은 뒤에서 경계를 서거나 수습이나 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수확도 제법 있을 거였고.
그리고 작전과 관련된, 정말 중요한 것도 하나 있었다.
바로 세르게이 볼코프와의 대면.
정확하게는 멀리서 놈을 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스토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놈을 드디어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 2개월 남았나……?’
그와 만나게 될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물론 게임에서는 체포나 사살도 못 했지만, 여기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을 죽일 생각이었다.
국제법을 위반하는 부비 트랩도 상관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릴 생각이었다.
여기서 놈을 죽인다면, 핵전쟁의 향방도 바뀔 테니까.
물론 배후에 있는 피칼의 야욕이 쉽게 꺾이진 않겠지만, 그가 진행하는 핵전쟁에 차질이 생길 건 분명했다.
그가 오른손으로서 피칼을 대신해서 벌인 일들이 많았으니까.
‘…오케이, 해 보자.’
트렁크에 실린 M4를 챙기면서 각오를 다졌다.
이곳에서 할 일을 하다 보면 그리고 전투를 준비하다 보면 2개월은 금방 지나게 될 것이었다.
어느새 분기점이 코앞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