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36화 (36/185)

36화

UN OCHA 조사 팀이 카마르니아 정부 청사로 입장했다.

장관과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 촬영을 했으며, 실무자 회의와 언론사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그 안에 특이 사항은 없었다. 잡음 없이 일정표 그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제이크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청사 입구부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검색대에서 MP7 기관단총과 글록17, 여분의 탄약, 대검, 연막탄, 섬광탄 등의 병기와 장비를 내어 줘야만 했는데, 중요한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청사의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하면서 직무 태만을 시범 보인 것이었다.

마치 신기한 놀잇감이나 새 장난감을 보듯 웃고 떠들기까지 했다.

카마르니아어가 혼용된 러시아어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고, 그중에는 제이크도 알아듣는 단어도 있었다.

예컨대 작다, 비싸다, 멋지다 등등의 말들.

제이크의 고개가 절로 저어지고 표정이 굳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청사에서의 행사가 끝나고 장·차관이 배웅을 나오는 상황인데, 경찰들이 경비가 아니라, UN OCHA 조사 팀을 구경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자들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황.

‘…상상 이상이군.’

제이크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마르니아의 경찰 일부가 자경단에 간섭받을 만큼 약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정부 청사의 경찰들까지 기강이 해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이면 도심 외곽부터 경찰력을 기대해서는 안 됐다.

이미 내전과 분열, 훈련 부족, 사상자 발생 등으로 나약한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즉, 믿을 건 찰리 팀뿐.

그사이에 제이크의 인이어 무전기로 강태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2호차, 여기는 1호차. 먼저 병기 회수하겠음.

들어와서 시선을 돌리자, 로비 앞 쪽에서 강태가 경찰에게서 제출했던 병기를 돌려받고 있었다.

사전에 약속된 상황이었고, 다행히 잘 진행되고 있었다.

제이크가 눈 맞춤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2호차, 수신 확인.”

강태와 레이첼이 무기를 받아서 먼저 입구를 경계하고, 차량으로 접근할 때도 선두를 지킬 것이었다.

그 둘이면 믿음직했다.

마커스와 호세도 마찬가지지만, 강태는 특히 실력 면에서는 델타포스나 네이비씰의 경험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선제 조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심한 경찰 때문인지, 기분이 영 꺼림직할 무렵.

곧 UN OCHA 조사 팀이 검색대를 지나가며 마지막 배웅을 받았고, 제이크도 제출했던 병기와 장비를 모두 수령했다.

이어서 나오는 마커스와 호세도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청사를 나왔다.

동시에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앗, 눈이 오네요. 왠지 오늘따라 꽤 춥더니…….”

조사 팀의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바닥에도 눈이 질척일 정도로 쌓인 상황.

호세가 코트 깃을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 안 그래도 추운데 눈이라니… 쯧, 도로나 얼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이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이 내릴 때 가장 우려되는 건 도로가 얼어붙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기동하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 거기다 공격까지 받는다면, 정말 총탄에 벌집이 될지도 몰랐다.

B4 등급의 방탄 차량이 있긴 하나, 7.62㎜의 총탄에는 호일처럼 뚫릴 테니까.

물론 차량별로 스노우 체인을 준비했고 워커에 착용할 휴대용 스파이크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만능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적설량과 바닥의 질척한 눈을 확인한 제이크가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2호차, 현 시간부로 전원 차량 탑승하고, 눈 확인하면서 조심히 이동하도록.”

-3호차, 수신 양호.

-1호차, 수신 양호.

연달아 대답이 들리고 난 뒤, 사람들이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6명의 UN OCHA 조사 팀에 카마르니아 정부에서 붙여 준 가이드 1명, 거기에 경호 팀 5명까지 도합 12명의 인원.

탑승이 끝나자, 이내 SUV 엔진음과 함께 눈길 속으로 차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미국 워싱턴 D.C, 국무부 대외협력국 국장실.

국장 로버트가 새 보고를 받았다.

카마르니아로 보낸 제이크와 레이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사이에 UN OCHA 조사 팀에 대한 것도 끼어 있었다.

전부 미국이 관여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G&G Corp에 카마르니아 관련 일감을 주기 위해서 UN OCHA 조사 팀 하나를 움직인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경호 용역을 의뢰하도록 했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UN 이사국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OCHA에서 일개 조사 팀을 하나 보내도록 압박을 넣는 게 전부니까.

그것도 중간에 후원 기업과 브로커를 거쳐서 미 정부의 흔적을 최대한 지워 냈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입김은 남겠지만, 그 정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야 UN OCHA도 눈치껏 할 테니까.

그 모든 결과를 보고서로 받은 로버트가 시선을 내려서 차후 카마르니아에서의 계획도 확인했다.

[카마르니아 공화국 정규군 훈련 교관 수의계약의 건]

이것도 앞선 UN OCHA 조사 팀 파견과 비슷한 일이었다.

우회해서 압박하고, 원하는 결과를 내는 것.

이 역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카마르니아는 주변국인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와 달리 경제력이나 국방력이 부족해서 사실상 아프리카의 최빈국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미국 역시 유럽과 나토를 통해 카마르니아의 존립에 한 손 거들고 있는 상황.

주요 내정이 아니면, 이 정도 일은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단기간의 정규군 훈련 교관으로 G&G Corp와 계약하는 건이었으니까.

이내 상념을 떨쳐 낸 로버트가 다음 내용을 마저 살폈다.

물 흐르듯 순조로운 내용이었다.

‘괜찮군.’

훈련 교관으로 있으면서 진행할 일도 아주 자연스럽고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정규군의 실전 경험을 구실로 세르게이와 연관된 의심 인물을 체포하거나 집단을 진압하며, 취조 전문가를 보내 정보를 취득하는 등의 과업.

자칫 잘못하면 관타나모 수용소와 같이 비인권적인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대외협력국 창립 이후로 뒤만 쫓는 세르게이를 잡는 일이었으니까.

로버트의 표정이 금세 무거워졌다.

‘이번에는 흔적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왔으면 싶은데…….’

그게 세르게이를 체포하거나 관련된 주요 사건의 증거 수집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좋지만, 짐작하고 있는 사실도 확인되길 바라고 있었다.

‘…진짜 주범.’

이번에 남중국해의 타릴 제도를 수색하면서, 로버트가 느낀 것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는 세르게이가 주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그가 이 모든 일의 주범 같진 않았다.

물론 드러난 정황이나 상황으로 보면 그리고 추격한 결과에 따르면 세르게이가 모든 일의 한가운데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확인된 타릴 제도의 자료 조작이나 누락은 상황이 달랐다.

한발 앞서서 달아났던 과거와 달리, 모든 흔적을 조작하는 일은 국제적인 테러리스트가 벌이기에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건 테러리스트라는 위명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마어마한 인맥이 있어야 하고, 그 인맥에게 쥐여 줄 막대한 자금도 있어야 했다.

즉, 세르게이와 동급인 공범이나 더 윗선인 주범이 따로 있다고 봐야 했다.

물론 세르게이도 러시아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고 기득권 집안 출생이지만, 그걸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는 공범보다는 주범에 무게를 뒀다.

남중국해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미사일을 구입하고 실험한 데다가 나라 여럿을 건드릴 정도의 힘 있는 자라면 세르게이를 아래에 두고 부릴 테니까.

‘보고하고 지시받은 정황이나 물적 증거, 아니면 윗선의 존재를 포착할 수만 있다면…….’

그 생각 끝에 로버트가 지원할 수 있는, 가용 가능한 인력을 떠올렸다.

G&G Corp의 다른 용병들 그리고 동유럽에 있는 대외협력국 위장 요원들까지.

큰 전력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만약에 상황만 확실하다면, 1티어 특수부대인 데브그루나 델타포스, ISA(Intelligence Support Activity)도 보낼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속이 미군인 만큼 걸리게 되면 러시아가 분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지만, 증거만 확실하다면 당연히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좀 더 크지만, 세르게이가 카마르니아에 있을 확률도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성과를 낼 수도 있었다.

* * *

카스피해 해변을 접한 레스토랑 앞.

레이첼이 검은 승용차들 옆으로 천천히 차량을 세우는 사이, 무전으로 제이크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여기는 2호차, 전원 하차 준비.

“1호차, 수신 양호.”

주차 중인 레이첼 대신 짧게 대답하면서 전면과 측면의 차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질 장소였다.

UN OCHA 조사 팀과 지역 국회의원들이 만나서 식사하는 자리였는데, 다 먹을 무렵에 괴한들이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물론 플레이 했던 게임과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

내가 여러 건을 해결하면서 카마르니아도 전보다 더 빨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같았다.

UN OCHA 조사 팀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약속, 눈 날리는 도로까지.

플레이 했던 장면에서 본 건 진눈깨비가 아니라 함박눈이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모든 게 똑같았다.

시네마틱 영상으로 봤던 대외협력국의 수작이나 세르게이의 나쁜 짓도 여전할 거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길 건너편의 흰색 닛산 차량.

‘그대로구만, 그대로야…….’

저 차량은 전투의 시작이 되는 일종의 정찰대였다.

우리의 레스토랑 입장을 보며 병력을 부를 거고, 거기에 합류해서 덤벼들 예정이었다.

이에 닛산 차량에 대해 무전을 치려던 찰나, 게임에서도 그랬듯 제이크의 목소리가 전파됐다.

-여기는 2호차, 전원, 맞은편 도로의 흰색 닛산 차량 주의하면서 하차하도록.

“1호차, 수신 양호.”

짤막하게 답하면서 내렸다.

다행히 지금 덤벼들진 않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나타날 예정이었는데, 어느새 제이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인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세요. 고개 돌리지 말고.”

가이드를 포함한 7명의 UN OCHA 조사 팀이 제이크의 살벌한 눈짓을 따라 서둘러 들어간 뒤.

레스토랑 내부의 안전을 파악하자마자, 제이크가 바로 무전을 보내왔다.

-1호차, 정문 확보하고, 3호차, 후문 확보해.

“1호차, 수신 양호.”

짤막하게 답하면서 레이첼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정문과 가까운 테이블.

단단한 기둥 뒤에 앉아서 창틈으로 바깥을 넘겨다봤는데, 아직까지 흰색 닛산 차량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투박한 인상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봐도 무슬림들이었다.

지원 병력을 불러서 여유가 넘치는 건지, 놈들이 담배를 물고 이쪽을 쳐다보기에 관련 내용을 무전으로 알릴 무렵.

나와 다른 쪽 창을 보던 레이첼이 미간을 찌푸렸다.

“리… 확실하진 않은데, RPG를 본 것 같네요.”

“RPG?”

“뒷좌석 문이 열릴 때, 등받이에 기대어 놓은 것처럼 보였어요. 탄두도 꽂은 것으로 보이고요.”

“…….”

AK-74 같은 총기가 아니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레이첼 역시 제이크처럼 눈썰미가 좋은 대원이었다. 특히나 뭘 찾아보고 관찰하는 데 이골이 난 국토안보부와 CIA를 거쳐 온 수재.

그녀가 의심했다면, 99%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다만, 내 기억에는 RPG-7이 없었다.

5.45㎜탄을 쓰는 AK-74와 넓적한 마체테로 무장한 광신도 놈들과 한바탕 싸우는 게 내가 아는 시나리오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씨팔, 난이도가 슬슬 빡세지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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