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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35화 (35/185)

35화

작전상 1호차로 부르게 된 맨 앞 차량에 나와 레이첼이 나란히 앉았다.

나는 반응속도가 좋은 데다가 사격술이 가장 빠르고 정확해서, 레이첼은 찰리 팀의 주요 행로는 물론이고 각국 상황을 빠삭하게 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자리도 쉽게 정해졌다.

난 적 제압을 위해서 MP7 기관단총의 총구를 내린 채 조수석에 앉았고, 레이첼은 직접 길을 찾아가야 하니까 운전대를 잡았다.

부아아아앙─!

어느새 닛산 SUV의 엔진음이 올라가면서 가속이 붙고 몸이 등받이에 부딪히듯 밀렸다.

금세 큰 도로로 들어선 차량이 달려 나가는 사이.

-1호차, 여기는 2호차.

인이어 무전기를 타고 나와 레이첼을 호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걸하고 무거운 제이크의 음성이 바로 이어졌다.

-차량 속도 유지하고, 변경 시 통신 바람, 이상.

“찰리 하나, 수신 양호.”

내가 대신 답하고, 레이첼과 눈을 마주쳐서 수신했는지 확인했을 때였다.

“저기…….”

뒷자리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괜찮은 거죠?”

뒤를 돌아보자, 한 탑승객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묻고 있었다.

UN 로고가 프린트된 하늘색 모자를 쓰고, 연하게 화장했는데도 미모가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통성명도 안 했지만, 누구인지는 잘 알았다.

알 자마쉬에 있을 때부터 경호 대상 리스트를 받아서 달달 외운 덕분이었다.

이름은 마리아 벨로아.

실무 조사관 중 한 명으로 20대 후반의 여성이고, 콜롬비아 출신의 혼혈 인종 메스티소(mestizo) 중 한 명이었다.

그녀를 잠깐 보다가 가볍게 턱짓했다.

“벨트부터 하세요.”

“…아, 네.”

주춤한 마리아가 벨트를 당겨 끼워 넣는 듯 부스럭거리더니, 곧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쨌든 이제 괜찮은 건 맞죠? 총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아직 모릅니다. 소리도 카마르니아 쪽에서 들린 것이라서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마르니아까지 한 시간은 가야 하는데… 얘기는 어때요?”

계속해서 창가를 경계하면서, 그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세요.”

“그럼 인사부터 해요. 아까 급해서 못 했잖아요. 이름이 뭐예요? 나는 마리아 벨로아예요.”

“이강태입니다.”

“어머, 한국인이에요?”

“네.”

“정말 반가워요, 내가 한국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특히 K팝이요. BTS, 블랙핑크, NCT, 잇지…….”

재잘재잘 이어지는 말에 뒤를 쓱 봤는데, 꽤 신기했다.

총성에다가 폭음까지 들렸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하늘색 UN 로고가 박힌 모자와 조끼만 아니었다면, 남녀 넷이서 드라이브라도 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그런 건 잘 모릅니다.”

다시금 전면 차창을 보면서 짧게 답했다.

마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건 뉴스에 나올 때나 들어 봤을 뿐.

방금 읊어 댄 걸 다시 따라 말하는 게 헷갈릴 만큼, 잘 알지 못했다.

그사이에 마리아가 무슨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이 노래 들어 본 적 없어요? 한국에서도 유명하잖아요? 아니에요?”

“유명할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라니… 다른 한국인들은 다 안다고 하던데,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팝 가수는 누구예요?”

“말해 줘도 모를 겁니다.”

전면과 측면을 번갈아 살피며 짤막하게 말하자, 금세 뒤통수로 말이 날아왔다.

“말해 보세요. 난 한국에 대해서 꽤 잘 알거든요.”

“김정민, 임재범, 쿨, 윤도현…….”

“자, 잠깐만요. 천천히 말해 봐요, 중간에 쿨은 뭐예요?”

“뭐긴, 가수죠.”

“아니… 이름이 쿨이에요?”

“네, 찰리(CHARLIE), 오스카(OSCAR), 리마(LIMA).”

“…….”

그제야 뒷좌석이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핸드폰으로 검색이라도 한 건지 명랑한 목소리가 금세 돌아왔다.

“와, 28년 전에 데뷔한 가수잖아요. 당신 나이보다 많은 거 아니에요? 아, 맞다. 리, 당신은 나이가 몇이에요? 25? 26?”

“29입니다.”

“오, 훨씬 어려 보이네요! 그럼 그전에는 무슨 일을 했어요? 군인이었어요?”

“네.”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 모델 일 같은 건 안 해 봤어요?”

“네.”

“그럼 군대에서도 인기가…….”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잇던 찰나.

“대화는 나중에 하죠?”

운전하던 레이첼이 목소리를 냈다.

옆에 앉은 내 쪽과 뒤쪽으로는 눈짓도 없이 전방이나 사이드미러, 백미러만 간간이 확인하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는 선두 차량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를 맡고 있어요. 그렇게 말을 걸면 집중하기 어려울 거예요.”

“이미 리는 앞만 보고 있는데… 집중하기 어려운가요?”

대답하던 마리아가 말머리를 돌려 묻기에 계속해서 경계하며 답했다.

“아뇨, 이상 없습니다.”

예쁜 여자가 말 건다고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고, 정말로 신경 쓰일 만한 게 없었다.

혹한의 속리산에서도 비트에 몸을 반만 숨겨 놓고 식사하며 경계했었다.

그에 비하면 히터 켠 조수석에 앉아서 대화하며 경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계속해서 뒷좌석에서 말이 이어졌다.

“그럼 얘기 계속해도 되죠? 아니면 혹시 둘이 연인 사이인가요?”

반사적으로 레이첼을 봤는데, 여전히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불쾌한 건지, 창피한 건지 귀가 좀 불그스레해진 것처럼 보였는데,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뇨, 내 운전에도 방해돼요.”

“흐음, 알겠어요.”

계속 말하려던 것 같은데, 레이첼의 불쾌함을 읽은 건지 마리아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왠지 좀 불편한 고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마르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 * *

3대의 UN 차량이 천천히 멈춰 섰다.

카스피해 앞에 지어진, 카마르니아의 유일한 특급 호텔 앞 주차장이었다.

아치형 정문이 열리면서 호텔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 나왔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UN 조사 팀 여러분. 불편한 게 없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자, 바로 객실로 가셔서 짐부터 푸시죠.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아주 정중하고 밝은 모습의 환대였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실무 조사관, 마리아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호텔 시설이 나빠서, 혹은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 좋다는 게 문제였다.

당연히 사기업이 지었다면 좋든, 안 좋든 상관없겠지만, 이건 그렇지 못했다.

나랏돈이 들어갔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국가 경제가 튼튼하면 모르겠으나, 카마르니아는 최빈국에 준하는 개발도상국이었다.

돈을 줘 가면서 호텔을 지으면 안 됐다. 그만큼 굶어 죽고 질병으로 죽는 이들이 많아질테니까.

쉽게 말해 혈세로 부린 사치.

주변과 비교해도 이질적일 만큼 호화로웠다.

‘설계 규모를 줄이고, 남은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지…….’

그렇게 호텔 내부의 값비싼 장식물을 보면서 이동하다가 움찔했다.

그녀만이 아니라, 모두가 주춤했다.

쿠우웅―!

투다다다다다다당―!

폭음과 함께 총성이 진동처럼 호텔을 떨게 만든 탓이었다.

“……!”

제이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코앞에서 들린 소리 같진 않아도, 그리 먼 곳에서 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즉, 여기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

이에 후미에 있던 마커스와 호세도 반사적으로 뻥 뚫린 복도 뒤쪽을 돌아보며 경계할 때였다.

매니저가 상황을 풀어 보려는 듯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소리가 좀 큰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달에 몇 번 있는 흔한 일입니다. 그리고 경찰서도 여기서 50미터만 가면 있고, 소방서도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저희 호텔은 아주 안전한…….”

그렇게 객실에 도착할 때까지, 매니저는 총소리를 덮으려는 듯 쉼 없이 떠들어 댔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시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객실 투숙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제이크가 길어지는 말을 자르며 물었고, 매니저가 잠깐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현재 계시는 층에는 손님분들 외에 다른 투숙객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아래는?”

“아래에는 세 팀이 있습니다. 605호, 607호, 611호인데… 그 외에는 개인 정보라서…….”

“그건 됐고, 호텔 도면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 도면이요?”

“네.”

“관리실에 가 봐야 합니다만…….”

“그럼 같이 내려가시죠.”

제이크가 움직일 듯하다가 뒤에 있던 남은 인원을 돌아봤다.

“둘씩 진입해서 객실 수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팀장.”

마커스가 단단하게 답하고 나서, 찰리 팀이 기계처럼 방문 좌우로 나누어 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이크가 매니저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는 관리실로 갑시다.”

“아… 네.”

매니저가 주춤하며 대답하고, 제이크가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다른 팀원들이 마주한 두 방으로 진입하며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 * *

방 수색을 마치고 UN 조사 팀이 남녀로 나뉘어서 각자의 짐을 정리하는 사이.

나를 비롯한 동료들도 군용 배낭을 풀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게 될 레이첼과 마커스가 내 짐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이사 왔느냐고, 과하지 않느냐는 말들.

그럴 만했다.

작전 기간은 9일밖에 안 되는데, 짐은 완전 군장 이상으로 많이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갈아입을 의류는 물론이고 생필품과 각종 통조림 같은 식품, 수하물로 보낼 수 있는 다양한 군 장구류까지.

반면에 마커스와 레이첼이 가져온 건 내 것의 절반도 채 안 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 특급 호텔에 머무는 건 9일로 끝나지만, 그게 9일 뒤에 떠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추가 임무가 생기지…….’

메인 스토리가 그랬다.

여기서 세르게이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제이크와 레이첼이 떠나지 못할 거고, 덩달아서 나머지 팀원들까지 함께 머물 예정이었다.

아마도 대략 2개월 이상.

물론 G&G Corp나 다른 단체를 이용해서 군 장비나 추가 물자를 지원받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UN OCHA 조사 팀조차 공항 비행편이 정지되어서 차로 들어온 상황이었으니까.

차라리 내가 다 가져오는 게 나았다.

이에 짐 정리를 하는데, 치익 소리와 함께 제이크의 음성이 수신기를 타고 넘어왔다.

-1호차, 3호차. 여기는 2호차. 외출 준비 다 됐는지 답변 바람.

“여기는 3호차, 3분 안에 마무리하겠음.”

-수신 양호. MP7은 복도에서도 노출되지 않게 외투로 잘 가려서 나오도록, 출발 3분 전.

“출발 3분 전, 확인.”

마커스가 대답하는 사이, 서둘러 마무리를 했다.

새까만 긴 코트를 걸쳐서 병기와 전술 조끼를 모두 가렸고, 선글라스까지 착용해서 내 시선까지 감추었다.

“오우, 리! 근사한데?”

마찬가지로 코트를 입은 마커스가 날 보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언뜻 본 레이첼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한 뒤.

“자, 그럼 나가지.”

부팀장인 마커스가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나가면서 코트 안의 총기 위치를 고쳐 놨으며, 코트의 모든 단추는 풀었고, 한 손은 코트 자락을 슬쩍 잡았다.

당장이라도 옷감을 걷어 내고 총을 잡을 목적으로.

알 자마쉬에서도 그랬듯, 오늘도 첫날부터 총을 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실전이 될 예정이었다.

첫날에 흉터가 생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집중했다.

오늘도 전장 한복판으로 나가야 했다.

당연하게도 아주 순조롭지 않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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