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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34화 (34/185)

34화

그날 저녁 무렵, 레이첼은 국무부 대외협력국으로 보낼 강태의 복귀 보고서를 작성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강태가 제이크와 함께 복귀했고, 외관상 특이 사항은 없었으며, 주변 관계 역시 이전과 동일하다는 사실 정도.

그렇게 엔터를 치던 레이첼이 멈칫했다.

강태의 모습 하나가 기억의 편린처럼 남아서 자꾸 의식되는 탓이었다.

큰 키, 아시안 계열의 미남, 탄탄하고 날렵한 몸 같은 외적인 매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모두 충분히 호감 가는 요소지만, 생각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새 명령서가 나왔음을 알리고, 함께 봤던 그때였다.

정확히는 당시 강태의 얼굴.

‘리는 카마르니아 공화국 발령을 아무렇지 않게 봤었어.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첼로서는 신기하다 못해 이상한 광경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강태의 반응을 보면 마냥 허황된 상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욕하는 호세의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레이첼도 욕을 한 건 아니지만, 복귀하자마자 받은 명령서에 미간을 찌푸렸고 한숨을 뱉었다.

반면에 강태는 달랐다.

마치 작전할 때와 같이 흥분하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바라봤었다.

‘평소에도 크게 놀라거나 흥분하진 않지만… 이 뭐 같은 명령서를 보고도 멀쩡할 수가 있다구?’

레이첼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휴가 복귀하자마자 새 임무 명령서가 나왔고, 그게 심지어 알 자마쉬의 일보다 더 어려운 작전이었다.

분명 제이크조차 인상이 굳었을 게 분명했다.

임무에 불만을 품지는 않더라도, 카마르니아가 험지라는 사실을 잘 알 테니까.

근데 강태만 아니었다.

이에 보고서 작성을 고심하던 그녀가 한 줄의 기록으로만 남겼다.

상당히 차분했었다고.

속마음이 어떤지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쓸 수 있는 건 추측이 전부였으니까.

다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앞으로 강태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료애, 전우애… 그런 게 필요해.’

지금까지 강태를 관찰한 결과가 그랬다.

남녀 사이의 이성적인 관계로는 강태와 가까워지기 어려워 보였다.

그보다는 제이크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분석해서, 자신 역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전장을 함께하는 동료로서의 관계를 더 확고히 해야만 했다.

마땅히 요원으로서 선두에 서야 했다.

가능하다면 남자 요원처럼 모든 걸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체적인 차이가 명확했으니까.

더구나 델타 출신인 제이크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 보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CIA에서 부분적인 현장 요원 역할을 수행하고, 미국 내 많은 군사 교육을 수료했으며, 기본적인 특수전 전술도 익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총탄 앞에 피 흘리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게 국가적 사명이라면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해내기로 작정한 게 바로 그녀였다.

‘이 상황에서까지 리를 떠올릴 줄은…….’

레이첼은 임무인지 아닌지 모를 생각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집합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카마르니아로 가기 전, 찰리 팀의 임무 확인과 분담 회의였다.

* * *

한숨 자고 나서 찰리 팀 컨테이너로 불려 가자마자, 마커스가 종이 여러 장을 건네줬다.

“이게 뭐… 어? 마커스! 부팀장 됐어?”

얼핏 본 그의 직책이 부팀장으로 표시되어 있기에 한 말이었다.

생각보다 좀 늦은 조치였다.

전 부팀장이었던 스캇이 배신으로 잡혀간 지 벌써 두 달이나 된 상황이었으니까.

“왜 이제야 달아 줬대? 직책 수당 안 주려고 그런 건 아닐 거고…….”

“아마 너 때문이었을 걸.”

마커스가 쓰게 웃으며 답하기에 멈칫했다.

“나? 내가 왜?”

“회사에서 너한테 부팀장을 달아 주려고 고민을 했던 것 같아.”

“아니… 무슨 소리야? 그건 팀장이 정하는 거 아니야?”

설마 해서 제이크를 바라봤지만, 그는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동시에 마커스가 설명하듯 답했다.

“최종 결정은 회사에서 해. 수당도 따로 나오는 일이잖아. 부팀장은 면접과 테스트를 봐야 해.”

“아… 그런 거였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에 멈칫했다.

라레플에서는 당연히 마커스가 부팀장이었으니까.

그래서 신경을 안 썼다. 플레이 했던 그 어떤 장면에서도 결정하는 면접 과정 같은 건 나오지 않기도 했었고.

그 생각을 가벼이 넘기려던 때였다.

문뜩 딴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됐으면……?’

완장을 차거나 추가 수당을 바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짧게 말해서 유사시 대비.

스토리가 틀어져서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부팀장이 되면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예컨대 팀장인 제이크와의 연락이 끊어지거나 고립된 상황에서의 대처.

마커스가 정석으로 나간다면, 내가 지름길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온갖 지름길로 임무를 해결해 왔고, 마커스 역시 내 의견을 존중해 주긴 하지만.

언젠가는 대립하거나 고민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할 1초, 2초의 의사 결정이 생사를 가를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생각을 하던 무렵, 마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너도 관심 있었나?”

어느새 마커스가 검은 피부에 대조되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기에,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 많이 해라. 아니… 깍듯하게 대우해야 돼?”

“흐흐, 편한 대로.”

“그럼 편하게 하지, 뭐. 어쨌든 늦게나마 축하하고… 자, 이제 회의나 합시다.”

슬쩍 말을 돌렸는데, 잡담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작전이 위험하거나 심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건 언급되지도 않았다.

회의 중에 나오는 자료가 너무 많아서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카마르니아의 국방, 정치, 문화, 복지, 언어, 사회, 종교 등등.

온갖 게 나와서 기억하기도 바빴다.

원래 라레플을 할 때는 그저 배경으로 잠깐 지나가는 거라서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볼 생각도 안 했었다.

어차피 가상의 나라라서 자료 역시 따로 없었고.

한데 이 안에는 다 있었다.

심지어 강사 역할을 맡은 레이첼이 30분 넘게 설명한 게 고작 겉핥기가 될 만큼 많았다.

‘존나 많네, 니미…….’

왜 캅카스 최악의 전장인지 알 만큼 온갖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레이첼도 이를 안다는 듯 설명을 마치면서 당부했다.

“나머지는 출발 전까지 숙지하세요. 특히 국방과 종교, 사회 부분은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UN에서도 특별히 당부했어요.”

“…….”

휴가 내내 체력 훈련과 사격 훈련을 했더니, 여기서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게 될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작전 얘기를 하지.”

말을 하는데 그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일종의 제한을 두는 바람에 플레이 난이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이었다.

곧 제이크의 얘기가 이어졌다.

“우선 UN OCHA 현장 조사 팀과의 협의에 따라, 주무장은 MP7을 사용하기로 했어.”

MP7은 일반 돌격 소총에 비해 유효 사거리가 절반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기관단총이었다.

성능은 좋으나, 위험 지역에 갖고 다니기에는 어려운 물건.

듣던 호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왜 그걸… 아니, 그건 재고도 없잖습니까? MP5도 아니고…….”

“동유럽 지부에서 5정을 가져오기로 했어. 부무장은 글록 17이야.”

“무슨 그딴… 이유가 뭡니까? 설마 돌격 소총이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평화주의자들이 개소리라도 한 겁니까?”

“잘 아는군.”

제이크가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계속해서 물었던 호세가 인상을 썼다.

“제기랄, 아주 권총만 착용하라고 하지. MP7은 왜 허락했답니까?”

“원래 권총이었어.”

“예?! 그러면 MP7도 협의해서 받아 냈다는 말입니까?”

“맞아, 일단 다음 페이지부터 봐.”

제이크가 호세의 놀란 목소리를 짧게 잘라 내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다게스탄의 마하치칼라 공항에 이틀 전에 도착해서 대기할 거고, UN 조사 팀이 내리는 순간부터 이동 경호를 하게 될 거야. 차량은 B4 레벨의 SUV 3대로, 조사 팀 인원은 총 6명…….”

그 뒤로 업무 분장이 쭈욱 나왔다.

차량 이동부터 하차 후 대열, 야간 경비, 불침번, 주간 대기 및 긴급 상황까지.

서류에 인쇄된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인 전술적 용어와 상황, 예시를 들어가면서 설명한 것이었다.

그 끝에 제이크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리, 중요한 건 너야. 네가 항상 선두에 있어야 하고, 상황 발생 시에는 가장 먼저 반응해야 해.”

내가 부팀장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 쓰임을 정확히 아는 것이기도 했고.

“예, 선조치 후보고라는 말이죠?”

“그래, 유사시에는 일일이 확인 같은 걸 받을 필요 없어. 뭐가 됐든 내가 커버해 줄 테니까.”

그의 단단한 대답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 * *

러시아, 다게스탄 마하치칼라 공항.

제이크가 ‘UN OCHA 경호 팀 G&G Corp’라고 인쇄된 A4 용지를 들고 기다리길 잠시, 곧 하늘색 모자나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인종에 남녀 성별까지 균등한 6명의 인원.

누가 봐도 약속된 UN의 OCHA 조사 팀이었다.

그리고 척 봐도 책임자로 보이는 50대의 백인 사내가 제이크 쪽으로 걸어왔다.

“방금 나하고 통화했던 사람이요?”

“맞습니다, 오늘부로 OCHA 경호팀장을 맡게 된 제이크 러셀입니다.”

“오호, 목소리 들어 보니 맞네. 편하게 존이라고 부르시오. 내가 사전 조사 팀 책임자요.”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고, 존이 바로 공항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저게 우리 차인가 보군.”

흰색 배경에 ‘UN’ 글씨가 프린트된 SUV 3대를 알아보고 한 말이었다.

제이크 역시 맞다고 대답한 뒤.

조사 팀이 공항을 나오자, 3대의 차 문이 동시에 열렸다.

덜컹.

맨 앞에서 강태와 레이첼이 함께 내렸고, 중간에서는 호세, 맨 뒤에서는 마커스가 내렸다.

각자 MP7의 총구를 아래로 한 채, 맡은 바 위치에서 경계하는 모습.

존이 그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흐흐, 여기도 우리하고 비슷하구만. 인종에 성별까지… 아니지, 무기를 들고 있으니, 꼭 액션 영화 속 주인공들 같소.”

그 말대로였다.

조금 다르기는 해도, 제이크의 경호 팀도 UN 조사 팀처럼 인종과 성별이 다양하기 때문이었다.

개중 맨 앞에서 경계하던 강태가 그 말에 쓰게 웃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맞혔네.’

라레플이 원래 게임이긴 했으나, 영화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한 때, 영화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연이나 스토리가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라스트 레드 플래그라는 제목도 그대로 사용했었다.

당연히 공산권 국가에서는 팔리지 않았었고.

이내 공항 입구에서 조사 팀과 경호 팀 간의 간단한 인사가 오갈 때였다.

투다다다다다─!

꽤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연발로 갈겨 대는 소리.

방향은 카마르니아 공화국 국경 쪽이었다.

인사하려던 직원들이 움츠러드는 사이, 연한 폭음과 함께 진동까지 전해졌다.

쿠웅─

“전원 탑승!”

제이크가 소리쳤고, 직원들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그사이에도 제법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마치 OCHA 조사 팀을 환영하듯 그리고 겁주듯.

아직 카마르니아 공화국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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