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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33화 (33/185)

33화

며칠 뒤, 미국 워싱턴 D.C.

진행 중인 세르게이 추적 건으로 차관 보고까지 마친 대외협력국 국장, 로버트 엔더슨이 사무실로 돌아와 새 보안 메일을 수령했다.

발신자는 제이크.

피곤한 눈을 했던 로버트가 얼른 자리에 앉았다.

과중한 업무 가운데 흥미를 갖고 기다리는, 몇 안 되는 보고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딸깍.

메일이 열리면서 바라던 이름이 나타났다.

이강태.

세 글자를 보는 순간, 그의 입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순수하게 강태의 활약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저격수 교육도 없이 이뤄지는 테스트라서 더욱더 반가운 것이었다.

아마 이 영상으로 강태의 재능을 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터.

“자… 어디…….”

들뜬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로버트가 첨부된 영상을 작동시켰다.

스코프 영상이 그대로 남긴 녹화본이 나오길 잠시.

“……!”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준하고 격발하는 과정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탓이었다.

소수점 이하의 초 단위.

로버트의 고개가 좌우로 절레절레 돌아갔다.

‘…허, 이 정도면 전자동 사격통제장치나 다름없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조준과 격발이 이뤄지는 군용 시스템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스코프의 움직임도 기계와 흡사했다.

조준하기까지는 렌즈의 흔들림이 꾸준한데, 어느 순간에 정지되듯 멈추면서 동시에 격발도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로버트도 이걸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묻고 싶었는데, 마침 그 내용이 보고서에 있었다.

[…‘따지자면 타고난 겁니다’라고 스스로 말함. 테스트를 함께한 스나이퍼 브래드도 강태를 사격의 천재라고 평가함.]

타고난 천재, 로버트가 그 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선례는 있었다.

온갖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맨해튼 계획을 비롯한 군사 분야에 몸담은 대표적인 예시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존 폰 노이만.

현대 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로, 아직까지도 군사 분야에서 회자되는 위인이었다.

수십, 수백 명의 과학자도 해결하지 못한 각종 군사기술을 발전시켰고, 또한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

그건 당연하게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강태가 선보인 조준과 격발처럼.

물론 존 폰 노이만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했고, 강태는 특전사 기록에서 돋보이는 게 없었지만.

중요한 건 확인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강태의 몇 줄짜리 특전사 기록은 그에 비하면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위조를 뜻하는 게 아니라, 다분히 형식적일 가능성이 커서 그랬다.

어쩌면 수직적이고 폐쇄성이 강한 한국군이 강태를 평범한 군인으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주 분명했다.

‘리는 근접전 최강의 전략 병기이면서, 동시에 원거리에서도 활약 가능한 스나이퍼가 됐어. 한마디로 죽음의 사신이 된 셈이지.’

그 생각을 끝으로 로버트가 미소를 머금었다.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나온 제이크의 문장 덕분이었다.

[영주권을 권유했고, 휴가 복귀 시에 회사에 영주권 발급 대행을 신청하겠다고 함.]

영주권 권유 방법이 조금 우려되긴 했지만, 성공적이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 강태와 G&G Corp 찰리 팀의 관계가 끈끈했고, 그중에서도 제이크와의 관계가 돈독하니, 이 보고서는 믿어 볼 만한 내용이었다.

물론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레이첼.

국토부와 CIA를 거쳐 온 엘리트 자원인 그녀에게 강태와의 관계 발전을 지시했는데, 의미 있는 결과가 없었다.

휴가 직전까지 대화하는 빈도가 늘긴 했으나, 무의미한 말일 뿐.

‘레이첼이 생각보다 부진한데… 이제 한 달째니 좀 더 지켜봐야겠군.’

가장 중요한 건 자연스러운 관계였다.

마음 같아서는 강태에게 국가관 세뇌를 시켜서 시민권까지 빠르게 발급해 주고 싶었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강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대인 전략 병기였으니까.

어쩌면 존 폰 노이만이 그랬듯, 강태 역시 업계에 한 획을 긋게 될 위인이 될지도 몰랐다.

가능한 조심히 다뤄야만 했다.

* * *

포틀랜드의 ‘더 나인스’라는 특급 호텔에 방을 잡고, 아침마다 제이크의 괴물 같은 픽업트럭을 타고 사격장으로 이동했다.

그게 남은 휴가 일정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저녁에는 호텔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지만, 그건 한두 시간에 불과하고 사격을 한나절 정도 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가면 점심 때까지, 점심에 가면 저녁 때까지.

장비 대여 비용을 제외하고, 탄약값으로만 매일 수백 달러를 소모했다.

낭비 같기도 했지만, 내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여러 총기를 다뤄 보고 다양한 사격 코스를 경험한다는 장점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며 격발하는 손맛부터 좋았는데, 심지어 총기와 코스마저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정말 많이 했던 게 사격이지만, 그것하고는 비교가 안 됐다.

알 자마쉬의 훈련 센터나 연습용 사격장도 마찬가지였고.

의무감 비슷한 것 때문인지 그때의 사격은 재미가 없었는데, 지금 하는 건 전혀 다른 실사판 FPS였다.

사격을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

“크으… 이거지.”

-같은 감탄을 매일 했다.

첫날에 브래드가 가져온 저격 총을 쓴 뒤로, 다음 날부터는 사격장에서 대여해 주는 온갖 소총 종류를 섭렵했고, 이어서 산탄총과 권총을 씹고 뜯고 맛보듯이 즐긴 덕분이었다.

당연히 사격장에 있는 탄약도 종류별로 싹 다 사용해 봤고.

그렇게 마지막 사격을 마친 날이었다.

사무실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고 계산대의 사장에게 인사를 하는데,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저요?”

“아, 네. 방금 사격하시는 걸 봤는데… 너무 잘하셔서 인사나 나눌까 하고요.”

사격장에서 잠깐 얼굴만 본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악수를 청해 오고, 짧게 받아 주는 사이.

스윽, 제이크가 나타났다.

“용건이 뭡니까?”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무겁게 깔리어 나올 무렵.

내 앞에 서 있던 사내가 그 포스에 눌린 건지,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네? 아, 저는… 그냥 인사를 하려던… 아으, 죄송합니다…….”

마치 쭈그러드는 것 같은 모습.

다가왔던 사람이 결국 위축되는 것처럼 물러났다.

그리고 제이크가 날 돌아봤다.

“무슨 일 있었나?”

“아뇨, 그냥 인사하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서 물어봤다.

내가 모르는 비밀 요원이나 의심 대상인가 싶어서.

“혹시 아는 얼굴이세요?”

한데 주변을 휙 둘러본 제이크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예? 모른다고요?”

“그래, 번거로워지기 전에 미리 차단할 뿐이야.”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수상하든, 수상하지 않든 간에 굳이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러는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내가 그냥 다양한 총기만 사용한 게 아니라, 여러 시도를 하느라 구경꾼이 조금 생긴 탓이었다.

게임 스트리머나 BJ들이 했던 고인물 플레이의 일종.

예컨대 kar98k로 CQB 근접 교장에서 전술 사격을 한다던가, 스미스&웨슨 모델60 리볼버로 100야드 이상의 거리에서 저격하는 것들을 좀 했었다.

그저 재미로 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명사수 특성에 영향은 없는지 등등을 체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꽤 성공적이었다. 재장전의 과정이 숙련되지 않아서 좀 버벅댔을 뿐.

그 생각에 조용히 있자, 제이크가 내게 쓱 물어왔다.

“그래서 하고 싶은 사격은 다 했나?”

이상한 짓을 더 할 거냐는 물음과 같아서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테스트하려다가 과해서 포기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영웅본색의 쌍권총.

주윤발이 그랬듯, 베레타92F 두 자루를 사용해 볼까 했었다.

어릴 때 비디오로 빌려 보면서 반했던 장면이기도 한데, 명사수의 특성이 각각의 총에 전부 적용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러진 못했었다.

그러다가는 정말 사격장 내에서 크게 소문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나중에 해 봐야지. 총 두 정 전부 특성이 적용될 것 같긴 한데…….’

그 생각 뒤로 제이크가 주차장 쪽으로 턱짓했다.

“이제 가지, 누군가 더 오기 전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제이크의 경호를 받으며 차에 올랐고, 빠르게 사격장을 떠났다.

아쉬움이 좀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특급 호텔이 아닌, 전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알 자마쉬, 플랜트 건설 현장의 경비 컨테이너.

“왔어요?”

먼저 입국한 레이첼이 담담하게 강태와 제이크를 맞이했다.

그 뒤로 새로운 가족사진을 출력한 마커스와 호세가 밝은 얼굴로 연이어 도착했다.

“이번에도 20일이 아니라, 20시간 같은 휴가였어. 리, 너는 첫 휴가 어땠어? 두 달 만에 나간 거라서 별 감흥 없었나?”

대충 옷을 갈아입은 호세가 강태의 방 앞에 기대어 물었다.

“한국은 뭐… 그냥 그랬어.”

강태가 짐 정리를 하면서 가볍게 대답하자, 호세가 제대로 물었다.

“그러니까 애인을 사귀지 않았다는 소리야?”

“애인은 무슨…….”

강태가 픽 웃으면서 대답하자, 호세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 이제 너도 서른이야. 고향에 애인이 있어야 너한테도… 아! 놀래라… 뭐야?”

말하던 그가 움찔하며 복도를 쳐다봤다.

“레이첼? 거기서 뭐 하고 있어?”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아까 무슨 소리예요? 애인?”

레이첼이 천천히 다가오면서 물었다.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방문 앞에 서서 강태를 살폈고, 동시에 호세의 입이 씰룩거렸다.

“오, 강태의 애인이 궁금한가 봐?”

“얘기가 들리길래… 한국에서 애인을 사귄 거예요?”

그녀가 어느새 진한 갈색의 동공을 빛내며 물었고, 강태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런 걸 물어보려고 오진 않았을 거고… 지휘실에서 부른 겁니까? 아니면 팀장이 호출했대요?”

“…음, 그건 아니구요.”

레이첼이 멈칫했다가 종이 한 장을 팔랑거리며 내밀었다.

“임무 발령이 새로 났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방금 복귀했잖아?”

“알아요, 나도 방금 복귀했어요.”

레이첼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자, 호세의 인상이 구겨졌다.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스타일인가?”

“직접 봐요, 농담인지, 아닌지.”

레이첼이 팔랑거리며 서류를 내밀었고, 어느새 강태도 가까이 다가가서 내용을 확인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읽어 냈다.

[카마르니아 공화국: UN OCHA(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현장 조사 팀 숙소 및 이동 경호]

곧장 호세의 입이 열렸다.

“오, 제기랄!”

호세가 비속어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카마르니아는 캅카스에서 가장 작은 전장이면서 최악의 전장이라고 불리는 나라기 때문이었다.

독립한 지 20년도 안 된 부분 승인국으로 내전 중인 데다가, 위아래로 접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군을 동원하고 있는 상황.

간단하게 말하면 알 자마쉬보다 더 위험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읽던 강태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가네.’

라레플의 메인 스토리 중의 하나이자,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시작점이 알 자마쉬라면, 중간에는 카마르니아가 있었다.

물론 오픈 월드답게 그곳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다도해인 타릴 제도로 갈 수도 있었고.

‘그러면 타릴 제도는 나중에 가나……?’

강태가 맵을 떠올리는 사이.

“가서 항의라도 해야겠어, 휴가 복귀하자마자 이딴 식으로 똥을 먹일 줄이야. 도대체 본사는 무슨 생각인 거야? 이래서 휴가를 준 건가? 빌어먹을…….”

호세가 짜증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사이.

어느새 레이첼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리다가 강태를 불렀다.

“리.”

“……?”

“혹시 그… 애인 말이에요, 진짜 생긴 거예요?”

“없어요, 없어.”

짧게 대답한 강태가 돌아서며 짐 정리를 하자,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남자를……?”

“아, 진짜… 거 자꾸 헛소리할 거면 얼른 나가요. 쉬면서 낮잠이나 때리려니까.”

“아니군요, 나갈게요.”

레이첼이 용건이 끝났다는 듯 몸을 휙 돌렸고, 짐 정리를 마친 강태도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알 자마쉬로 복귀한 당일이면서 카마르니아로 떠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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