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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31화 (31/185)

31화

판넬로 지어진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계산대와 휴게실, 화장실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부에 수백 정, 어쩌면 천 개가 넘어갈 정도로 많은 총기와 온갖 탄약 박스가 마트처럼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활한 사격장 사이즈에 걸맞은 규모.

미국이 총으로 세워졌다는 제이크의 말이 현실처럼 와닿았다.

이 정도면 동네 사격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조그만 독립부대 병기고나 탄약고 이상이었다. 알 자마쉬에 있던 임시 사격장이나 훈련 센터의 사격장도 한 수 아래였고.

“와… 이마트에서 총을 팔면 이런 느낌일까…….”

다시금 놀라는 사이.

“제이크, 정말 오랜만에 오는군!”

배 나온 사격장 주인이 제이크를 반겼고, 이어서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긴 처음 보는 얼굴이구먼, 신입 델타요?”

“직장 동료입니다.”

“아! 그럼 군인이었다는 말이군. 댁도 군인 할인해 드릴 테니까, 편하게 이용해요.”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댁들 덕분에 내가 먹고사는데.”

“아, 근데 미군 출신은 아닙니다.”

“제이크와 함께 왔으니 상관없소. 퇴역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비밀 요원으로 데려다 쓸 테니까.”

“…예?”

나도 모르게 움찔해서 묻자,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흐하하하, 농담이오, 농담. 제이크 같은 베테랑 군인을 이렇게 두는 게 아까워서 한 말이지.”

“아…….”

설마 뭘 아는 건가 싶었는데, 제이크는 태연한 얼굴로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사로와 총기, 탄약, 헤드셋, 보안경 등등의 이용 가격부터 판매 중인 총기 리스트가 빽빽이 표시된 서류였다.

보자마자, 판매 리스트에 눈이 돌아갔다.

‘사람보다 총이 더 많은 나라라더니…….’

수십 가지의 총기가 적혀 있었고, 매장에 없는 건 배달까지 받아 준다고 적혀 있었다.

가격은 비싸 봐야 2, 3천 달러였고, 보통 수백 달러 안에서 구입 가능한 수준.

당장 사고 싶은 것도 몇 개 보였다.

시원한 펌프 액션 산탄총인 레밍턴 모델 870이나 게임 단골 소총인 Kar 98k 등등.

최신식으로 개량된 현대 무기는 아니지만, 게임하면서 익숙해진 데다가 나름 로망이 생긴 총들이었다.

그 목록을 잠깐 살펴보는 사이,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나?”

“아, 예. 실제로 써 보고 싶던 게 몇 개 있습니다.”

“그럼 전부 골라 둬, 복귀 전까지 매일 올 거니까 바꿔 가면서 사용해 보자고.”

“오… 좋습니다.”

마침 반가운 말이었다.

한국에서 일주일 내내 운동만 한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 사격이 좀 더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실내가 아니라, 야외에서 하는 사격이라 갑갑함도 없었고.

더구나 장거리 사격만이 아니라, 단거리 권총 사격과 클레이 사격, 속사용 전술 코스까지 있어서 지루할 것 같지도 않았다.

현실 FPS 게임과 비슷할 터.

미소가 절로 입가에 고이는데, 다시금 제이크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려 왔다.

“혹시 사고 싶은 총도 있나?”

“당연하죠. 가격도 별로 안 비싸고…….”

“그럼 영주권을 발급받는 게 어떤가?”

“예? 갑자기요?”

갑작스러운 말에 되물었다.

영주권을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제이크가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건 레이첼이 제안할 만한 소스였으니까.

어느새 제이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영주권이 있으면 원하는 총기를 살 수 있고, 사고가 벌어져도 회사나 미국의 보호를 받기 쉽지. 취업 비자보다는 말이야.”

“아…….”

뒷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제이크가 국무부에서 시킨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는 주로 레이첼이 하는 일이었는데, 그걸 제이크가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화가 갑자기 틀어진 것 같았는데,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사고 싶은 총기도 살 수 있고, 사격장만이 아니라 생활 시설 이용도 편해질 터.

무엇보다 더는 한국에 갈 일이 없었다.

출신 부대만 있을 뿐, 알던 사람도 없는 낯선 나라가 됐으니까.

가 봤자 호텔 수영장이나 헬스장만 이용하게 될 거고, 국정원의 관심이나 받게 될 게 뻔했다.

공항에서 사과한 걸 보면 극진하게 대접해 줄 것 같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한국에 갈 생각은 없었다.

즉, 영주권이 필요한 때였다.

“복귀하는 대로 말해 볼게요.”

제이크가 원할 만한 대답을 해 주자, 그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렸다.

“좋은 생각이야, 리.”

그가 대답하는 사이, 어느새 추가 탄약 구매를 마친 브래드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 얼른 들어갑시다.”

* * *

400-1,200야드(365M-1,097M)의 장거리 사로.

브래드가 하드 케이스를 펼쳐 보였다.

동시에 지켜보던 강태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와아…….”

빤질빤질할 정도로 잘 관리된 총기 두 정이 들어 있었다.

최장거리 저격 기록을 남긴 맥밀런 사의 TAC-50과 위력이 막강하기로 유명한 바렛 M82.

“역시 대물…….”

조립 전인데도 크기가 상당해서 나온 감탄이었다.

강태가 평소에 사용하던 돌격 소총인 HK416이나 기관단총인 MP5 같은 건 별거 아닐 정도.

브래드가 태연하게 손짓했다.

“원하는 거로 고르세요.”

강태가 그 말에 두 총기를 번갈아 보다가 대답했다.

“저는 추천해 주시는 걸로 쓰겠습니다.”

“스타일이 다를 뿐, 뭐가 좋다고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아, 비교할 만한 게 하나 있긴 있네요.”

“어떤 겁니까?”

“당연히 돈이죠. 둘 중에 비싼 건 이쪽입니다. 부속과 커스텀 비용 포함해서 3천 달러 정도 더 비쌉니다.”

강태가 절로 주춤하며 되물었다.

“다해서 얼만데요?”

“각각 1만 8천 달러, 2만 1천 달러입니다.”

브래드의 손이 바렛 M82와 TAC-50을 차례로 가리켰다.

동시에 강태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한화로 따지면 총 두 자루에 5,000만원 가까이 나간다는 소리.

사무실에서 봤던 2, 3천 달러 총이 상대적으로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야투경도 그렇고… 진짜 돈으로 전투를 하는구나…….’

일전에 알 자마쉬에서 할부로 사들인 각종 장비들을 떠올리면서 새삼 돈의 위력을 체감하는 사이.

브래드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커스텀 된 거라서 좀 비싸지, 기본 총기는 반값 정도 합니다. 제 거는 특히 비싸게 한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

“아… 커스텀이라는 걸 듣긴 했는데,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몰랐네요.”

강태가 신기하다는 듯 반응하고, 이를 지켜보던 브래드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정말 저격 총을 사용해 본 적이 없나 보군요.”

“아, 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진짜 배우러 온 겁니다. 내기할 수준이 아닙니다.”

“일단은 둘 중에 원하는 걸로 골라 보세요.”

“그럼 뭐, 흔한 기회는 아닐 테니… 비싼 놈으로 하겠습니다.”

“TAC 50, 잘 골랐어요. 명품이죠.”

“제가 끝내주질 않아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 세팅 좀 도와주십쇼. 비싸서 손대기가 무섭네요.”

“하하, 알겠습니다. 같이 하죠.”

브래드가 웃으면서 강태의 총기 세팅을 도왔다.

‘진심으로 배울 생각인가 보군.’

처음에 제이크로부터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니라 놀러 가듯 사격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델타의 괴물이었던 제이크가 칭찬할 만한 실력자였으니까.

물론 따로 교육 과정이 있을 만큼 쉽진 않지만, 뭘 새로 배우거나 깨달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저격수의 소양을 기르고, 실력을 기를 뿐.

웬만한 특수부대에서 배우는 탄도학이나 풍향, 조준 원리는 근본적으로 모두 같았다.

애초에 총기 메커니즘이 똑같았으니까.

다만 저격수 교육 과정에서 특수 보직인 관측수의 역할까지 배우긴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관측경이나 핸드폰 앱으로 대체할 수 있어서 그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편차가 전자동으로 표시되고, 크리크 수정값이 알아서 계산됐으니까.

지금 브래드가 갖고 있는 수천 달러의 관측경이나 핸드폰 앱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브래드의 도움으로 세팅을 마친 강태가 견착을 해 보였다.

“자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음, 나쁘지 않네요. 지지대와 총기, 몸이 모두 고정되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저격수 과정에서 자세를 교육받긴 하지만, 결국 현장에서 필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겁니다.”

“음… 그럼 딱 맞습니다.”

어깨를 꿈틀거리면서 자세를 잡은 강태가 대답했다가,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다시 물었다.

“스코프 조준도 양안이나 단안 중에 마음대로 하면 됩니까?”

“스코프에 그림자만 지지 않으면 돼요, 대신 주안으로 보는 게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명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절차와 노하우를 모두 수행해도 맞히지 못하면 의미가 없거든요.”

브래드의 말에 강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중이 주특기긴 한데, 장거리에서 통할는지… 일단 해 보겠습니다.”

강태가 자세를 잡으면서 말하자, 브래드가 미소 지었다.

“좋아요, 옆의 관측경 화면을 보면서 해 봐요. 이게 풍속, 이건 편차 수치입니다. 그리고 스코프의 터렛으로 MIL(Milliradian: 각도의 단위) 조정할 줄 알죠?”

“네. 상하좌우, 맞죠?”

강태가 스코프에 달린 회전식 레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답하자, 브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가까운 표적부터 쏩시다, 영점 확인용으로.”

“예, 어디 보면 됩니까?”

“C3 표적, 405야드(370M)에 있어요. 확인했어요?”

“네, 보이네요. 바로 쏘겠습니다.”

“좋아요.”

강태가 말하고, 브래드가 짧게 대답한 순간.

타아아앙─!

TAC-50이 총성을 내뿜었다.

강태의 몸이 반동에 흔들린 뒤, 관측경으로 표적을 보던 브래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적에서 몇 인치 빗나가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정도는 또 쏴서 영점을 잡으면 됐다.

문제는 강태의 사격 속도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호흡을 잡을 틈도 없이 격발한 타이밍.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거리가 짧다고는 해도 다급한 전장이 아닌 이상, 원래는 호흡을 고르고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맞히면 그만이긴 하지만, 안 좋은 습관이 될지도 모를 일.

‘이건 현장에서의 습관인가? 사격 결과를 보고 말을 해 줘야 하겠는데…….’

브래드가 관찰하는 사이.

강태가 관측경을 보면서 혼자 크리크 수정을 마쳤다.

“C3, 한 번 더 쏘겠습니다.”

강태의 말이 끝나는 순간.

타아아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브래드가 뭐라고 대답할 틈조차 없이, 말하자마자 격발한 것이었다.

이어서 강태가 스코프에서 눈을 뗐다.

“이제 영점 맞았습니다.”

명중했다는 뜻.

관측경을 들어서 확인한 브래드가 멈칫했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형 정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음…….”

호흡이 부족한 습관을 언급하려고 했는데, 명중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맞네요, 다음 표적으로 넘어가죠.”

“그러면 제일 끝에 있는 걸로 해도 되겠습니까? 제 능력이 통하는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데요.”

어느새 강태가 알아서 관측경을 들여다보며 말했고, 브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G3, 1,203야드(1,100M). 표적 보입니까?”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거리였다.

400야드만 해도 멀리 표적 위치와 흙더미가 보였지만, 최장거리의 G3 표적은 빈 공간처럼 보였다.

뒤쪽으로 탄을 막아 줄 커다란 언덕만 있을 뿐.

이에 강태 역시 한참이나 관측경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터렛 좀 돌려야겠습니다.”

티디디딕, 강태가 대답과 함께 스코프의 회전식 터렛을 돌리며 편차를 수정한 다음이었다.

접안하고 표적 확인을 마친 강태가 입을 열었다.

“쏘겠습니다.”

그리고 아까처럼 방아쇠를 당겼다.

말이나 호흡은 사격하고 상관없다는 듯.

타아아아앙─!

그렇게 총성이 울려 퍼지고 3초 즈음 지날 무렵.

강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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