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9화 (29/185)

29화

“무슨 일인데요?”

“죄송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방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공항 직원이 나를 청사 사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낮은 테이블과 작은 소파가 있는, 상담용으로 꾸며진 조그만 방이었다.

보자마자 용도가 뭔지 짐작이 갔다.

대기 공간.

사무용품이나 전자기기가 전혀 없는 거로 봐서는 간단한 민원조차 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곳.

예상대로 직원의 말이 나왔다.

“계시는 동안 차라도 드릴까요?”

“기다려야 되는 것 같은데, 오래 걸리는 겁니까?”

떠보듯 물었는데, 대답이 금세 돌아왔다.

“담당이 따로 있어서요. 저도 얼마나 걸린다고 말씀드리기가 좀…….”

“담당이요?”

“아, 예. 저희가 아니라, 담당이 따로 있는데 그쪽에서 오신다고…….”

“그쪽이 어딘데요?”

“죄송합니다, 저도 전달만 받아서 정확하게는 잘…….”

“그럼 오류 같은 게 아니라, 지시가 내려온 겁니까?”

“지시는 아니고요, 여권 인식 과정에서 따로 분류가 되신 것 같아요.”

“체포된 겁니까?”

계속해서 묻다가, 마지막에는 직설적으로 확인했다.

동시에 직원이 손을 내저었다.

체포라는 단어에 깜짝 놀란 듯한 모습으로.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확인만 하는 겁니다. 간단한 오류일 수도 있고요. 저도 이 부분은 관할이 아니라서 확실하게 대답을 못 드리는데…….”

말이나 태도를 봐서는 여러모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수가 아닌 건 자명했다.

나를 데려온 실무자는 그저 아랫사람이라서 알지 못할 뿐, 뭔가가 있었다. 미행까지 벌어진 판국에 이런 우연이 겹칠 리가 없으니까.

‘…미국은 일단 아니라고 봐야지.’

감시나 관찰을 목적으로 미행을 붙일 순 있어도, 이렇게 잡아 둘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나를 잡아 두고 싶으면 시애틀을 경유할 때나 포틀랜드에 도착할 때를 이용해서 잡아 두면 됐다.

무엇보다 직전에 제이크가 오라고 전화까지 했으니, 미국이 이렇게 나올 리가 없었다.

오히려 국무부는 날 이용해 먹는 입장이기도 했고.

‘피칼하고 세르게이는 접점도 없고, 나오기에는 좀 멀었고…….’

메인 빌런은 물론이고, 그 외의 빌런들과 라레플에 등장하게 될 다른 강대국들과의 접점도 없었다.

남은 건 단 하나, 대한민국뿐.

‘국정원이겠네.’

경찰, 검찰, 법무부가 공항에 간섭하기 가장 좋은 기관들이지만, 며칠 전 미행을 생각해 보면 국정원이 가장 유력했다.

라레플 속에선 전혀 없던 경우지만, 돌아가는 상황도 대충 짐작이 됐다.

‘오자마자 이상한 데나 돌아다니고… 요원들의 미행도 의심되는 거겠지. 나를 범죄자나 정보원, 스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혐의도 아닌 의심뿐이지만, 국정원이라면 이 정도는 하고도 남았다.

내가 특전사 생활 10년을 하면서 보고 들었던 국정원 요원들의 모습이 그랬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는 데다가, 내뱉는 말들마다 명령조였던 아주 콧대 높은 부류들.

새파랗게 어린 나이인데도, 장군하고 맞먹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와 비슷한 정보사나 군 첩보부 소속 요원들도 비밀스럽고 까다롭긴 해도 그렇게까진 안 했기에, 더더욱 비교됐었다.

‘머리에 봉지부터 안 씌운 게 다행인가?’

그럴듯한 생각 끝에 마주 앉은 공항 직원을 바라봤다.

내 질문에 힘겹게 대답하고서는 내내 불편한 얼굴로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직원이 움찔했다.

“아, 필요한 거라도……?”

“담당자는 언제 온 답니까?”

“아, 잠시만요. 이동 중이라고 하는데…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럼 저도 통화 좀 해도 됩니까?”

“예? 아, 예… 근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 전화하시는지…….”

내가 어디 언론사에 제보라도 할 것 같은지, 직원이 움찔하면서 되묻기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미국에서 만나기로 한 지인한테 늦게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말 좀 해 주려고요.”

“아아… 네, 편하게 통화하세요. 저도 물어보고 금방 오겠습니다.”

직원이 자리를 비우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말했듯이 도착이 지연될 수도 있다고 알려 주려는 건데, 내 의도는 그것과 조금 달랐다.

일종의 언질을 주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제이크에게 전화해서 그 소식이 국무부에 들어가게끔.

물론 국무부가 나를 덜 신경 써서 별 조치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소식을 전할 제이크까지 무시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이크는 단순한 현장 요원이 아니라, 대외협력국 창립 멤버이자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정말로 지연될지도 모르니까 연락을 하긴 해야 했다.

국제 전화번호를 누르고, 기다리길 잠시.

곧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비행기 예약했나?

“네, 좀 전에 했습니다.”

-포틀랜드지? 도착 시각이 어떻게 돼?

“그게, 공항에서 일이 좀 생겨서요.”

-뭐? 일이 생겼다고?

그의 톤이 확 바뀌었다.

상당히 우려하는 목소리였는데, 그걸 듣고 있던 나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국무부도 반응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늦지 않게 운을 띄웠다.

“음, 제가 방금 공항에 도착했는데…….”

* * *

덜컹.

차 문이 열리면서 국제안전실장 조범용이 휘하 팀원 여럿과 함께 내렸다.

정부 상징 로고인 태극 마크와 법무부 글자가 인쇄된 카드형 신분증을 목에 걸었고, 기다리고 있던 공항 직원과 함께 곧장 이동했다.

목적지는 강태가 있는 대기실.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던 와중에 조범용이 마중 나온 공항 직원을 쳐다봤다.

“들은 얘기 있습니까?”

“예?”

직원이 주춤하자, 조범용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억류 중인 승객 말입니다. 얘기 나눈 거 있어요?”

“아…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처음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계속 물어보긴 했는데, 담당자가 따로 올 거라고 둘러댔어요.”

“다른 건?”

“음, 전화 한 통 한다고…….”

“뭐요?”

조범용이 걷다가 우뚝 서서 직원을 노려봤다.

“소지품 수거도 안 했다는 소리요?”

“그건 전달을 못 받아서…….”

그 소리에 조범용이 한숨을 뱉어 냈다.

억류 시에 소지품을 임시 압수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항의 입장이 난처해지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강태는 단순한 승객이 아니라, 범죄자나 정보원, 스파이로 의심되는 거수자였기 때문이었다.

과하긴 하지만, 정말 재수 없다면 과격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었다.

반대로 미국에 정보를 유출할 내통자일 수도 있고.

물론 미국이 혈맹국이긴 하지만, 5·16 사태 같은 역사적인 사건부터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공작을 부리고 있어서 각별히 주의해야만 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CIA가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강태는 경계해야 마땅했다.

입국하자마자 출신 부대인 제1공수특전여단 인근을 훑었고, 이후로는 호텔에 칩거해서 일주일 내내 밖으로 나오질 않고 식사와 운동만 했으니까.

이는 너무나도 수상한 정황이었다. 국정원에 온 인턴들도 지적하고 남을 정도로.

이에 조범용은 더욱 불쾌한 얼굴로 공항 직원을 바라봤다.

“후…….”

타박하려던 그가 한숨을 쉬고서는 마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전홥니까?”

“미국에서 만날 지인한테 늦어질 수도 있다고, 그거 말해 준다고…….”

“일단 갑시다.”

조범용이 말을 자르고 걸음을 마저 옮겼다.

이제 최악의 수를 가정해야 했다.

강태가 미국으로 무슨 암호를 보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의심일 뿐이고, 사실은 선량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느새 대기실에 도착한 조범용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단박에 깨달았다.

‘…뭐 하는 놈이야, 이거?’

강태가 벽에 기대어 물구나무를 선 채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유가 넘치는 태도.

일반인이라면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범용이 가만히 쳐다보는 사이, 강태가 발을 내렸다.

털썩, 지면에 착지한 뒤.

조범용을 본 강태는 엷게 웃고 말았다.

‘국정원 맞네.’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이나 서 있는 모습이 모두 군 시절에 봤던 요원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억이 10년 전의 것이긴 하지만, 그때 봤던 젊은 직원이 이제 마주한 조범용의 나이 즈음 될 테니, 오히려 정확할지도 몰랐다.

강태가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고 짐작하던 와중이었다.

우우우웅─

마찬가지로 눈을 마주하고 있던 조범용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1차장.

‘설마…….’

핸드폰 화면을 본 조범용이 급히 대기실을 나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예, ㅊ…….”

차장님이라고 말하려는데, 핸드폰 너머에서 말소리가 넘어왔다.

-조 실장, 회사로 들어와라.

국정원을 뜻하는 은어가 회사였으므로, 들어오라는 건 복귀하라는 소리였다.

조범용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차장님?”

-미 국무부에서 전화 받았다, PMC 한 곳에서 항의가 들어왔다는데…….

“지앤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기 직원이 피해 보고 있으니까 즉각 조치하고 신경 쓰라고 하는데……. 이거 무슨 말인지 알지?

조범용의 눈가가 떨렸다.

국무부가 고작 일개 PMC의 항의 때문에 연락할 리가 없었다. 설령 한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개입하는 건 말도 안 됐다.

즉, 강태에게 국무부 연줄이 있다고 봐야 했다.

그것도 30분 만에 국정원에 압력을 넣을 만큼, 굵고 튼튼한 동아줄.

범죄자는커녕, 보통의 정보원이나 스파이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즉각 조치에 신경까지 쓰라고 했으니, 한국 정부에서 건드려서 안 되는 VIP라고 봐야 했다.

‘이거… 그냥 보통이 아니라, 거물이잖어?’

그사이, 핸드폰 너머의 음성이 생각난 게 있다는 듯 급히 튀어나왔다.

-참! 설마 손댔냐? 어?!

“아, 안 댔습니다.”

-그럼 딴 건? 실수한 게 있으면 말해. 나중에 알면 시말서로 안 끝난다?

“없습니다, 방금 대면만 하고 나왔습니다.”

-후… 그나마 다행이네.

안도하듯 내뱉는 숨소리가 들린 뒤.

조범용이 그러듯 혀 차는 소리가 넘어왔다.

-쯧쯔쯔… 하필 골라도 그런 놈을 골라서……. 마무리나 잘하고 들어와.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이어서 한숨을 내쉴 무렵.

“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뒤늦게 나온 직원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는데, 조범용이 손짓으로 말을 막았다.

고심하듯 미간을 주무르던 중.

“타깃 항공권 변경한 거 수속… 아니지, 발권 언제까지야? 끝났냐?”

“곧 끝날 겁니다.”

“가서 좌석 업그레이드부터 해.”

“예?”

“활동비 긁으라고. 안 되면 비상구 자리라도 받아 와. 빨리!”

호통치듯 팀원을 보낸 그가 마른세수하면서 표정을 고쳤다.

전화로 들었듯, 잘 마무리해야 했다.

그리고 국정원 경력 20년인 조범용은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문을 연 그가 90도로 허리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착오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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