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8화 (28/185)

28화

일주일 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가정보원 본관.

회의실에 국제안전실장 조범용과 휘하 팀장, 선임급 팀원들이 모였다.

주요 안건은 입국 거수자 예방 조사.

실질적으로는 강태와 2명의 미국인에 대한 감시, 추적, 접촉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접촉의 순간과 방법이었는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에 표시된 강태의 자료 때문이었다.

[11월 3일(목)~9일(수) 호텔 내 상주]

그 밑에 적힌 상세 사항은 더했다.

강태는 가끔 레스토랑에 내려올 뿐, 주로 수영장과 헬스장을 방문했는데, 한 번 갈 때마다 네다섯 시간을 나오지 않았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식사 후에 또 가서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을 머물렀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철저하게 운동만 했다.

입국 첫날에 공항 근처 동네와 부대를 돌아다녔던 것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

안에서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확인해 보려고 투숙객으로 위장한 요원을 보내 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강태는 수영장에서는 수영만 했고, 헬스장에서는 헬스만 하면서 하루를 꼬박 보내는 것이었다.

이를 다시금 보던 조범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 뭔 운동선수도 아니고…….”

그러던 그가 한쪽에 있던 팀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투숙객으로 위장해서 영상과 녹취를 따오고, 잠깐이지만 대화도 나누었던 현장 요원이었다.

“네가 직접 봤으니까, 말해 봐. 보고서에 쓴 거 말고. 저놈 어떤 것 같냐?”

지목받은 팀원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앗, 네! 방금 하신 말씀처럼 운동선수 같았습니다. 굉장히 성실했고, 집중력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잘 안 잡히는데, 체력이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입으로 숨쉬기도 힘든 코스에서 코로 호흡하면서 페이스 조절까지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만! 누가 칭찬이나 하래? 현장에서 네가 느낀 게 있을 것 아냐, 인마!? 이상한 거 뭐 못 느꼈어?”

영상이나 녹취, 서면 기록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묻는 것이었다.

분위기든, 느낌이든, 감이든.

물론 기록으로 남기기에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경험을 쌓고 안목을 기르다 보면 자기만의 감각을 깨우치기 때문이었다.

이는 7급 현장 요원으로 임용되어 실장이 된 조범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물은 것인데, 조금 더디게 답이 돌아왔다.

현장을 떠올리듯 한참을 고민한 모습으로.

“…평범한 것 같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저희 쪽과 관련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범죄하고도 좀 거리가 있어 보였고…….”

“훈련받은 것 같진 않고?”

“군사 훈련은 받은 티가 나는데, 저희 쪽 훈련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범용이 짧게 혀를 찼다.

“쯧.”

강태 개인만이 아니라, 2명의 미국인에 대한 정보도 여전히 없고, 소속 PMC인 G&G Corp와 관련된 눈여겨볼 만한 소식도 없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접촉 계획안에 닿았다.

여러 개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중 대다수는 강태가 호텔에서 외출해야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경찰이나 택시, 여행객 등으로 위장해서 접근하고, 친분을 갖추는 방식.

다 복잡한 것들인데, 쉬운 것도 있었다.

국정원 소속임을 공개하고 호텔 안에서 만나는 방식.

‘다이렉트로 신분 다 까고 가는 게 효과는 직빵이겠지만…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내 패부터 깔 순 없지.’

아직 강태가 누군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상급자인 1차장에게 보고해야 했고, 일이 틀어지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니 각별히 주의해야 했다.

“그럼 남은 건…….”

조범용이 남아 있는 하나의 계획안을 바라봤다.

[출국 전 공항 억류의 방안]

쉽게 말해서 출국 심사에서 트집을 잡아 대기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국정원 신분을 공개하는 것만큼 빠른 결과를 내진 못하겠지만, 나열된 계획안 중에서는 아주 쓸 만한 것이었다.

실행도 어렵지 않았다.

공항 협조를 받아 직원으로 위장하는 것도 쉬운 편이고, 비슷한 작전도 여러 번 진행해 봐서 경험이 많은 덕분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강태는 출국이 지연되고, 억류된다는 불만이 있겠지만.

이 정도면 정중한 편이었다.

만만한 거수자는 대개 스타렉스부터 출동시켜서 일단 잡아 오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단순 심문을 하느냐, 압박과 협박을 하느냐, 약물을 주입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안기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그리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유구한 전통이었다.

물론 인권이니, 무슨 관계니, 따질 게 많아서 전보다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강태 역시 같은 이유로 손댈 수가 없었지만.

곧 여러 생각을 정리한 조범용이 가볍게 턱짓했다.

“공항에서 잡는 게 낫겠네, 아니면 다른 의견들 있나?”

“없습니다. 공항 억류로 작전 구체화해서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실장님.”

“잠깐만.”

조범용이 손을 들어 팀장을 불렀고,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투입 인원에 내 이름도 올려 놔.”

“예? 실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럼 직접 대면하시겠다는……?”

“너희들은 직접 만나고도 칭찬이나 하는데, 또 봐서 뭐 하게? 이번에는 박수 쳐 주고 친구 먹으려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세 시간 안에 작전 짜 와. 차장님한테 바로 보고 올라갈 거니까 서식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실장님.”

팀장의 대답을 들은 조범용이 눈을 빛냈다.

‘내가 직접 봐야지, 도대체 뭐 하는 새낀지…….’

국정원 생활 20년 차인 조범용은 직접 만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비록 무당은 아니지만, 눈빛이나 행동 같은 비언어적 표현에서도 정보를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단순한 감이나 느낌, 분위기일 수도 있었지만, 틀린 적은 없었다.

척 보면 척이었다.

강태가 훈련된 요원인지 아니면 죄짓고 온 놈인지, 미국이 아끼는 손님인지 금방 알 수 있을 터.

그렇게 회의가 일단락되려는 때였다.

“시, 실장님!”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든 팀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얼른 말을 이었다.

“타깃이 체크아웃 하고 바로 공항으로 간다고 합니다!”

조범용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필 회의 중에, 그것도 출국까지 일주일이나 남은 시점에 이러다니?

“예약은? 행선지 변경 됐나?”

“회의 전까지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공항 억류는 어떻게… 그대로 진행합니까?”

“어, 공항에 먼저 전화해. 타깃부터 잡으라고. 안 되면 수갑이라도 채우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범용이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강태의 돌발 행동으로 일이 조금 틀어졌지만, 아직 계획이 망가지진 않았다.

여전히 유효했다.

곧 만나게 될 것이었다.

* * *

호텔에 돌아온 이후로 수영장과 헬스장, 식당 그리고 방만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따지자면 수영장보다 헬스장에 더 많이 갔고, 더 오래 있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특급 체력’ 특성 때문에 체력이 힘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건지, 괴물인 제이크 옆에 있다 보니 비교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근력에 집중했다.

힘이 세면 부상병도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이고, 적과의 육탄전도 승리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게 아니어도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특전사 시절에 자주 하던 턱걸이는 물론이고, 유튜브를 봐 가면서 각종 기구 이용 방법을 익혔고, 3대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되던 날.

매일 그랬듯 오늘도 운동하고 나왔는데, 국제전화가 와 있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이크.

일이 아니고서는 전화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 자마쉬에서도 호출할 때나 전화를 했었다.

그래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화했다.

이미 게임 스토리는 틀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화를 걸고 기다리길 잠시.

-리?

“예, 무슨 일 생긴 겁니까?”

-아, 그런 건 아니야.

“예? 그럼……?”

-휴가는 어떤가? 편히 쉬었나?

“그렇게 편하지도 않고, 쉬는 것도 아니긴 한데… 나쁘진 않습니다. 특급 호텔에서 먹고 자니까요.”

-음, 그렇군.

“……?”

왜 전화했나 다시 물어볼 무렵, 제이크의 음성이 반 박자 늦게 건너왔다.

-그럼 전투로 인한 정신적인 피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저요?”

-그래, 한국에서 쉬는 동안 회복이 됐나?

“그것 때문에 한국에 온 건 아닙니다. 가 볼 데가 있어서 왔던 거죠. 제 멘탈은 뭐, 강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네 전투는 돌발적이고 화끈하지만, 그만큼 냉철하고 차분하기도 하거든. 그건 강인한 정신력이 아니면 절대 못 할 일이지. 맨 앞에서 죽음을 헤쳐 나가는 일이니까.

“하하하… 예.”

과한 칭찬에 어색하게 웃을 때였다.

-그럼 미국에 올 수 있겠나? 오리건주인데, 항공권 차액은 내가 모두 내겠네.

“예? 진짜 무슨 일 생긴 겁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되물었는데, 제이크가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런 건 아니야. 네가 스나이퍼 교육을 받고 싶어 했다길래…….

“아, 예… 아?! 설마 팀장님이 해 주시게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제이크가 지휘와 화기를 주특기로 삼고 있긴 하지만, 스나이퍼도 못할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잘할 거라고 생각됐다.

게임 속에서는 관련 내용이 전무했지만, 명색이 델타니까.

주특기가 아닌 부특기로 저격을 한다고 해도,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해낼 양반이 바로 그였다.

그게 아니어도 어쨌든 나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난 저격 총도 거의 안 만져 봤고, 주로 돌격 팀에 소속된 대원이었으니까.

한데, 내 예상보다 더한 답이 돌아왔다.

-아니, 내 후임이 도와주겠다고 했어.

“설마…….”

-그가 괜찮은 스나이퍼거든.

“…델타 스나이퍼요?”

물으면서 눈을 껌뻑거리는데, 어느새 헬스장 거울 너머의 내 눈알이 동그래져 있었다.

그와 반대로 무덤덤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 얼마 전에 파병을 마치고 돌아와서 잠깐 쉬고 있어.

“와, 씨팔, 지렸다…….”

-음?

“아, 아닙니다. 감사하다는 한국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욕을 뱉었다가 얼른 되지도 않는 변명을 댔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막 파병 끝나고 돌아온 현역 델타 스나이퍼가 저격을 가르쳐 준다니?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이었다.

호세조차 저격수 교육 과정만 수 개월을 받았는데, 그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되는 델타의 스나이퍼는 연 단위로 어마어마한 스나이퍼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중에 일부라도 맛을 볼 수 있을 터.

“바로 갑니다. 딱 대세요.”

-뭐라고?

“한국말이었는데… 지금 공항 간다는 소립니다.”

-항공료는? 차액을 말해 줘. 내가 줄게.

“에이, 아닙니다. 저 보너스 많이 받았으니까, 넣어 두세요. 대신에 후임분한테 말씀이나 잘해 주세요.”

-물론이지. 나도 네 스나이퍼 실력을 보고 싶거든.

“아, 근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부득이하게 실망을 안겨 줄 것 같았지만, 일단은 가볍게 넘어갔다.

이런 기회가 흔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 도착 시각이나 알려 줘. 내가 기다리겠네.

“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전화하길 잘했군, 네 휴가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아닙니다, 앞으로 한국에는 안 오려고요.”

-고향에? 왜?

“여긴 델타 스나이퍼가 없거든요.”

-흐흐, 농담도 잘하는군. 그럼 이따가 연락하지. 곧 보세.

뚝.

전화가 끊어지고, 바로 짐 챙겨서 체크아웃을 해 버렸다.

외국인들이 여전히 쫓아오는 것 같긴 했으나, 무시하고 갈 길 갔다.

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어차피 곧 한국을 뜨게 될 테니까.

“인천공항이요. 최대한 빨리 가 주십쇼.”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가는 길에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서 표도 바꿔 달라고 했다.

그 통화로 몇백 달러가 증발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통장에 돈도 많아서 특급 호텔에서 보름 동안 숙식을 다 해결하려고 했던 차였다.

중간에 시애틀을 경유하고 대기하느라, 이동하는 데 20시간이나 걸린다는 게 아쉬울 뿐.

그러다가 웃음이 나왔다.

‘이건 게임에도 없던 건데… 팀장이 이렇게나 날 챙겨 주나?’

살갑게 챙겨 주는 양반이 아니어서 기분이 묘했다.

작전지역이 아닌, 휴가 차 돌아간 오리건주에서 그를 본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렇게 설렘을 느낄 무렵에 20여 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고, 가방 하나를 메고 내렸다.

얼른 가서 발권하고, 출국하러 바삐 걸음을 옮기던 순간.

“……?”

자동 출입국 과정에서 멈추고 말았다.

앞선 여행객들은 다 지나가는데, 내 앞의 문만 열리지 않은 것이었다.

고장 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검은 베레모를 쓰고 전술 조끼를 입은 공항 경찰 둘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탓이었다.

딱 봐도 용무가 있어 보였다.

거기에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있었고.

이내 사무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선생님, 이쪽으로 잠깐 나와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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