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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7화 (27/185)

27화

드디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널찍한 실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고, 마지막에는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진짜 왔어… 진짜로…….”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 생각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모든 게 소용없었다.

온갖 감정들이 얽힌 것처럼 복잡했기 때문이다.

가슴 한쪽이 달궈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거리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마냥 기쁘고 반갑기도 했다.

라레플에서는 구현조차 안 돼서 갈 수도 없는, 그저 지도에나 표시되는 곳이었던 한국에 도착했으니까.

물론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루크의 묘지에 들렀고, 그곳도 방문이 불가능했지만.

그곳은 라레플의 메인 장소 중 하나인 미국에 속해 있는 곳이고, 워싱턴 D.C가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곳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러나저러나 내 조국이었다.

그것도 가장 빡세고 추억도 많았던 특전사로 10년이나 복무했던 나라.

미국의 마을하고는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잠깐 상념에 젖어서 인천국제공항을 둘러보며 걷다가 지하철 승강장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도 되는데,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 보고 싶었다.

가져온 짐도 작은 백팩 하나가 전부고, 차는 알 자마쉬에서 질리도록 탄 데다가 그간 못 탔던 지하철이 이상하게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진짜 서울 같네.”

익숙한 지하철 승강장의 안내 음성과 특유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면서, 서울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슬슬 편안함까지 느낄 무렵.

지하철이 금세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나도 내려서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메이필드 호텔.

김포공항 바로 아래에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전역한 부대 근처라서 군 복무 시절에 자주 보고 잘 아는 호텔인데, 정작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높은 숙박비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는 가 볼 만했다.

할부 때문에 입금되는 월급이 반도 채 안 돼서 아주 적었지만, 새로운 보너스가 통장에 두둑하게 들어온 덕분이었다.

이반이 말했던 개인 팁까지 더한 금액.

무려 5만 달러였다.

거기에 기존에 받은 2천 달러의 휴가비와 4만 달러의 보너스를 더하면 총액 9만 2천 달러.

한화로는 1억이 넘는 돈이었다.

내 연봉과 맞먹는 액수.

물론 단순히 돈이 많다는 이유로 메이필드 호텔에 가는 건 아니었다. 더 좋은 특급 호텔도 많았으니까.

위치 때문에 가는 것이었다.

부대는 당연하고, 내가 살았던 연립주택과 전역 후에 일해 왔던 식당과도 가까운 일종의 요충지였다.

은근한 설렘에 속을 가다듬을 무렵.

얼마 안 돼서 택시가 메이필드 호텔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도어맨이 다가왔고, 기사도 날 돌아봤다.

“4천 원입니다, 손님.”

“가방만 놓고 바로 나올 거니까 잠깐만 계세요.”

기사에게 말해 두고 얼른 들어가서 체크인을 했고, 짐을 푼 뒤에 빠르게 내려왔다.

휴가를 받아 오긴 했지만, 호캉스를 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 봐야만 하는, 가 보고 싶은 곳들이 있었다.

‘…일단 집부터.’

전역 후에 내가 살았던 그리고 컴퓨터를 하다가 쓰러졌을 그 장소.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물론 내 몸이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기사에게 주소를 알려 줬는데, 목적지와 거리가 가까워서 금세 눈에 익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30대를 보낸 강서구의 동네였다.

‘그대로네…….’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편의점이나 공업사, 백반집, 무슨 테크 어쩌고 하는 사무실까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아마도 내가 살던 집도 똑같이 존재할 거라고.

그 생각이 39세의 몸뚱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려던 무렵.

“이 골목 같은데… 어디 세워 드릴까?”

어느새 택시 기사가 속력을 줄이며 묻기에 만 원짜리를 건네주고 내렸다.

덜컹, 택시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 하고 얕게 숨을 내쉬었다.

“후…….”

예상대로였다.

내 집 역시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건 없었다. 기억 속의 내 집과 아주 똑같았다.

2000년대 초반에 지어진, 빨간 외벽 타일이 붙은 3층짜리 연립주택.

쉽게 말해서 오래되고 후진 빌라였다.

공동 현관에는 딸랑 유리문만 하나 있고, 비밀번호나 다른 잠금장치도 없어서 그냥 올라가면 될 정도.

그렇게 좁은 계단을 올라 내 집이었던 201호 앞에 섰다.

마침 도어락도 같아서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안에서 사람 소리가 같은 게 들려서 인터폰의 벨을 눌렀다.

띵동-

내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벨 소리가 울리고 난 뒤, 이내 웬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대충 들어도 6, 70대는 된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

당연하게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 이강태 씨 집 아닙니까?”

-누구요?

“다리 한쪽을 다친 남성인데…….”

-아뇨, 그런 사람 없어요.

“혹시 최근에 이사 오신 겁니까? 원래 여기 살던 남자는…….”

-잘못 오신 것 같은데요? 저희 여기 되게 오래 살았어요.

“이사 간 적은 없으십니까?”

-없다니까 그러네… 근데 누구세요? 경찰이에요?

혹시나 해서 계속 물어봤으나, 의아해하는 물음이 이어지면서 돌아 나와야 했다.

내가 생각한 상황 중의 하나였다.

세상은 현실과 같지만, 그걸 구성하는 사람들은 같지 않을 거라고.

‘이러면 진짜로 한국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는데……?’

묘한 느낌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걸음을 돌렸다.

아직 가 볼 곳이 더 있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매일 가던 식당.

정확히는 특전사 선배가 연 식당이고, 내가 주방 직원으로 일했던 곳이었다.

덕택에 부러진 다리로도 먹고살게 됐었고.

짧은 생각을 하다 보니, 식당도 금세 나타났다.

내 집과 마찬가지로 다른 게 없었다.

간판도, 식당 유리문도, 안으로 보이는 테이블도 모두 내 기억 속의 것과 똑같았다.

감회에 젖어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온 사람과 마주했다.

아니, 그가 말을 걸어왔다.

“식사하시게? 안으로 들어와요. 우리 집은 1인분이 더 잘 나와.”

50대 즈음 된 중년 남성의 말이었다.

태도를 봐서는 사장일 터.

“혹시 여기 사장님이세요?”

“예예, 내가 사장인데?”

“여기서 가게는 얼마나 하셨어요?”

“한 15, 16년 됐는데… 그건 갑자기 왜? 어디, 부동산에서 나온 분이에요?”

“아닙니다. 아는 분 가게인 줄 알고.”

가게 사장에게 꾸벅 고개 숙이고 걸음을 돌렸다.

상황도 어렵지 않게 정리됐다.

“그냥… 완전히 딴 세상이라고 생각해야겠네. 아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태울 뻔했던 담배도 완전히 잊었고.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곳이 한 군데가 더 있었다.

‘내 부대.’

제1공수특전여단, 일명 독수리부대.

상황을 봐서는 동고동락했던 전우와 선후임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20대를 온전하게 다 보낸 곳이어서 안 가 볼 수가 없었다.

부대가 멀쩡히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마침 걸어서 5분이면 가는 거리라서 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몇 걸음 만에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파리가 떨어지기 시작한 담쟁이덩굴과 회색 담벼락 그리고 철조망까지.

부대를 둘러싼 경계였다.

“하… 옛날 생각나네.”

10년 전, 복무했던 때를 떠올리던 와중이었다.

제1공수특전여단 정문에 다다랐다.

부대 번호가 적힌 명판과 좌우로 서 있는 조그만 초소 그리고 노랗고 검은 바리케이드가 있는 곳.

위병소 근무자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굳이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서서 바라만 봤다.

사람이고 뭐고 다 바뀐 판국에 허튼짓했다가는 트러블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돌아서서 택시를 잡으려고 할 때였다.

“……?”

웬 남자가 보였다.

9차선 도로 건너편의 인도.

거리도 꽤 멀고, 모르는 사람이라서 평소였다면 별생각 없었을 텐데, 어느샌가 그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하다 싶은데, 왜 그러는지 깨달았다.

‘아! 그래, 아까 동네에서…….’

분명하진 않지만, 멀리서 비슷한 실루엣을 본 게 떠오른 것이었다.

다만, 확실하진 않았다.

스쳐 가듯 남은 이미지가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 그 장면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제이크에게 변명처럼 말했던 ‘감’이라는 게 있는 건지.

그렇게 반사적으로 관찰하는 사이, 외국인은 갈 길을 마저 갔다.

원래 지나가려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내가 착각했거나 우연을 과장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백 프로 미행이지, 이건.’

해 봐서 잘 알았다.

실제가 아니라, 게임 속이긴 했지만.

요인을 몰래 추적하는 퀘스트를 여러 번 해 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보 탈취나 납치, 암살도 있었는데, 그것도 훌륭하게 해낸 적이 있었고.

물론 날 미행하는 이유는 그것과 다를 것이었다.

아니, 뻔했다.

‘너무 잘해서. 어쩌면 스카우트하기 전에 관찰하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딴 곳으로 안 새는지 감시하는 걸 수도 있고…….’

딱 그 정도.

부정적인 요소도 떠올릴 순 있으나, 가능성은 없었다.

라레플을 해 본 경험상 그랬다.

적이 될 세르게이나 피칼은 아직 나하고 마주치지도 못한 상황이었고, 그곳이 아니더라도 날 적대할 만한 곳은 없었다.

물론 호의적이라도 조심해야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아, 근데…….’

혀를 차고 말았다.

내 안전뿐만이 아니라, 행동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오늘 내 오전 방문 기록.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한 것이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전역한 부대 근처 빌라와 식당에 갔다가 위병소를 구경했으니까.

이건 굳이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설명이 불가능하니까.

한마디로 시작부터 빌미를 주게 된 셈이었는데, 그래도 분명한 잘못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 끝에 한 가지의 결론이 나왔다.

‘…출국 전까지 뻘짓 하지 말고 호텔에서 운동이나 해야겠네.’

* * *

이튿날,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가정보원 본관.

1차장 휘하의 국제안전실 실장인 조범용이 오전 보고를 받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야?”

강태와 관련된 자료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체 기록이나 주소지, 연락처 같은 개인 정보부터 학창 시절의 개인 활동과 군 이력까지.

당연하게도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조범용의 눈에 차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전부 평범하기 그지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인 두 명이 쫓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일 정도로.

조범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러면 용병질하고 관련됐겠네? 그치?”

“예, 실장님. 저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정보는 눈에 띄는 게 없었으니, 해외 활동 중에 무슨 일이 생겨서 요원이 붙었다고 봐야 했다.

“용병질은 좋게 끝나질 못할 텐데… 지앤지 자료는?”

“첨부된 것 외에 보강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조범용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이 미국 놈들은 어디 소속 같어? CIA나 주한 미군은 조용하디?”

“아직은… 예, 조용합니다.”

“대사관은?”

“거기도 따로 반응 없었습니다.”

“쯧,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길래…….”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조범용은 보고서를 마저 확인하다가 인상을 썼다.

“뭐야, 이게?”

강태가 관련 없는 연립주택과 식당에 방문했고, 전역한 부대 앞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돌아갔다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내용이라서 조범용 역시 눈매를 좁히며 읽던 중.

“잠깐만.”

“예?”

“혹시 꼬리 붙인 걸 들켰나?”

“아닙니다, 저희 요원은 미국인들보다 더 멀리 있었습니다. 위장도 준수했고…….”

“부대 앞에 있다가 택시 타고 가서 안 나온 게 좀 걸리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 우리 애들 아니면은 미국 놈들이 걸린 것 같지 않어?”

“예, 실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걸린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자식들이 우리 홈그라운드에서 설치고 다니니 이런 꼴이 나지… 쯧쯧쯧…….”

조범용이 혀를 차다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팀장을 쳐다봤다.

“참, 이강태 말이야.”

“네, 실장님.”

“이렇게 된 김에 얼굴 한번 봐야 하지 않겠냐?”

“접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러다가 출국해 버리면 어쩌려고? 어디 중동 같은 데로 갈 텐데… 거기서 미국 애들이 찜 쪄 먹고 뼈 발라 먹으면 우린 손가락만 빨아야 되거든, 알지?”

정확한 표현이었다.

미국이 먼저 건든 건, 한국이 쳐다만 봐야 했다.

선심 써서 끼워 준다면 모르지만.

굳이 간섭을 해야 한다면 강태가 국내에 있을 때 해야 했다.

그래야 국정원이 양지든, 음지든, 가진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팀장도 판단 끝에 얼른 대답했다.

“맞습니다, 실장님.”

“그럼 계획 수립해서 가져와, 웬만하면 정중한 스타일로.”

뒷말은 혹시 몰라서 붙인 것이었다.

만약 강태가 미국 정부의 요원이거나 미국 정부가 신경 쓰는 손님이라면 문제가 될 테니까.

물론 조범용은 그런 긍정적인 것보다는 용병의 이미지에 맞게, 안 좋은 쪽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인을 죽였거나 미국 자산에 손해를 입혔거나.

‘어쨌든 보통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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