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6화 (26/185)

26화

지휘 컨테이너에서는 레이첼이 했던 얘기를 더 구체적으로 해 줬다.

규정상 3, 4개월마다 1회씩 20일의 휴가가 지급되나, 나와 레이첼은 위험한 작전을 여러 번 성공적으로 마쳐서 예외적으로 준다는 것.

거기에 회사에서 모든 항공권을 무료로 예약해 주고, 최소 2,000달러의 휴가비까지 입금된다고 했다.

휴가 출발 일자는 다음 주.

알아서 예약에 결제까지 모두 진행되는데, 좋고 나쁘고 간에 아직도 좀 얼떨떨했다.

가끔씩 라레플 속의 한국을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진짜 갈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얼른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국무부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라서 조바심을 내진 않았었다. 더욱이 지금은 핵전쟁의 ‘ㅎ’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무부에서 소식을 가져오고, 우리 찰리 팀이 그 임무에 다가가기를.

그렇게 지휘 컨테이너에서 나올 무렵,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닝셔츠 차림의 마커스였다.

“얘기 들었지? 휴가 말이야.”

“어, 방금 들었어.”

“그럼 루크에게 들렀다 갈 수 있겠어? D.C에서 멀지 않아, 해리슨버그라는 곳인데…….”

말수가 적은 마커스가 조심스레 꺼내는 얘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야지.”

라레플의 설정상 입사한 지는 이제 2개월째고, 루크의 얼굴을 실제로 본 건 1분도 채 안 됐지만, 어쨌든 그는 내가 금세 알아볼 정도로 익숙한 캐릭터였다.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웬만한 조연 못지않게 친숙한 동료였고.

그의 묘지에 들렀다 가는 게 당연했다.

한국이 좀 더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루크를 외면할 정도로 비인간적이진 않았으니까.

그사이, 마커스의 답이 돌아왔다.

“고마워, 리.”

“고맙기는 뭘…….”

그렇게 헤어지려는데, 마커스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근데, 리.”

“어?”

“네 사격술을 배우고 싶은데, 날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델타포스 출신의 마커스.

“가르친다고? 내가 널?”

반사적으로 되묻자마자, 그의 말이 덧붙었다.

“그래, 오늘 그 식당 입구에서 네 사격을 보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

“델타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 실력을 과대평가했던 건 아니었는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혼자 정했던 한계는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절대 아니었다.

과대평가든, 한계든 간에.

마커스는 델타 출신이면서 세계 최고라고 불러도 되는 요원이고, 관련 직종이라면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존재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데, 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니야, 깨닫지 마. 넌 충분… 아니, 이미 대단해. 델타잖아.”

“너는 그런 델타를 압도했어.”

“그렇긴 한데…….”

뭐라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 모든 건 특성과 플레이 경험 덕분에 이룬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내 진짜 몸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특전사 출신이고 사격이든 훈련이든 해 볼 만큼 해 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국 기준이지, 델타 앞에서는 감히 떠들 수준은 안 됐다.

특히나 마커스는 제이크와 마찬가지로 제75레인저연대, 그린베레, 델타포스의 코스를 밟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가 받은 혹독한 테스트와 훈련 기간만 따져도 최소 3년에 육박할 터.

미 전역에 있는 각종 군사 교육 시설까지 다녀왔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단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

마커스가 실전이든, 훈련이든, 뭐든, 나보다 훨씬 잘 알 테니까.

다시금 거절했다.

“미안한데, 사격은… 노하우 같은 것도 없어서 말해 줄 게 없어.”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이건 뭐랄까, 그냥 보고 쏘는 게 전부야. 알잖아, 너도. 사격에 별게 없다는걸. 예를 들어서… 뭐, 반사 신경 비슷한 거 말이야.”

마커스에게 해명하듯 말하자, 그가 눈을 껌뻑이며 되물어 왔다.

“반사 신경?”

“그냥 보이면 쏘는 거지, 조준도 빨리하고…….”

“평소에 사격 훈련을 얼마나 했는데? 탄 소비량이 얼마나 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많진 않아.”

10년 전의 특전사 시절을 떠올리려다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마커스가 고개를 주억거리길 잠시.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타고났다는 소리군, 천재처럼. 맞나?”

틀렸다거나 맞다고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라서 쓴웃음을 짓자, 마커스도 이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쪽에도 천재가 있겠지. 내가 간과했어. 난 훈련받으면 모든 걸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그가 알겠다는 듯 넘어갈 무렵,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불쌍한 마커스. 내가 말했잖아? 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데드샷 같은 존재지.”

어느새 호세가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지? 우리 플로이드 로턴?”

“그게 누군데?”

“DC 코믹스 몰라? 아, 이런… 영화에도 나왔었잖아. 수어사이드 스쿼드! 거기서 존나게 잘 쏘는 놈이 바로 데드샷이야. 이름은 플로이드 로턴, 끝내주는 새끼지. 너도 마찬가지고, 리.”

그러면서 호세가 마커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맥주나 하나씩 마시러 가자, 휴가 기념으로.”

“휴가는 다음 주야.”

“알아, 오늘은 휴가받은 기념이지. 작전도 잘 끝났고.”

“리, 너도 같이 마실 거지?”

호세가 마커스와 대화하다가 날 바라보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전화 한 통만 하고.”

“한국에?”

“아니, 훈련 센터에 MMA 교육이 있더라고. 그거 받아 보게.”

“오… 휴가 가기 전인데 훈련할 생각을 해? 하긴, 나도 한창때는 그랬었지. 혈기 넘칠 때 말이야.”

호세는 그럴 만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특수부대 출신이고, 나이도 서른 중반이나 된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따지자면 나는 이들보다 한참 어린 막내였다.

만으로 29세.

서른 초반인 레이첼보다도 어린 셈이었다.

어느새 마커스도 피식 웃는 사이.

나는 훈련 센터에서 봤던 MMA 코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고, 1회 20달러에, 총 8회짜리 기초 클래스를 신청했다.

휴가 가기 전에 MMA 맛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서.

그러자 옆에 있던 마커스가 날 바라봤다.

“MMA 말고 복싱은 어때?”

“오, 복싱도 좋지.”

“내가 복싱을 꽤 했었거든. 시간 날 때 무료로 코치해 줄게. MMA 코치한테 가서 선보여 봐.”

“그러면 나야 좋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게임에서도 없던 사실이기도 했고.

한데, 이를 듣고 있던 호세가 고심하듯 입을 열었다.

“음, 나는 가르칠 게 운전과 스나이퍼 과정뿐인데… 너한테는 둘 다 의미가 없겠군. 운전도 할 줄 알고, 저격도 쉬울 테니까.”

루크가 전사하면서 운전병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호세의 주특기는 방금 말했듯 저격이었다.

저격 학교와 저격수 고급 양성 과정 등 몇 개월짜리 저격수 교육을 수료한 데다가 네이비씰에서도 저격 담당으로 활약했었다.

애석하게도 알 자마쉬에서는 별다른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으나, 세르게이와 부딪히게 될 동유럽이나 동남아에서 턱 빠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하고는 명백하게 다른 분야였다.

명사수 특성은 저격의 기본인 탄도학과 풍향하고는 관련이 없는 데다가, 1, 2㎞ 밖의 적을 조준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실력이 중요할 뿐.

“아냐, 저격은 다르지. 만약 네가 가르쳐 준다면 기꺼이 배울게.”

“오, 이런, 이런. 이번에도 그런 약해 빠진 소리를 하는 거야? 이미 네가 했던 짓을 다 알고 있다고, 리.”

“내가 뭘……?”

“네가 마커스한테 그랬다면서?”

“……?”

무슨 소린가 하고 바라보자, 호세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커스가 못 쏘는 건 너한테도 어렵다고. 그리고 데드샷처럼 올킬했었잖아?”

“…아, 그랬지.”

“넌 분명 뛰어난 스나이퍼일 거야. 탄도학이나 풍향… 그런 건 기초 과정에서 배우기니까 몇 번 쏘면 감을 익히겠지. 아니지, 장거리 사격장에 한번 가 보자. 내 오른팔을 빌려줄게.”

“오른팔?”

“응, 마크 13 라이플. 네 솜씨가 궁금해서 말이야.”

볼트 액션 방식으로 작동하는 MK.13 저격 총.

라레플은 당연하고, 영화에도 나온 적이 있어서 제법 유명한 저격 총 중의 하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첼이었다.

“스나이퍼 테스트? 괜찮네요, 좋은 생각이에요. 휴가 기간에 미국을 방문한 사이에 테스트해 보는 건 어때요?”

“아니, 고향이 우선이지.”

마커스가 나 대신 대답하고, 호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시간 날 때나 하는 거지, 휴가 기간에 하자고? CIA라서 그런가? 왜 귀중한 휴가 시간을 빼앗으려 들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당신들은 리의 스나이퍼 솜씨를 보고 싶지 않나요?”

레이첼이 반박하고 호세와 마커스도 잠깐 입맛을 다셨다.

눈치를 보니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관심 있는 건 테스트할 저격 실력이 아니라, 호세의 강의였다.

더 이상 네이비씰의 저격수가 아니긴 했지만, 실력은 현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호세가 가르쳐 준다면, 휴가 기간 좀 빼도 상관없어. 어차피 20일이나 쉬니까, 미국에 며칠 정도는 있어도 되거든.”

“오! 리, 그래. 그 말은 정말 반갑긴 한데, 아쉽게도 내가 너한테 며칠을 못 줘. 루크에게 다녀온 다음에 와이프와 아이들을 먼저 봐야 하거든. 함께 가야 할 곳도 많고. 미안하게 됐어, 친구.”

“아… 그랬지.”

미혼인 내 처지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좌우의 마커스와 호세 모두 유부남들이었다.

마커스는 딸이 셋이고, 호세는 아들 하나, 딸 하나였고.

“너도 한국에 가면 근사한 애인이나 만드는 게 어때? 돌아갈 곳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아니면 네 저격 실력에 관심 가지는 여성은 별론가?”

어느새 호세가 내 뒤편으로 눈짓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레이첼이 나와 호세를 바라보는 상황.

“그런 소리 말고 나중에 저격이나 가르쳐 줘.”

왠지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무시하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되고 흥분되기 시작했다.

정말 한국에 갈 수 있었다.

* * *

일주일 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가정보원 본관.

1차장 산하 국제안전실 실장, 조범용에게 10분 전에 입국한 미국인 2명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여권 정보와 입국 심사 과정, 그 외의 신분증 사본까지 첨부된 내용.

그 모든 걸 살핀 조범용이 하단의 글자를 읽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이 거기 있었다.

[미 정보 요원으로 의심됨, 주의 요망.]

조범용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런 일이 가끔 발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길 순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국 내에도 CIA 한국 지부와 주한 미군 정보기관 따위가 있었다. 공개되지 않은 태스크 포스 팀까지 고려하면 국정원이 모르는 곳들도 제법 있을 터.

그들이 뭘 하는지 전부 모르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보는 확보를 해 놔야 했다.

국가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사용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의심스런 정보가 빗나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확실한 정보가 되곤 해서 꼼꼼히 봐 둬야 했다.

특히 이런 보고는 각종 첩보와 누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선별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이 아주 적었다. 빗나간 정보도 틀렸다기보다는 놓쳤을 가능성이 컸고.

조범용은 그중 고화질로 인쇄된 사진을 보고 바로 확신했다.

‘너희들은 또 어디 소속이냐?’

덩치가 크거나 인상이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체구가 훈련된 듯 단단해 보였고 사진 속 시선도 아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요원이 아닐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조범용이 관련 정보를 읽어 갈 무렵, 보고했던 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실장님.”

“왜?”

“실장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급하게 파악된 게 있는데… 구두로 먼저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조범용의 눈이 빛났다.

휘하의 팀장도 국정원에서만 15년을 구른 베테랑이었다.

보고서도 없이 급하게 말로 보고하고, 심지어 확실하다고 하면 이유도 분명할 터.

“말해 봐.”

조범용이 허락했고, 팀장의 바로 입을 열었다.

“입국과 동시에 인천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요원을 배정했는데, 두 사람이 같이 입국한 탑승객을 쫓아가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탑승객?”

“예, 뒷장에 탑승객 리스트에 보시면… 한국인 입국자 중에 이강태라고 있습니다. 만 나이 29세, 특전사 출신으로 현재 지앤지라는 민간 군사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쫓는 목적은?”

조범용이 탑승객 리스트에 있던 이강태라는 이름을 확인하며 물었고, 팀장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거리가 가깝지 않아서 경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고, 감시나 관찰로 추측됩니다.”

펄럭, 조범용이 간결한 내용밖에 없는 탑승객 리스트를 들어 보였다.

“이강태 자료 전부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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