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5화 (25/185)

25화

오전 8시 무렵, 미국 워싱턴 D.C, 해리 S. 트루먼 빌딩, 국무부 대외협력국 국장실.

새 보고서를 확인하던 국장 로버트 엔더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흠…….”

분명 세르게이가 보낸 메일이 남중국해의 타릴 제도를 우회해서 그곳의 수색을 진행했는데,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단서가 하나도 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이제 23시간밖에 안 됐고, 휴민트(HUMINT: 인적 정보)를 포함한 ISR(Intelligence, Surveillance, Reconnaissance: 정보, 감시, 정찰) 자원 역시 결과물이 나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

더구나 타릴 제도는 직경 400㎞의 범위에 퍼져 있는 파편 같은 섬들이었다.

거주민이 없고, 관련 시설도 없는 수백 개의 무인도라서 고고도 무인정찰기로 촬영하고 분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사례일 뿐.

타릴 제도 수색을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됐다.

대외협력국이 신설된 지난 3년간 잡히지 않은 세르게이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욱 신경 쓰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결과가 로버트의 손에 올라왔다.

‘…드러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군.’

로버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짐작대로 타릴 제도 수색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남중국해를 접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관련 기록이 손에 들어왔는데, 대부분이 삭제되거나 형식적인 내용으로 교체되고, 심지어 관리 소홀로 분실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종종 있는 일이었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는 행정 처리가 졸속으로 이뤄지거나 엉망인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나 보고서에 올라왔듯, 이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르게이의 메일이 우회했던 그 시점의 기록들이 방금 올라온 보고서 내용처럼 모두 훼손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타릴 제도와 관련된 선박이나 항공기 운항 기록과 통신 자료들.

이를 보던 로버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어먹을, 수작을 많이도 부렸어.”

그의 입이 절로 열렸다.

단시간의 수색으로 성과를 얻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었다.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세르게이의 흔적이 나온 만큼 타릴 제도에서 뭐가 이뤄졌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단순 위장이나 우회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거기에 맞는 증거가 나와야 했다. 아니라면 아니라는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래야 수백만 달러짜리인 특수전 요원들이나 순항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니면 돈도, 정보도 모두 날리게 될 테니까.

로버트가 체념하듯 한숨을 흘렸다.

‘…장기화되겠군.’

그리고 커피를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였다.

띠링-

모니터 구석에 알림 하나가 떠올랐다.

[보안 메일 도착(1)]

알 자마쉬의 레이첼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략 7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늘 그러듯 임무를 마치자마자 보냈을 터.

‘수상한 러시안의 의뢰였지.’

SVR(러시아 해외정보국)이나 GRU(러시아 정보총국)의 소속으로 의심되는 이들이 G&G Corp에 의뢰를 해 와서 의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말 구출만 하는지, 다른 의도는 없는지 등등을 확인해야 했고, 이는 보고서로 어느 정도 해소됐다.

‘…정말 구출만 하고 돌아갔군.’

다른 지역의 PMC 인원들까지 실제로 고용해서 데려올 정도.

‘이렇게까지 신경 쓸 정도면 요구조자를 알아봐야겠고…….’

이내 로버트의 시선이 다른 곳에 멈췄다. 일전에 언급한 적 있던 강태에 대한 내용인데, 예고하지 않은 파일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바로 G&G Corp 찰리 팀의 알 자마쉬 훈련 센터 이용 영상.

딸깍.

로버트가 클릭하고 기다리길 잠시.

동공이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입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감탄이 튀어나왔다.

“오,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전에 레이첼이 보내왔던, 등에 가려지거나 불명확했던, 바디캠 영상하고는 차원이 다른 내용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든 게 선명한 가운데, 강태가 신들린 사격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델타포스의 괴물이었던 제이크, 마찬가지로 델타포스 출신인 마커스 그리고 네이비씰의 호세가 상대도 안 됐다.

분명 사람의 속도인데, 결과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1분대를 기록한 건 최초라고……?’

훈련 센터의 기록까지는 몰랐던 로버트가 보고서를 읽으면서 또 감탄했다.

‘충분하지, 충분하고 남겠지. 사실상 탈인간이 아닌가?’

납득할 만한 솜씨였다.

이내 보고서 끝부분에 적힌 문장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리’는 러시아인에게 스카우트 요청까지 받았으나, 동료를 이유로 거절함. 그러나 제시한 연봉 액수가 커질 여지가 있고, 동료와의 시간도 2개월밖에 안 되어 이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로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러시아에서 데려가려고 했다고……?’

그냥 해외도 아니고, 적대국인 러시아로 넘어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45만 달러를 제안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더 많은 액수를 부른다고 해서 강태를 순순히 보내 주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강태는 대체 불가능한 인적 자원이었다.

해외만이 아니라, CIA나 국토안보부, 그 외의 비밀 조직으로 보내서도 안 됐다.

‘우리가 사용해야 해.’

유능한 부하를 바라는 수많은 리더처럼, 로버트 역시도 강태를 원하고 있었다.

오직 대외협력국에서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값비싸게, 또한 유일한 무기로 써먹어야 했다.

즉, 최종적으로는 국무부 대외협력국에 소속시켜야 한다는 뜻.

그러나 국적 변경부터 심리검사와 복잡한 인성 테스트 등등 거쳐야 할 게 많았기에, 로버트는 일단 메일부터 빠르게 작성했다.

[…리에게 미국에 우호적인 인상을 심어 주고, 사적으로도 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서 친분을 높일 것. 또한, 이직하지 않는지 확인하고, 징후가 감지되면 선조치 후보고할 것.]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 마련을 위해 담당자까지 호출했고, 빠르게 대략적인 계획까지 수립했다.

강태가 영주권을 갖고 이주 자금과 각종 혜택까지 받은 뒤에 시민권까지 수령하게 해서 스스로 미국인이 되게 만드는 것.

서류상의 절차이니, 이 정도면 며칠이면 해결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로버트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국인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어서, 단기간에 끝내서는 안 됐다.

부자연스러움은 불필요한 오해나 다른 무언가가 개입할 빌미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국무부에 합류하는 것 역시 어려워질 터.

즉, 이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었다.

‘…이것도 장기화되겠군.’

로버트가 얕게 숨을 내쉬었다.

세르게이에 이어 강태까지 참고 지켜볼 존재가 둘이나 됐다.

* * *

메디컬 체크와 총기 점검, 샤워까지 마친 직후.

곧장 컨테이너 침실로 가서 노트북 앞에 앉았고, 줄이 꼬여 있던 헤드셋을 서둘러 착용했다.

찾아볼 게 있었다.

바로 러시아어.

아무리 생각해도 작전 중에 러시아어를 알아듣는 게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확인해 보려고 러시아어 말하기를 찾아보던 중.

금세 깨달았다.

“Это потрясающе…….(이거 기가 막히네…….)”

나는 러시아어를 이해하고, 심지어 말도 할 수 있었다. 그 무엇도 배울 필요 없이.

마치 영어처럼 완벽한 발음이었다.

그렇게 러시아어 몇 개를 더 하다가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화면 구석에 표기된 다른 글자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나라의 말.

폴란드어였다.

당연히 나와 관계없는 언어인데, 웃긴 건 내가 그 문장이 폴란드어라는 걸 알아본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이해되고 말까지 될 정도로.

“이게 뭔……?”

반사적으로 키보드에 손을 얹고 폴란드어를 검색했다.

앞서 그랬듯, 마찬가지로 다 읽혔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말이 되어 나왔다.

당황해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검색해 본 다음.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허… 어이가 없네……?”

생전 배워 본 적도 없던 언어들이 내 머릿속에 설치된 것처럼 이해가 되고 말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 말을 포함해서 총 11개 국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일본어, 중국어……. 씨발, 무슨 언어학자도 아니고…….’

욕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나쁘거나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딱 11개만 가능했다.

다른 나라 말은 아예 나오질 않아서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머리를 쥐어 싸맬 때.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지원 언어.

라레플의 설명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런 게 있었다.

혹시 몰라 다른 게임들을 검색해 보니까, 다들 지원되는 언어가 비슷했다.

그리고 한참을 검색한 끝에 폴란드가 게임 강국이라서 동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언어가 지원된다는 사실도 알았고.

“허…….”

헛웃음을 흘리던 순간.

“도대체 뭘 보는 거예요? 폴란드어?”

옆에서 불쑥 레이첼이 등장했다. 물기 있는 올림머리에 샴푸 향이 나는 모습으로.

내게 슬쩍 어깨를 기울인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남자 된 입장에서 레이첼 같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괜히 한눈팔아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럴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레이첼이 연애나 사랑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라레플에서도 러브 라인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계산적인 면모가 돋보일 뿐.

그래서 괜히 코를 비비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른 노트북 뚜껑을 닫자, 레이첼이 눈썹 하나를 찡그렸다.

“흐음, 헤드셋까지 끼고… 도대체 뭘 한 거예요?”

“거 옷이나 똑바로 입어요.”

대충 말을 돌렸다.

그녀가 입고 있던 티셔츠 깃 부분이 말려 들어가서 목덜미가 훤히 보이던 상황.

딴말이 나오기 전에 물었다.

“그래서 남의 방에 왜 왔어요?”

“…….”

왠지 레이첼이 조금 불만스러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 같았는데, 곧 답이 돌아왔다.

“지휘실에서 전화했을 텐데… 소식 못 들었어요?”

“아, 작전 중에 무음으로 했는데, 해제를 안 한 모양인데요. 무슨 일인데요? 설마 또 작전 나갑니까?”

대답하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는 사이, 레이첼의 말이 이어졌다.

“아뇨, 우리 팀 전부 휴가 주겠대요.”

“휴가요?”

“우리 둘은 근속 기간이 짧아서 원래 못 가지만, 힘든 작전이 많았다고 푹 쉬고 오라더라구요.”

“아…….”

고개를 주억거리던 찰나.

예상치 못한 레이첼의 말이 돌아왔다.

“아마 다들 루크 밀러의 묘지부터 갈 것 같던데, 같이 갈 거죠? 어차피 휴가 일정도 3주나 되니까, 미국에 먼저 들렀다가 한국으로 가는 게 어때요?”

루크의 묘지 그리고 한국.

두 단어에 주춤했다.

아예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게임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라레플이 오픈 월드 FPS 게임이기는 해도 루크의 묘지나 한국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아서 갈 수 없는 곳들이었다.

방문이 가능한 장소는 가상 도시와 게임 스토리를 이어 가는 주요 국가 몇 개가 전부.

동시에 짧은 생각들이 이어졌다.

내가 있던 자취방, 일하던 직장, 전역한 부대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나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됐는지.

여러 생각이 떠오르는 사이, 레이첼이 날 깨우듯 말했다.

“일단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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