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2화 (22/185)

22화

사내의 두 다리가 완전하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왼쪽은 정강이 밑으로 뼈와 살점 같은 게 불그죽죽하게 매달려 있었고, 오른쪽은 발의 흔적 같은 것이 바짓단처럼 나불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바지 옷감과 먼지에 얽히고설켜서 뭐가 뭔지 제대로 구분이 안 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쓰러진 사람은 중대한 부상을 입었고, 적잖은 출혈이 발생하고 있었다.

대충 봐도 피가 수백 ㎖는 흘러나왔다. 어쩌면 1ℓ가 넘을지도 모른다.

부상자의 몸무게를 대략 8, 90㎏이라고 가정해도, 출혈량이 2ℓ가 넘으면 회복 불능의 뇌사 상태에 빠지거나 심정지로 죽을 것이었다.

조치해야만 했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전술 조끼의 벨크로를 뜯어서 지혈대를 그의 다리에 걸었다.

하나는 정강이에, 하나는 발목 부근에.

단단하게 묶어서 피를 멈추려는데, 발목 부근에 걸었던 지혈대가 살이 뭉개지면서 빠져나왔다.

왈칵, 살점과 핏물이 짓이겨 나오는 순간.

타다닥!

발소리와 함께 자욱한 먼지 속에서 사람 형체가 불쑥 나왔다.

반사적으로 옆구리에 걸어 뒀던 HK416을 잡아채려는데 러시아어가 들려왔다.

“Илья! Нет, нет! Блять! Нет!(일리야! 안 돼, 안 돼! 씨발! 안 된다고!)”

이반이었다.

그도 멀쩡하지 않았다. 파편 따위에 맞았는지, 얼굴과 팔뚝같이 드러난 피부에 스크래치가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피가 맺히고 흐르는 모습.

다행히 팔다리가 모두 붙어서 따로 부상은 없어 보였다.

얼른 총에서 손을 떼고, 미끄러지는 손을 수습해서 마저 지혈대를 고정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52분.

그리고 엄폐물 뒤로 끌고 가기 위해 방탄복 어깨 부분을 잡았을 때였다.

“Блять, Эти сумасшедшие дети! Я убью всех!(씨발, 이 미친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이반이 분노에 찬 듯 러시아어로 욕설을 뱉어 냈다.

동료가 다치거나 죽는 경우에 전장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 중 하나였다. 어느새 먼지 바깥쪽으로 총까지 겨누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

러시아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이반이 말한, 안 된다고 소리치는 것도 모두 알아들었다.

‘내가 러시아어를 안다고?’

놀라서 멈칫했으나, 하던 건 계속해야 했다.

우선순위가 있었다.

부상자 이송.

말이 이송이지, 정확히는 어깨 부분을 잡고 질질 끌어다가 은‧엄폐해서 숨기는 것이었다.

먼지 덕에 시야가 차단되긴 했지만, 여기 놔뒀다가는 죽을 게 뻔하니까.

그렇게 축 늘어진 SVR 대원을 끌고 가려던 찰나.

스윽.

먼지 속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

형체만 흐릿하게 드러났지만, 이번에는 HK416을 잡지 않았다. 저 거대한 실루엣만큼은 익숙하다 못해서 반갑기 때문이었다.

제이크.

가장 든든한 동료이자 리더인 그가 먼지 묻은 금빛 수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눈을 번뜩인 그가 손을 뻗어 왔다.

“리, 레이첼과 함께 이반을 데리고 선두로 가. 최대한 빨리 요구조자와 접촉해서 데리고 나와야 해. 여기서 더 지체해선 안 돼.”

나하고 같은 판단이었다. 폭발물로 부상자까지 생겼으니, 정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됐다.

더 신속하게 움직여서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이동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아까 거기서 그냥 버티고 있었으면 지혈대를 꺼내서 쓸 일도 없을 테니까.

그사이, 제이크는 쓰러진 SVR 대원의 멱살 부근을 틀어쥐고, 한 손으로 훌쩍 어깨에 걸쳐 멨다.

‘역시 바이킹…….’

사람이 아니라, 군장을 멘 것 같았다.

부상자 이송법 같은 건 필요 없는 듯한 모습.

그와 동시에 어느새 뒤로 레이첼과 호세가 다가와 있었다. 마커스도 후방을 경계하며 가까이 위치했고.

제이크가 기다렸다는 듯 명령을 하달했다.

“레이첼, 리를 보조해서 이동해. 호세, 넌 나와 함께 리의 뒤를 받치고, 마커스는 계속해서 후방을 경계해.”

곧 총을 고쳐 잡은 제이크가 내게 턱짓했다.

“알아들었으면 이반부터 끌고 가, 어서.”

역시나 명쾌하고 간결했다.

나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먼지 밖으로 나가려는 이반의 어깨를 잡아 세운 것이었다.

물론 본능 덕분인지, 훈련 덕분인지 노출된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엄폐물 뒤에서 적을 쏘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갑시다. 인질 구조가 우선 아닙니까?”

“제기랄…….”

“자, 우선 이쪽으로.”

그를 잡아끌면서 물었다.

“도대체 뭐가 터진 겁니까? RPG? IED?”

“…아마 IED일 겁니다. 웬 꼬마가 박스 같은 걸 던졌는데, 확인하기도 전에 폭발해서…….”

게임 스토리와 흡사했다.

폭발한 방식과 타이밍만 달라졌을 뿐.

이 정도는 예상했었다. 너무 가까이서, 예고도 없이 터져서 물리적으로 충격을 좀 받았을 뿐.

이미 시나몬을 첫판에 잡아 버리면서 메인 스토리가 많이 바뀌었다.

사이렛 매트칼과의 작전이나 우연한 SVR의 의뢰 역시 지금 진행할 게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서브 퀘스트로 등장할 뿐.

그것도 여유를 두고 선택하는 건데, 지금 이 일들은 좀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파도든, 호랑이 등이든, 뭐든 올라탄 것처럼.

그러나 고민할 틈은 없었다.

이제 자욱한 먼지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SVR 요원에게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문과 담벼락에 그들을 모아 두고서 곧장 내 생각을 뱉어 냈다.

“여기를 안전하고 신속하게 뚫고 인질한테 가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대로 하시겠습니까? 적어도 중간에 멈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지휘관 역할인 이반의 눈이 날 향했다.

많이 난감할 것이었다. 스페츠나츠와 SVR 출신이면 상황이 개판인 게 뻔히 보일 터.

물론 작전하다 보면 사소한 변수부터 크게 엎어지는 사안들도 많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더 좋지 못했다.

당연했다. 애초에 게임 스토리조차 고전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래서 고인물인 나도 쉽게 깨질 못했으니까.

웬만하면 다 다치거나 죽었다.

후속 지원 팀이 와서 가까스로 탈출하면서 마무리하는 게 전부였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그러나 이반은 포기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 러시아 양반이 그래도 한따까리 하는 양반이지.’

게임에서 겪었던 캐릭터였다. 물론 제이크나 레이첼처럼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반은 그 둘과 비슷한 캐릭터였다.

러시아에 속해서 서로 다를 뿐, 가진 사명감을 본받을 만한 이가 바로 그였다.

더구나 이반은 애초부터 군 출신의 현역 국가 요원으로서 상명하복을 잘 따르는 캐릭터였다.

전직 스페츠나츠, 현 SVR 요원.

물론 방금처럼 감정 표출이 세다는 단점이 있고, 그것 때문에 게임에서도 자주 죽어 나간 것 같았지마는 그래도 실력은 있었다.

곧 이반의 입이 열렸다.

“무슨 방법입니까?”

말에서 고민이 묻어 나오는 듯 들리기에 짧게 답해 줬다.

“내가 선두, 나머지는 측면을 맡는 겁니다.”

“…그게 답니까?”

“예, 다예요.”

“…당신 실력을 잠깐 보긴 했지만, 진심입니까? 지금 상황은 내 예상보다도 나쁩니다.”

“아니면 딴 방법 있어요?”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 나올지 잘 알았다.

“…제기랄. 요구조자의 위치는 10미터 앞 골목에서 좌회전해서 60미터에 있는, 2층 식당입니다. 창이 제법 크고, 창살도 없는 곳입니다.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게임하고 똑같았다.

쉽지 않은 작전이라서 건물 내외부가 뚜렷하게 기억나는 장소였다.

‘아마 맞은편 2층에서도 사격을 했었지?’

창 너머 건물에서 여럿이 사격해 오고, 그걸 반격하면서 주방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퇴출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바로 넥마이크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가 전면에 서고, 여기 나머지가 측면을 맡아서 뚫기로 했습니다.”

-도착 15초 전.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방금 치렀던 전투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게임 속 이강태가 되면서 특성만 얻게 된 게 아니라, 눈이나 머리도 더 좋아진 게 확실하다는 사실.

수치화하거나 기록해서 비교할 수도 없었지만, 아마 결과로 드러날 것이었다.

총을 챙기면서 일어났다.

“준비들 합시다.”

* * *

이반은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었다.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든, 오판한 작전 속에서 자멸하든, 아니면 둘 다든.

다만, 임무가 완수되었으면 했다. 그 자신은 중도에 전사해도 상관없었다. 주어진 일만큼은 끝내야 했다.

그게 그가 가진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반이 완수해야만 하는 이번 임무는 요구조자의 생존이었다.

만약에 그가 죽었다가는 제108근위공수연대와 러시아 해병 연대의 이동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오직 그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으니까.

살아 있어야 했다.

걱정과 함께 어느새 먼지가 가라앉은 골목으로 발을 디딜 무렵.

수 미터 떨어져 있던 제이크와 호세, 마커스가 합류했다.

“정확히 오셨네.”

강태가 환영했으나, 제이크는 이반을 먼저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더플백처럼 들쳐 멨던 두 발이 잘린 사내가 없는 모습.

강태의 짐작이 제이크의 입에서 나왔다.

“당신의 동료는 심장이 멈춰서 건물 안에 두고 왔습니다.”

“……!”

전우의 죽음에 이반의 눈가가 떨리는 사이, 강태가 얼른 끼어들었다.

“요구조자 데리러 갑시다. 일단 임무부터 합시다, 그래야 시신이라도 수습하지.”

“…알겠습니다.”

화를 삭이는 듯 힘겨운 답이었다.

제이크 역시 이를 이해하는 듯 눈을 마주하고, 총을 고쳐 쥐자 강태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진짜로 들어갑시다.”

터벅, 거리로 나온 순간 강태가 전면으로 총을 겨누며 이동했고, 그 뒤로 이반과 제이크를 비롯한 팀원들이 줄줄이 나오며 측면을 겨누었다.

문, 창문, 골목, 담벼락 위, 2층, 발코니, 옥상까지.

감시할 게 너무 많았으나, 숙련된 용병과 요원들답게 말없이도 서로 간의 구역을 파악했다.

그리고 곧 교전이 시작됐다.

투다다다다다다! 투다다다다당!

연발로 갈겨 대는 총소리가 울렸고, 이반이 빠르게 응사했다.

타다당! 타당! 탕! 탕!

타다다다다당!

동시에 무전기에서 강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 밀착!

이반이 움찔했다.

응사하느라고 잠깐 주춤했는데, 강태가 정말 쉼 없이 나아간 탓이었다.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단발 속사를 하면서 연이어 걸음을 옮기는 모습.

텅! 텅! 텅! 텅! 텅!

그가 멈출 때는 단 한 가지의 경우였다.

“재장전!”

그 말에 가까이 있던 이반이 서둘러 앞을 겨누었는데, 찰나의 순간에 놀라고 말았다.

‘다 죽었어?!’

가까이는 50M, 멀리는 100M 내외의 적들이 엎어져 있는 게 광학 조준경 너머로 확인됐다.

그것도 몸이 온전하게 드러난 게 아니었다.

발코니의 벽돌 벽에 걸쳐서 죽고, 창문에 머리만 빼 놓고 피를 흘리고 있는 적들이 꽤 많았다.

나름 엄폐해서 싸웠는데, 그걸 처리했다는 뜻.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걷는 속도를 낮추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그마저도 결국에 피격당해서 쓰러질 가능성이 컸고.

재빠르게 견제 사격을 하는 와중에도, 이반의 머릿속에 감탄이 머물렀다.

‘이 정도면 2, 3명이 아니라… 5, 6명의 역량이야.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라.’

이반이 놀라면서 탄창을 거의 다 비워 가는 사이.

“교대!”

강태가 어깨를 짚으며 나왔고, 곧장 총구를 겨누면서 격발했다.

아까처럼 총성이 바닥에 깔리듯 울렸다.

텅! 텅! 텅!

그리고 강태는 또다시 계속해서 나아갔다.

조금 전에 멈췄던 게 여유를 부렸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렇게 측면 사격을 버겁게 잇던 무렵, 이반은 깨달았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아니, 벌써 도착해 있었다.

“2층 진입! 적 발견!”

텅! 텅! 텅!

단발 속사가 울려 퍼지고, 강태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반과 남은 팀원들도 줄줄이 올라간 사이, 건물 안쪽에서부터 AK-47의 연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총알이 문가로 빗발치듯 쏟아졌다.

투다다다다다당!

피슝―!

허리를 숙이면서도 총을 놓지 않은 강태가 한 걸음 반을 더 들어갔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텅! 텅―!

털썩, 총소리 대신에 사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였던 이반도 얼른 안으로 들어가면서 총을 겨눴다.

정확히는 강태의 반대편인 창가 쪽.

그리고 안쪽 건물 내부에 적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건물 내부가 아니라, 맞은편 건물 2층에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다다다다당!

쨍그랑!

총알이 빗발치고, 유리가 깨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상체를 낮춘 이반도 재빠르게 응사했다.

타다당! 탕탕! 타다당!

적이 넘어가고, 이반의 눈이 번뜩였다.

옆에 한 명의 적이 더 있었다.

얼른 AK-47을 빠르게 겨누고, 다시 격발해서 맞혔다.

타당!

어깨와 쇄골 부근에 한 발씩.

좋은 사격이었지만, 이반의 두 눈은 크게 흔들렸다.

‘씨발……!’

욕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분명 적을 맞혀서 쓰러뜨렸는데, 이어지는 상황이 아주 나빴기 때문이었다.

넘어지는 적이 뭔가를 던지고 있었다.

이제 시체가 된 손끝에서 날아오는 그 무언가가, 이반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손잡이가 달린 대전차 수류탄.

마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이반은 직감했다.

대전차 수류탄은 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날아오는 궤적이 그랬다.

따지자면 이제야 적의 손끝을 떠났지만, 죽기 직전까지의 투척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상이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터엉―!

소음기를 먹은 묵직한 총성이 울리면서, 동시에 맞은편 건물이 폭발했다.

충격과 화염이 밀려오는 순간.

이반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면서, 그리고 자세를 낮추면서 깨달았다.

대전차 수류탄이 공중에서 터졌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총알을 보진 못했지만, 분명 강태가 맞혔을 것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뒤늦은 폭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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