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작전지역은 직선거리로 65마일가량 떨어진 루트바라는 지역일세.”
그 말과 함께 사진 몇 개가 스크린에 추가로 떠올랐다.
루트바를 촬영한 이미지였다. 위성사진과 항공사진, 거기다가 직접 카메라로 찍은 것까지.
이내 플레이 했던 게임 장면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났다.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자, 피격된 요구조자, 도비탄과 온갖 파편과 돌조각 따위로 피범벅이 된 동료들.
빡세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곧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려 주듯, 론의 입에서 부연 설명이 덧붙었다.
“확인된 바는 없으나, 루트바가 과거 ISIL의 영역이었던 만큼 비슷한 계통의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공격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네.”
의심이 아니라, 정확했다.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 급조 폭발물)를 매달고 달려들 것이었다. 웬 10대 꼬마는 알라의 요술봉인 RPG-7을 발사할 거였고.
심지어 공격해 오는 인원도 수십 명은 됐다.
뭐, 게임 속에 들어오자마자 반군 20명을 퇴치해 본 경험이 있긴 하지만, 오늘의 작전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당히 공격하고 도망가던 부패한 군인들이 사람이라면, 종교적 신념으로 눈알이 뒤집힌 적은 괴물이나 귀신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이내 브라보 팀에서 볼멘 목소리가 나왔다.
“근데 거기에 미군 기지 하나 있잖습니까? 거리도 10마일밖에 안 될 텐데.”
고속도로가 통하는 이라크 서부의 요충지 중 한 곳인 루트바에는 몇 년 안 된 미군 기지도 있었다.
현재 미군 대다수가 이라크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아직 소수가 남아 있는 상황.
론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군 기지가 하나 있긴 하지만, 구조 요청은 우리에게 했네.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걸세.”
“잠깐만요, 그럼 우리가 구조를 다 해야 한다는 겁니까?! 정찰이 아니라?”
화들짝 놀란 되물음이 들려왔다.
그럴 만했다.
정찰과 구조는 임무의 난이도가 달랐다. 심지어 상대는 정신 나간 족속들이 아닌가?
물론 브라보 팀을 포함해서 대다수가 파병과 실전 경험을 가진 용병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죽음 앞에서 당당한 건 아니었다.
우리 찰리 팀이 유독 셀 뿐, 보통은 죽는 걸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번 임무는 죽을 가능성이 꽤 컸다. 1개 해병 연대와 공중 지원을 받았던 저번 작전과 달리, 이번에는 미군이 아예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었으니까.
이윽고 분위기를 수습하듯 론의 나이 든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우리만이 아니라, 요르단과 바그다드의 PMC도 지원하러 올 걸세. 그리고 선두에는 여기 세 사람이 나설 거고.”
그제야 앉아 있던 이들이 일어났다.
AK-47이 방탄복과 워 벨트에 부딪혀 절그럭거리는 소음이 난 뒤.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반입니다. 먼저 우리의 주목적은 구출이 아닌 지연입니다. 지원이 올 때까지 적의 이목을 끌고 버티면 됩니다. 상황이 악화되지 않는 한, 무리해서 구출을 시도하진 않을 겁니다.”
“…….”
그가 임무를 정확하게 짚었는데, 동시에 장내의 시선이 바뀌었다.
내용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 영어로 발음했음에도, 이름이나 억양 모두 미국의 PMC인 G&G Corp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브라보 팀에서 물음이 튀어나왔다.
“…러시안?”
그 짐작이 맞았다.
눈앞의 이반은 낫과 망치, 붉은 별을 상징했던 나라, 러시아에서 온 이였다.
미군이 개입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레플이 제작되고 배포된 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이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사이가 역사적으로 꾸준히 나빴기 때문이었다.
갈등과 제재가 반복되어 온, 사실상 적대적인 관계.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이반도 말끔하게 면도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긴 했지만,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이나 단순한 용병이 아니었다.
바로 스페츠나츠 출신의 SVR(러시아 해외정보국) 요원.
그것도 게임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다행히 여기 있는 목적만큼은 방금 말한 바와 같았다.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게임이 더욱더 재미있었다.
게임명인 라스트 레드 플래그(Last Red Flag)에 속하는 빨간 나라를 도와주는 꼴인 데다가, 이 순수한 일이 서로 간의 오해로 번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SVR 대원들이 있는 것부터 그랬다.
우연이 아니었다. 의뢰 요청을 들은 국무부 대외협력국에서 론에게 의뢰를 수락하라고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목적은 구출이 아닌, 내막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SVR 인원들과 요구조자는 누군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등등에 대해서.
그리고 이건 제이크와 레이첼도 몰랐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론과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
적어도 여기 있는 모든 팀원은 이반을 SVR이 아닌, 러시아군 출신의 용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어도 상관없었고.
그사이에 러시안이냐고 질문을 받았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반이고, 의뢰인의 대리인일 뿐입니다. 그럼 작전 설명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
일부가 다소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굳이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러시아인이라고 하더라도 상부의 허락을 다 받고 여기까지 와서 브리핑하는 사람을 내쫓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곧 무언의 긍정을 인지한 듯 이반의 말이 이어졌다.
“현재 시각인 10시 28분에서 9분 전, 10시 19분에 마지막 무전이 있었습니다. 적 규모는 2, 30명이고, 요구조자 4명 중에서 부상자가 1명 발생했으며, 인근 건물에 숨어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현재는 연락이 두절됐으나, 생존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곧장 제이크의 입이 열렸고, 이반이 대답했다.
“2명이 훈련받은 인원으로 각자 AK-47 1정과 7.62㎜ 탄 140발, 마카로프 1정, 10발 탄창 2개를 갖고 있습니다. 충분히 초기 대응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실이었다.
다만, 여기서 작전지역인 루트바까지의 거리가 65마일, 즉 104㎞로 상당히 먼 데다가 안전한 험비가 싹 다 운행 중이어서 일반 SUV를 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다 이건 미래의 일이지만, 도착할 때 즈음에 방금 말한 훈련 받았다는 인원들이 모두 사망하고, 이반을 포함한 3명의 SVR 요원들도 다치거나 죽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작전이 어려웠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바짝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고.
이내 브라보 팀에서 또 물음이 나왔다.
“구출이 아닌 지연을 한다고 했었는데, 그럼 지원 병력의 도착 예정 시각이 언젭니까? 얼마나 버텨야 하는 겁니까?”
“현 시각 기준으로 대략 110분에서 140분 내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PMC에서 오면, 그때 합동으로 구출한다는 겁니까? 거긴 인원이 몇이나 됩니까?”
“우린 구출이 아닌 지연 임무만 수행하면 됩니다. 구출은 조국에서 군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모르지만, 올 일은 없었다.
훈련받았다던 2명은 물론이고, 남은 요구조자 2명도 모두 사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게임 안에서는 내 활약 여부에 따라 저 앞에 서 있는 3명의 SVR 요원의 생사가 결정됐었고.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가 봐야 알 것이다. 남은 요구조자가 살아서 돌아갈지, 아니면 게임처럼 싹 다 뒈질지.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보려는 참인데, 가장 중요한 건 나와 내 팀원들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무렵에 이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작전지역인 루트바는 알 자마쉬와 같은 기후의 사막이지만, 규모는 훨씬 작은 도시입니다. 그 이유로 시가전의 양상을 띠고 있긴 하지만, 건물이 높지 않고 외곽 지역은 장애물이 적은 개활지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고배율의 스코프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전 설명하느라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어느새 손목 시계를 본 그가 장내를 보며 말했다.
“4분 안에 준비 마무리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럼 협조 부탁드립니다.”
적막이 1초 정도 흐른 뒤.
드르르륵─ 드르륵─ 드르르륵─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시아인을 돕는다는 사실이 안 좋아 보였지만, 입 밖으로 불만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상명하복의 군인 출신이고 용병답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반이 말했던 4분의 시간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훈련 센터에 방문했던 우리 찰리 팀이나 먼저 와 있던 브라보 팀까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황.
곧 SVR의 3명도 나뉘어 차에 올랐고, 나는 제이크, 호세와 함께 가장 앞 차에 탔다.
조수석에 이반이 앉아 있는 차량이었다.
그가 운전석의 호세, 뒷좌석의 나와 제이크에게 한 번씩 눈 맞춤을 한 뒤.
곧 전면을 보며 러시아 억양의 영어를 뱉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합시다.”
* * *
타이어가 거칠고 단단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황색의 먼지를 뿜어 냈다.
선두 차량 뒤로 달리는 세 대의 차량은 제대로 된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나빴으나, 속도를 줄이진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넘을 무렵, 작전지역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다른 아랍 국가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희거나 누르스름한 색채로 이뤄진 마을, 루트바였다.
전방을 주시하던 이반이 목소리를 냈다.
“이쪽 도로로 합류해서 진입해야 합니다. GPS 마지막 신호는 좀 더 안쪽인데, 깊이 들어가기는 위험합니다. 입구에서 하차해서 움직입시다.”
이반의 말에 제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SUV는 방호 성능이 떨어져서 IED나 RPG-7이 아니더라도, AK-47에 다 털리기 때문이었다.
대각에서 쏘면, 한 발로 두 명의 머리를 박살 낼 정도.
이내 호세가 빠르게 마을 초입에 차량을 세우고, 모두 내렸을 때였다.
제이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부터 일이 있었군.”
뚜렷한 흔적은 없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오가는 지역민들의 눈치가 좋지 못했고, 멀리서부터 옅은 화약 냄새도 풍겨 왔다.
그리고 몇 걸음 걷자마자, 총성이 들려왔다.
투다다다당─!
멀찍이서 들리는 AK-47의 총격음이었다.
이반을 비롯해서 뒤로 줄줄이 있던 찰리 팀과 브라보 팀 모두 시선을 들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GPS 신호가 찍힌 근처였다.
“빠르게 이동하겠습니다. 잘 따라오십시오.”
동시에 이반이 가장 앞에서 달리듯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이크는 물론이고, 마커스와 호세, 레이첼까지 표정이 굳어 가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화약 냄새가 진해졌고, 날리는 흙먼지에 비릿한 피 냄새 같은 것도 섞인 탓이었다.
그중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강태.
제이크가 바로 뒤에 붙은 그에게 눈짓했다.
“괜찮나?”
몸 상태나 컨디션을 묻는 게 아니었다.
상황이 어떤지, 강태의 직감을 묻는 것이었다.
“안 좋습니다.”
“나도 그래, 젠장.”
제이크가 짧게 답하고서 넥마이크를 작동시켰다.
“다들 집중해, 느낌이 안 좋다.”
그리고 전방을 살피던 순간.
통화하는 아랍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제이크는 그 통화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도망가자마자, 총성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당─!
그것도 아까처럼 멀리서 들리는 게 아니라, 150M 남짓한 거리에서 날아온 총탄이었다.
피슝─! 핏!
총알이 근처로 날아오며 날카로운 소음을 낸 순간.
“전방에 적!”
제이크가 외치고, 팀원들이 머리를 낮추거나 벽과 건물 따위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반격하려던 찰나.
텅! 텅! 텅!
소음기를 거친 HK416의 묵직한 총성이 바닥에 깔리듯 울려 퍼졌다.
거의 연사나 다름없는 빠르기였는데, 몸을 던져 피했던 제이크가 적 방향을 겨누려다가 멈칫했다.
강태가 이동하던 자세 그대로 견착하고 사격한 것이었다.
심지어 막 발을 옮기고 있었다.
짧은 적막이 깔린 가운데, 강태의 목소리가 넥마이크를 통해 제이크의 인이어 수신기로 전달됐다.
-다운.
상체를 숙였던 이반도 놀라서 강태를 쳐다봤다.
말도 안 되는 솜씨였다.
피격과 반격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고, 거기다가 사격 역시 정확했다.
‘…미리 조준이라도 했던 건가?’
보고 쐈다고는 생각되질 않았다.
심지어 총알이 날아오는 와중이었다. 한데 꿋꿋이 이동하면서 쏘다니?
이반도 이런 훈련과 상황을 안 겪어 본 건 아니었다. 담력 훈련도 많이 해 왔었다. 하지만 실전과 훈련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코앞에 엄폐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한데 강태는 총성의 한가운데에서 계속해서 나아가면서, 아주 침착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약속된 훈련장에 있는 것처럼.
또 강태의 입이 열렸다.
“미식별자 3명 출현, 병기 미확인… 아니, 확인. RPG-7 식별!”
보고와 함께 강태의 총구가 움직였다.
그리고 제이크와 이반이 자세를 잡고 사격하려는 순간, 강태의 HK416이 먼저 총성을 터뜨렸다.
텅! 텅! 텅! 텅! 텅! 텅!
이윽고 광학 조준경 너머로 시체들을 들여다본 강태가 입을 열었다.
“전방, 올 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