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오전 9시경, 미국 워싱턴 D.C, 해리 S. 트루먼 빌딩, 국무부 대외협력국 국장실.
국장 로버트 엔더슨 앞으로 많은 보고서가 올라왔다. 전자 결재가 필요한 온라인 보고서부터 내용 일부를 삭제 처리해야 하는 기밀 자료까지.
그중 로버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알 자마쉬에서 생포했던 반군 부사령관인 무함마드 아힐리 다우드 알 누만, 일명 시나몬에 대한 보고서였다.
정확히는 이튿날부터 관타나모의 델타1 포로수용소에 집어넣고, 정보 분석가를 배정해서 며칠 내내 강도 높은 조사와 심문을 통해 얻은 유의미한 결과.
당시에 함께 체포되었던 가족과 수하들의 대면 질의 자료까지 정리된 것이었다.
‘많이도 나왔군.’
로버트가 제법 두툼한 보고서의 겉면을 넘겼다.
자필로 쓴 자술서와 조사하고 취조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은 가볍게 살펴보는 정도로 넘어갔다.
습격을 언제 사주했고, 어떻게 수습했는지 그리고 체포됐을 때의 상황 따위는 곁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관타나모에 수용된 이유는 미국 국민을 살해하도록 사주하고 지시한 테러리스트의 혐의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세르게이 볼코프.”
로버트가 이름을 잘근잘근 씹듯이 읊조렸다.
러시아계 국제 범죄자로 인터폴 적색 수배자이며, 발견 즉시 체포하거나 체포가 어려우면 사살하도록 사전 허가된 그 세르게이가 로버트에게 최우선이었다.
이유는 소속 직장인 대외협력국이 창설된 단 하나의 목적과 같았다.
미 안보를 위협하는 국외의 적 제거.
9·11테러를 예방하지 못함으로써 22개 정부 조직을 통합하여 국토안보부를 설립했던 것과 비슷하게,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서 설립된 것이었다.
따지자면 대략 3년 전, 제이크가 국무부에 고용되어 PMC로 취직했던 때와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타깃은 바로 세르게이였다. 물론 세르게이 한 명만이 아니라, 관련된 자들까지 추적하는 와중이었고.
시나몬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과정은 여론과 백악관의 의견에 밀려서 대규모 작전으로 변질됐지만.
다행인 건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손에 들린 보고서가 그 증거였다.
[…세르게이 볼코프로부터 무기와 물자 따위를 지원받은 사실이 확인됨. 무기, 물자 리스트 별첨.]
그러나 아쉽게도 이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세르게이는 아랍에 나타나지도 않은 채, 무기를 지원하고 정보를 공유해 줬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련된 브로커 한 명은 이미 실종돼서 나타나지도 않았고.
하나, 로버트의 표정이 어둡진 않았다.
아직 하나가 더 있었다.
‘스캇 에반스.’
G&G Corp 찰리 팀 소속이었으나, 정보 유출의 혐의로 조사 중인 인물.
그가 뱉어 낸 자료는 얼마 안 됐는데, 다행히도 개중에 로버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메일이 남중국해 타릴 제도로 우회하며 흔적이 끊긴 것으로 확인됨. 타릴 제도 정보 별첨.]
로버트의 손이 곧장 타릴 제도가 첨부된 페이지로 넘겼다.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리면서.
‘나쁘지 않군.’
메일을 타릴 제도로 우회시킨 이유나 근거는 아직 없으나, 물리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이 아랍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요원들의 값비싼 목숨이 표적이 아닌 주민들의 테러로 허망하게 사라지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외교적인 상황도 아랍보다 나았다.
적대국인 중국을 제외하고는 타릴 제도와 관련된 이해 관계국 대부분이 우호적이기 때문이었다. 태국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은 공항이나 항구를 포함해 군사시설까지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타릴 제도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까지 각자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섬이면서 동시에 어느 나라도 소유하지 못한 곳이었다.
또한, 스프래틀리 군도처럼 석유가 나온 것도 아니어서 분쟁이 격화되지도 않았고.
민간인도 없고, 있다고 해도 잠시 머무르는 어부들이 전부인 땅이 바로 타릴 제도였다.
‘그렇다면…….’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 지도가 펼쳐지고, 동시에 주변국과 파견 중인 몇 안 되는 직원들의 위치가 표시되면서 가능성 있는 계획이 정리되었다.
‘고고도 정찰기를 띄워서 항공 자료를 분석하고 동남아시아에 배치된 요원을 현장으로 투입… 그렇게 확보된 정보를 토대로 마무리 짓든지, 특수부대원들로 비정규전을 벌이든지, 훈련을 가장해서 공대지 미사일로 의심 지역을 아예 날려 버리면 되겠군.’
물론 상세한 건 휘하 부서장들을 소집해서 회의를 거치고 가다듬어야 하겠지만, 이 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버트가 곧 인터폰 버튼을 눌러서 비서를 호출했다.
“30분 안에 부서장급 회의 준비해.”
-네, 국장님.
짧은 대답 뒤로 로버트 역시 바로 회의 준비를 하려고 했었다. 남중국해 인근의 각종 정보와 군사 자료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한데, 모니터 한쪽에 나타난 알림에 회의 준비를 멈추고 말았다.
[A2320002 - 사이렛 매트칼 합동 작전의 건]
레이첼이 보낸 직보 메일이었다.
그것도 제법 급하게 송신한 것으로 보였다.
미국 시간으로 오전 8시 30분에 작전을 시작했었는데, 9시인 지금 그 결과가 도착했으니까.
마우스 커서를 옮긴 로버트가 곧장 보안 처리된 전자메일을 열었고, 타이핑된 보고서와 첨부된 영상 파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뒤.
“…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강태가 2층의 한 방에서 테러범을 제압하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에서 기가 막힐 만큼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걸 어떻게… 아니…….”
로버트의 입에서 혼잣말이 주춤거리면서 흘러나왔고, 손은 레이첼의 바디캠 영상을 다시금 재생시켰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촬영이 시작된 작전 준비 지역부터 작전 종료하여 집결지로 돌아오는 부분까지,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집중해서 봤다.
그러다가 곧 노크 소리에 깨어나듯 움찔했다.
똑똑.
-국장님, 회의 준비 다 됐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로버트가 일시 정지된 영상 앞에서 짧게 대답했고, 곧 국장실 안으로 휘하 부서장 다섯이 들어와 회의용 테이블을 채웠다.
준비된 태블릿 PC와 파일철 따위를 각자 자리마다 올려놓을 무렵.
여전히 제 모니터를 빤히 보던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제이크가 그랬었나? 하느님께서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을 거라고…….”
“아, 네. 맞습니다.”
부서장 한 명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로버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그것보다 더한 은혜도 있을 수 있겠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도…….”
“네?”
이해하지 못한 반문을 놔둔 채, 로버트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태의 뒷모습이 보였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테러리스트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키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이는 내통자나 정보원이 있다고 해결될 게 아니었다.
첫 번째 작전이었던 시나몬 체포 역시 아무리 털어 봐도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즉, 이 모든 건 온전히 강태가 만든 성과였다.
‘괴물 같군. 그래, 델타에 제이크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리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려나?’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곧 로버트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이어졌다.
‘…데려와야 한다.’
강태가 가진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각이나 사격만큼은 영상에서 나왔듯 최고 중의 최고였다.
CIA나 국토안보부도 보자마자 탐을 낼 터.
짧게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부서장에게 턱짓했다.
“회의가 끝나면 스카웃 프로그램도 준비해 두게.”
“아, 예. 알겠습니다.”
왜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일을 시키면 해야 하고, 또한 로버트가 흘렸던 몇 마디의 말이 단서가 된 덕분이었다.
물론 내막을 모르는 부서장은 그저 대단한 인재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사이.
로버트가 상석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세르게이 볼코프가 남긴 흔적이 남중국해의 타릴 제도에서 나왔네.”
“……!”
부서장들의 표정이 일순 확 변했다.
대외협력국에서 일 순위로 체포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범죄자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곧 로버트의 말이 이어졌다.
“인근 지역의 휴민트(HUMINT: 인적 정보)를 포함해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ISR(Intelligence, Surveillance, Reconnaissance: 정보, 감시, 정찰)자원부터 봐야겠어.”
* * *
“이보게, 친구. 이름이 리라고 했나? 한국인이지?”
“아, 맞아.”
SSE(Sensitive Site Exploitation: 정보 수집)가 끝나갈 무렵, 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이 내게 말을 붙여 왔다.
외주 용병 역할이라 경계 중이었는데, 그가 내게 빙긋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아까의 일 때문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주 반가워, 알 자마쉬라는 이국의 땅에서 공동의 적을 가진 전우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 북한 말하는 거지?”
복무 중이던 시절에 초빙했던 외부 강사에게서 배운 기억이 났다.
이스라엘과 북한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 역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사이가 좋지 못할뿐더러, 북한이 이스라엘의 적국인 이슬람 국가들에게 무기와 야전 교리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윽고 내 생각이 맞았다는 듯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꼭 가 보고 싶은 나라거든.”
“북한에?”
“그래, 예를 들자면… 너희가 킴을 죽이거나 평양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수행할 때 말이야. 만약 날 불러만 준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오… 사이렛 매트칼이면 아주 훌륭하지. 근데… 나도 용병 신분이야.”
쓴웃음이 절로 났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나는 애석하게도 군인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기서는 다행히 군인 비슷하게 용병으로서 활동하고 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마냥 좋은 일이라고 할 순 없었다.
내 목숨이 걸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위장도 아니었어? 오, 이런. 한국은 미쳤군, 너 같은 군인을 전역시키다니. 아니면 사고라도 쳤나?”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좀 있었어.”
“아쉽게 됐겠어, 너 같은 대원이면 1개 분대만 꾸려도 그 돼지 새끼의 머리통에 총구멍을 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나도 꼭 좀 해 보고 싶긴 한데…….”
얘기가 그렇게 흘러갈 무렵.
SSE를 완료한 대원들이 작전지 정리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내게 말을 걸었던 이도 인사와 함께 헤어졌고.
나도 우리 팀에 합류할 때였다.
제이크가 어느새 아주 진중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나를 돌아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아주 좋은 소식이야, 리.”
“뭡니까?”
“전에 말했던 훈련장 말이야. 예약이 취소돼서 내일 사용할 수 있다더군.”
“……?”
“내가 말했었나? 전술 사격에 체력, 근력까지 전부 테스트할 수 있는 곳이라고. 내일은 정말 환상적인 하루가 될 거야, 리.”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눈을 껌뻑이자, 그가 재촉하듯 손짓했다.
“자, 어서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