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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14화 (14/185)

14화

라레플의 가상 도시인 알 자마쉬는 이스라엘과 직선거리로 대략 400㎞ 떨어진 곳이었다.

포장도로가 깔린 육로는 그것보다 훨씬 멀었는데, 중요한 건 알 자마쉬로 들어오는 모든 길이 다른 나라로부터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서쪽으로는 요르단, 위아래와 동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까지.

즉, 세 나라 중 어느 한 곳을 통과해야만 알 자마쉬로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협조조차 받을 수 없었다.

미국 같은 서양 국가가 아님에도, 종교와 역사를 이유로 아랍인의 적으로 취급받는 유일한 국가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협상은커녕, 발각되자마자 총알 세례를 받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사이렛 매트칼은 달랐다.

각종 침투의 달인이고, 흑색 작전에도 동원되는 베테랑 대원들로 아랍 내에서 최고로 취급되는 군인들이었다.

웬만한 나라를 횡단하거나 종단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집결지인 폐공장에 도착한 찰리 팀이 본 그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부대 휘장을 떼어 낸 사막색 전투복을 입은 30여 명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

“하하하, 드디어 실제로 만나는군요. 어서들 오세요.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풍성한 회색 수염을 가진 아샤프.

지휘관인 그도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전투복에 단독 군장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아샤프가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푸근한 인사와는 전혀 다른, 제이크의 손바닥처럼 굳은살이 붙은 손이었다.

“찰리 팀장, 제이크 러셀입니다.”

“실물로 보니 더 반갑습니다, 아샤프 바리난 중령입니다. 근데 당신은 화면보다 실물이 정말 괴물 같군요. 물론 좋은 뜻입니다. 델타의 괴물이라는 소문을 여러 번 들었거든요.”

“나도 사이렛 매트칼의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 함께 작전하게 돼서 기쁩니다.”

둘의 인사를 보던 강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팀장이 빈말을 안 하는 부류인데… 기쁘다고 할 정도면 진짜 좋은 모양이지?’

이내 그의 시선이 아샤프 뒤쪽에 있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에게로 향했다.

군기가 엄정한 가운데 살기가 넘치는 듯했다.

마치 집결지가 아니라,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이야… 카리스마 장난 아니네.’

동시에 강태의 상념을 깨듯 아샤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반갑습니다, 리. 당신은 실제로 보니까 느낌이 많이 다르군요. 화면에서는 그저 잘생기고 키 큰 젊은 아시안으로 보였는데…….”

눈을 마주친 아샤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왠지 나이가 들어 보이는군요. 아, 외모를 말한 건 아닙니다. 여전히 크고 잘생겼어요. 제가 말하는 건 당신의 눈빛입니다. 생기 넘치는 20대라기보다는… 세월을 겪은 30대, 어쩌면 40대 같아 보이네요.”

강태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눈빛이 3, 40대로 보인다는 말을 처음 듣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몸속에 있는 건 무릎과 골반에 수술 흉터를 가진 서른아홉의 이강태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만큼의 아픔과 괴로움을 갖고 있었고.

‘이 양반이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아니, 혹시 뭘 알아본 건가?’

서브 퀘스트만 줬던 아샤프를 떠올리던 무렵, 말이 연이어 덧붙었다.

“참,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의도도 아니었고요.”

“아, 예. 괜찮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관록 있는 시선만 봐도 믿음이 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훌륭한 작전 수행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아샤프가 강태를 비롯해 제이크, 그 외의 나머지를 보면서 가운데에 있는 조립식 탁자로 안내했다.

이미 작전 지도며 사진과 서류 따위가 펼쳐진 상황.

“자, 이쪽으로 오시죠. 빠르게 브리핑하겠습니다. 34, 아니… 이제 33분 뒤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아샤프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뱉은 말에 호세의 입이 벌컥 열렸다.

“33분? 오, 이런. 생각보다 너무 촉박한데요?”

그 말에 마커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으며, 레이첼도 한숨을 흘려 냈다.

위에서 얘기가 됐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준비하는 과정이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아쉬운 탓이었다.

이동하는 레이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일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대(對)아랍 전략이길래…….’

국무부 연락담당관에게 관련 사항에 대해 물어봤으나, 제대로 된 답변도 오지 않았었다.

그녀도 이 안의 다른 찰리 팀원처럼 관련 정보가 전무한 상황.

그러나 국가에 충실한 요원답게 레이첼은 순순히 작전 테이블로 향했다. 일이 이미 시작됐으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보다 더 위험해서 염려될 뿐.

마찬가지로 국무부의 지시를 받은 제이크는 시간이 없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성큼성큼 탁자로 다가갔다.

최대한 빨리 정보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남은 팀원들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서 테이블로 몰려드는 사이.

반걸음 빠져서 바라보고 있던 강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였구나.’

* * *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와 사진 등을 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게임 속의 아샤프가 줬던 서브 퀘스트였다. 그때와 모든 게 같았다.

타이밍이 훨씬 앞당겨졌을 뿐.

이에 피식 웃었으나, 금세 입술을 씹고 말았다.

‘이게… 성공하긴 하는데…….’

걸리는 게 있었다.

급조 폭발물, 일명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퀘스트였다.

천만다행으로 찰리 팀은 멀쩡했지만, 사이렛 매트칼의 대원이 당했었다.

두세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정확히 몇 명이 다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애초에 사이렛 매트칼을 얼굴이나 이름조차 모르는 게임 속의 흔한 특수부대원으로 여겼고, 게임 중에도 이렇다 할 교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FPS 게임이 그렇듯 그냥 엑스트라 몇 명 죽는 걸로 생각했었다.

사이렛 매트칼이 참 대단하긴 해도, 내가 동경하거나 좋아하는 군인들도 아니었고.

‘근데 지금은 아니지.’

한쪽에서 장비를 점검 중인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은 모두 숨 쉬는 진짜 인간들이었다.

적이 아니라면, 이 안에는 죽어도 되는 엑스트라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죽도록 놔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게임에서야 엑스트라들이 죽는 게 당연하지만, 여긴 엄연한 현실이었으니까.

우군이 죽어서 좋을 건 없었다.

‘짱구 좀 굴려 보자… 이게 어떻게 되더라…….’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세부 사항을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장면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메인 스토리만큼 자주 했던 에피소드가 아니어서 쉽게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임팩트 있던 과정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건물 진입, 격실 수색, 적 발견, 추격 그리고 폭발까지.

‘그래, 2층 발코니에서 터졌어…….’

2층 발코니에서 밖으로 내려가던 타깃이 방으로 진입한 사이렛 패트칼을 보고 다급하게 IED를 터뜨렸었다.

추격해 오던 대원들이 그 폭발에 휩쓸렸었고.

‘이걸 어떻게 하나…….’

타깃을 잡을 궁리를 하던 무렵, 아샤프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뜨렸다.

“리? 듣고 있죠?”

“그럼요.”

귓등으로 대충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쉽게 이해했다.

게임과 똑같았으니까.

문제는 그대로 진행하면 IED 폭발로 대원들 여럿이 죽거나 다친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슬쩍 목소리를 냈다.

“제거하려는 타깃 말입니다, 무슬림 급진주의자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작전 정보를 공개했는데, 타깃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어서 그걸 짚으면서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자살 폭탄 조끼 같은 걸 착용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그것도 밤이나 새벽이면 정신없어서 실수할 텐데, 이런 대낮이면 버튼을 누를 가능성이 클 것 같아서 말이죠.”

“그 점은 우리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책은요?”

“생포나 사진 촬영이 어려울 테니, 살점을 갖고 돌아가서 DNA를 확인할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헛웃음이 날 뻔했다.

피해를 고려하는 게 아니라, 타깃 사살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다니?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다.

그러나 불 보듯 뻔한 죽음을 아는 상황에서 가만있을 순 없었다.

“아뇨, 피해를 말하는 겁니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씀드렸듯이 찰리 팀은 후미에 있을 거라서 위험이 덜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고, 그쪽 대원들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장비를 정리 중인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 쪽으로 턱짓했다.

설명을 하던 아샤프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그의 입이 열렸다.

“죽음을 각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보다는 이 작전이 세 번째라는 게 중요합니다.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우리는 이미 타깃을 두 번이나 놓쳤습니다. 요르단과 이라크에서 각각 한 번이고, 이곳 알 자마쉬가 세 번째죠.”

설명하던 아샤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서 놓치게 된다면, 놈은 텔아비브에서 폭탄을 터뜨릴 거고 우리는 네 번째 기회를 노려야 할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전에 놈을 죽여야 합니다. 내 코앞에서 폭탄을 터뜨리더라도 말입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이건 라레플을 수십 번이나 플레이 하면서도 듣지 못했던 얘기였다.

그저 의뢰를 완료해서 추가 수당을 받아 장비를 업그레이드했었고, 명성을 쌓으며 업적을 경신하는 데만 집중했었다.

다른 오픈 월드 FPS와 마찬가지로.

물론 스토리며 캐릭터를 즐기긴 했지만, 거기서 아샤프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그는 퀘스트를 주는 NPC였을 뿐.

이런 사정과 각오를 갖고 있는진 전혀 몰랐다.

며칠 살았다고 현실감이 무뎌지고 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또다시 깨달았다.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유감입니다.”

이에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을 했는데, 아샤프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부 얘기하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나는 리의 말이 고마워요. 어떻게 보면 우리 대원들을 걱정해 주는 말이잖아요? 만난 지 30분도 안 됐는데 말이죠.”

어느새 그의 입가에 동네 아저씨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자, 그럼… 벌써 출발 5분 전이군요.”

나도 따라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기서 예언을 할 순 없고… 결국에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네.’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이 아니라, 내가 그 타깃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고려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날 믿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군인의 기본이라고 여기는 특성과 라레플을 플레이 하면서 쌓았던 정보들.

5분 동안 다시금 타깃에 대한 정보들을 헤아렸다.

폭발 반경, 위치, 타이밍까지.

준비가 되지 않아 상황이 잘 그려지진 않았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해 보자, 씨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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