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냥 저렇게 물어본다고……?’
짧은 순간, 레이첼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렇게 직설적이고 간단하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
즉시가 아니라,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서 유대감을 키우고, 긴장과 완화를 이어 가다가 자연스럽게 물어봐야만 했다. 그래야 신뢰성 있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인위적인 답을 내어 놓을지도 몰랐다.
아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대답을 고칠 가능성이 컸다.
대놓고 정보원이나 내통자가 도와주냐고 묻고 있었으니까.
‘돌려 말하진 못해도, 단둘이 물었어야지.’
그뿐만이 아니라, 강태라는 사람도 종잡기가 어려웠다. 얼마 전에 말을 걸었을 때도 그랬지만, 순순히 대답하다가도 가끔씩 틀어지곤 했었다. 오늘은 아예 대놓고 돌려 말하지 말라고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강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첼은 그저 국무부 소속 요원으로서 명령을 받아 강태를 파악했을 뿐.
개인적으로 강태는 배신자를 찾아내고, 망설임 없이 발포하고, 작전까지 훌륭하게 완수한 팀원이었다.
물론 시나몬 체포 영상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끼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더한 의혹은 품을 수 없었다.
반군이 서 있는 위치까지 암기하고 합을 맞춘 뒤에 연기를 했다던가, 간단하게 투시 초능력을 썼다면 모르겠지만, 내통이나 정보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탁원할 감각과 눈치 그리고 운과 우연으로 일궈 낸 완벽한 성과라고 봐야했다.
그사이에 강태의 입이 열렸다.
“물어볼 것 같긴 했습니다.”
타이밍이 워낙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을 뿐, 그도 예상을 못한 건 아니었다.
특히 3층에 있는 비밀 통로에 대해선 그 누구라도 물어볼 만했다. 격실을 수색하는 절차 중에 방구석의 양탄자까지 들춰 보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훈련에서도 특이 사항이 있고, 실전에서는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강태가 나름 대답을 준비하면서 입을 열었다.
“정보원은 따로 없습니다.”
“그래, 알았네. 나중에 정보원이 생기면 말해 주게. 아니, 뭐든 좋네.”
“아, 예. 그럼요.”
추가 설명을 준비하던 강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의 양탄자가 이상하게 구겨져 있다느니, 느낌이 쎄했다느니 하는 변명을 데려던 참이었다.
‘…역시 성미가 보통이 아닌 양반이야.’
물어보고 대답을 수용하는 모습이 모두 명쾌하고 간결했다.
반면에 이를 본 레이첼의 속은 좋지 못했다.
‘영상에서 의혹을 찾을 수 없고, 팀원을 신뢰한다는 건 알겠지만… 이래서는 물어보는 의미가 없잖아.’
결국에는 그녀가 강태에게 따로 접근해서 티가 덜 나게, 은연중에 대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쉽게 말해서 더 친해져야 했다.
국무부 대외협력국장, 로버트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어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팀원과는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유능한 팀원은 어디든 투입할 곳이 있는 법이니까.
강태를 그녀가 유리한 쪽으로 더욱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 놔야 했다.
직장 동료 같은 사이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야 해.’
레이첼이 그렇게 결론을 내릴 무렵.
강태 역시 그런 제이크와 레이첼을 쳐다보면서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이렇게 넘어가긴 했지만, 레이첼까지 비슷한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아, 로버트 국장이 지령이라도 내렸나? 둘 다 이러는 걸 보면 그거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 둘이 의견 교환 한 건가? 그러기에는 둘이 스타일도 안 맞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나름의 추측을 거치던 강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별거 아닌 걸로 골 아프네, 니미.’
이내 짧게 한숨도 나왔다.
‘그냥 되는 대로 가자, 대가리 아프게 괜히 딴 생각하지 말고. 할 것만 하자, 할 것만.’
레이첼이 그랬듯 강태도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레이첼와 제이크는 적이 아니었고 적이 되지도 않을 거였다.
호세와 마커스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앞으로 배신자가 더 등장할 예정이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없었고 당장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뭐가 어쨌든 간에 작전은 잘 마무리됐고, 의혹이라고 해 봐야 말이 되는 게 없는 데다가 강태도 꿀릴 게 없었다.
‘씨팔 거, 벌써 배가 불렀나? 집중하자, 집중……. 담배 끊었다고 전부가 아니지. 이제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났으니까.’
강태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릴을 바라보는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번뜩였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오전 훈련을 마치고 제이크에게 물어서 병기와 군용 장비의 구매를 대행해 준다는 행정 컨테이너로 향했다.
직원에게 판매 리스트를 한 묶음 받았는데, 원하는 걸 찾다 보니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허… 드럽게 비싸네.”
총기 레일에 부착한 광학 조준경이나 다른 악세서리는 그나마 살 만한데, 당장 바꾸고 싶었던 야투경의 값이 어마어마했다.
[L3Harris Technologies GPNVG-18: $36,500]
우리 돈으로 4,500만 원.
이 외의 모델들도 있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최고 성능에 최신 모델인 GPNVG-18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제 마커스에게 빌려서 테스트한 결과도 그랬다.
시야각이 예상보다 넓고, 화질도 선명해서 작전 수행에 적합했고, 배터리팩이 별도로 제작돼서 헬멧 뒤편에 붙여 무게를 조정하기에도 좋았다.
그런 만큼 이미 제이크와 호세도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레이첼은 12,500달러에 달하는 2안짜리 PVS-31을 사용했고.
오직 입사 한 달 차인 나만 몇천 달러도 안 하는 싸구려를 쓰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넘는 비싼 물건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회사에서 빌려주는 여유분의 장비에 불과했다.
물론 그만큼 상태도 나빴다.
스크래치가 가득했고, 충격을 받아 접지 상태도 불량했고, 화면도 좀 뿌옜고.
“쯧.”
혀를 차고서 핸드폰을 꺼내 계좌 잔고를 봤으나, 역시나 아침에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8,125]
저번 달에 받은 첫 월급만 있었다.
우리 돈으로 거의 1,000만 원에 근접한 금액.
충분히 많은 돈이긴 하지만, 야투경을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제이크가 좀 빌려줄라나…….’
몸을 돌리면서 행정 컨테이너를 나오려던 무렵.
“저기요, 리.”
행정 직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알려 줄 게 있는 모습.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가 알아서 말을 이었다.
“너무 비싸면 할부로 구입하세요. 관련 서류 있으니까 읽어 보면…….”
“할부요?”
“예, 계약 기간에 맞게 월급에서 차감하는 겁니다, 사망하면 보험금에서 차감되고요. 그래서 제한 같은 게 좀 있는데, 험비 같은 것만 아니면 할부는 다 나올 겁니다.”
이건 게임 속에는 없던 거였다.
병기를 취급하는 NPC에게 구입하고 적에게서 노획한 걸 팔거나 보상으로 받는 게 전부였다.
한데 할부라니.
‘이게 현실이지, 사회지, 인생이지. 암…….’
쓴웃음을 삼키는 사이, 직원이 내게 할부 서류를 내밀었다.
“잘 살펴보고 생각 있으면 서명해서 가져오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입 품목을 쓰고 서명까지 마쳤다.
그리고 눈을 껌뻑이는 직원을 향해 물었다.
“지금 사면 언제 옵니까?”
어차피 핵전쟁이 나면 차감이고 할부고 전부 없는 일이 될 거였다. 그게 아니어도 제대로 된 야투경이 없으면 핵전쟁을 막기 힘들 테고.
무조건 사는 게 정답이었다.
“쓰읍, 이렇게 된 김에 딴 것도 좀 살게요.”
생각해 뒀던 품목들까지 전부 체크했다.
대충 봐도 수십 개.
사용 중인 총을 제외하고 헬멧부터 플레이트 캐리어와 워벨트에 걸 만한 잡다한 품목까지 전부 고른 것이었다.
다 더하고 보니 이것 역시 내 월급보다 비쌌지만, 할부가 있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일단 핵전쟁을 못 막으면 돈이고 뭐고 의미 없으니까.
“할부 서류나 하나 더 주십쇼.”
“저, 이러면 월급이 반도 안 들어올 텐데… 진짜 괜찮겠습니까?”
서류를 더 주는 직원의 시선이 흔들리는 듯 보였으나, 개의치 않고 손에서 빼냈다.
“예, 반에 반도 돼요.”
월급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가능한 많이 준비해야만 했다.
시나몬을 체포한 건 좋았으나, 이후로 스토리가 바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바뀌었다. 원래라면 시나몬과 전투를 더 치러야 했는데, 그게 아예 없던 일이 돼 버렸으니까.
그사이에 내 서류를 받은 직원이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차라리 보너스 들어오면 구입하지 그래요? 당신이 반군 수괴를 체포했다면서요?”
“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직장이 그렇듯 PMC에도 상여금 제도가 있었다.
계약서를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아마 월급 외에 위험수당, 추가 수당, 성공 수당 등등 여러 항목에서 상여금이 나올 것이었다.
게임도 그랬지만, 전역하고 난 후 PMC 쪽으로도 알아봐서 어느 정도는 알았다.
물론 무릎이 절뚝거리는 바람에 체력 테스트조차 응시하지 못했지만.
얼른 직원에게 물었다.
“얼마나 들어온 답니까?”
“글쎄요, 보통 그 정도 성과면 월급의 500% 정도는 주지 않을까 싶네요.”
“…허, 보너스 한번 화끈하네.”
무려 4만 달러.
한화 5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웬만한 대기업 초봉에 맞먹는 돈이었다.
군에 복무했을 때도 명절 때나 작전 후에 상여금이 들어오긴 했는데, 액수가 워낙 커서 그런지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전역 전에 상여금 다 합친 거랑 연봉보다 많네…….’
다시금 미국 PMC의 자금력에 감탄할 무렵.
어느샌가 날 유심히 쳐다보던 직원의 입이 열렸다.
“어디 출신입니까? 델타? 씰 6팀?”
자국 중심으로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듣고 있으니 기분이 괜찮았다.
나를 미국 1티어 특수부대 출신으로 봐주는 거였으니까.
그러나 답은 똑바로 해 줘야 했다.
예산이든, 지원이든, 훈련이든, 뭐든 간에 미국 1티어 특수부대에 밀리긴 하겠지만, 내 출신 부대는 20대를 전부 불태웠던 애증 어린 곳이었으니까.
“대한민국 제1공수특전여단.”
나름 힘줘서 대답했다.
그곳은 내 과거이자, 또한 미래로 여겼던 곳이기도 했다.
나이 꽉 채워서 퇴역하려고 했었으니까.
‘…나중에 금의환향이나 해 봐야지.’
쓸데없는 생각을 정리할 무렵.
“아, 한국 사람이었군요. 그럼 재고 있는 거 바로 챙겨 줄게요, 잠깐 있어 봐요.”
그러면서 금방 캐비닛을 뒤적거린 직원이 금세 박스 하나를 채워 내 앞으로 올려놨다.
“확인한 다음에 서명하고 가져가세요.”
4,500만 원짜리 야투경을 제외하고, 밴드나 착탈식 고리, 손전등, 장갑 등등의 자잘한 품목들이 대부분 있었다.
잘 챙겨서 행정 컨테이너를 나오자, 알 자마쉬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내 몸을 덮었다.
그리고 레이첼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전화 좀 받지 그래요?”
“전화요?”
“네, 지금도 하는 중이에요.”
“쓰읍, 왠지 터치가 그지 같더니… 핸드폰도 바꿔야겠네. 참,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돈 나갈 일을 뒤로 하고 용건을 묻자, 레이첼이 통화를 종료하며 답했다.
“찰리 집합이에요. 새 작전이 있는 모양인데… 뭘 그렇게 산 거예요? 모아 둔 돈이라도 다 쓴 거예요? 아니면 복권이라도 된 거예요?”
그녀가 내 박스를 흘깃거리며 보기에 짧게 답해 주었다.
“할부요.”
“…음, 일단 가요.”
주춤한 레이첼의 대답을 듣고,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걸을 때마다 장비가 박스 안에서 덜그럭거렸는데, 그때마다 국밥이라도 먹은 것처럼 든든했다.
무슨 작전이 됐든 어제보다는 더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후진 장비도 극복할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해야 하는 건 핵전쟁을 일으키는 메인 빌런 피칼을 잡는 일이었다.
극복하는 정도로는 안 됐다.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싹 다 물리쳐야 했으니까.
그렇게 지휘 컨테이너 앞에 도달하자, 레이첼이 바로 문고리를 돌렸다.
안에 찰리 팀 전원과 지부장인 론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고 다르게 알파나 브라보는 없는 상황.
“좀 늦었군, 리.”
론의 말에 앉기 전에 꾸벅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핸드폰이 맛이 갔더군요.”
“괜찮네, 오늘만큼은 자네가 주인공이거든.”
“예?”
무슨 소린가 바라보자, 론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번 시나몬 체포 작전을 보고 이스라엘에서 의뢰를 줬거든. 자네를 집어서 말이야.”
“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라레플 안의 수많은 서브 퀘스트 중에 비슷한 경우가 있긴 했는데, 이 타이밍에 이런 방식은 처음이었다.
벌렸던 입을 닫는 사이, 론이 말을 덧붙었다.
“그리고 사이렛 매트칼(이스라엘 특수부대)과의 협동작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