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7화 (7/185)

7화

세르게이의 보스이자 라레플의 메인 악역인 피칼은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캐릭터였다.

피칼이라는 이름조차도 본명인지, 만들어진 호칭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 정부가 교차 검증된 정보와 자료를 어느 정도 확보했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건 그가 벌이는 짓거리였다.

바로 테러.

정확히는 테러 사주와 모의, 지원 따위가 피칼의 영역이었는데, 미국을 상대로는 아주 교묘한 선 타기를 하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 본토와 미군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제3의 단체를 이용해서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방식.

심지어 그것도 직접적인 지시가 아니었다.

알 자마쉬에서 그랬듯이 반군들이 반길 만한 정보를 넘겨주고, 무기나 자금을 우회해서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지시나 명령은 없었다.

그저 배후에서 암약하기만 했다.

또한 그 자금이나 무기 유통 같은 루트 대부분을 공산권 국가들을 통하기 때문에, 개입하기에도 아주 까다로운 스타일이었다.

괜히 메인 악역이 아니었다.

‘염병할 핵폭발도 운빨로 갈긴 게 아니지.’

반면에 그의 오른팔인 세르게이는 스캇의 입에서 흘러나올 정도로 종종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전면에서 피칼의 손발을 대신해서 작전을 실행하는 인물.

그렇다고 자주 나타나서 활보한다는 건 아니었다.

음지나 첩보 기관에서 신분이 알려졌을 뿐이지, 양지나 언론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 놈이 본래 스토리보다 2, 3주는 일찍 등장했으니, 핵전쟁에 개입할 시기도 상당 부분 앞당겨질 것이었다.

그것도 내 추론이긴 하지만, 내가 따로 믿거나 참고할 만한 건 없었다.

라레플을 수십 번씩 플레이 했던 유저는 나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컨테이너를 나왔을 때였다.

“…어떻게 됐어, 리?”

지휘실 컨테이너 앞을 지키듯이 기다리던 마커스가 물어와다.

밤 속에 잠겨 있다가 드러난 어두운 피부 위로 하얀 눈알이 번들거리는 모습.

그도 제이크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괜히 들쑤실 필요 없이 짧게 답했다.

“자백했어.”

“…그럼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스캇이 끌려 나가고 나도 격리되기 전에 마커스와 호세에게 간단하게 설명해 줬었다.

그가 정보를 팔고 코인을 받아 챙겼었다고.

이를 다시금 상기시켜 줬다.

“그래, 사실이야.”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민머리를 몇 번이나 쓸다가 말을 이었다.

“고작 돈 때문에 그랬다고? 다른 이유는 없나? 협박이나 피치 못할…….”

“마커스.”

중간에 말을 끊어서 마커스의 주의를 가져왔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아주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럼 너는?”

“나?”

갑작스러운 지목에 마커스가 반문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여서 설명을 해 줬다.

“어, 너는 협박받거나 고문당하면 팀을 배신할 거냐고.”

“…….”

마커스의 입이 그대로 닫히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 감히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스캇과 마찬가지로 제이크의 직속 후배인 마커스는 라레플에서 국가관이 투철하기로는 손꼽는 캐릭터였기 때문이었다.

스캇이 빠지면서 부팀장을 달 정도.

어느샌가 표정이 구겨지더니, 그의 입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그럴 일은 없어. 내게 팀은 가족이야. 스캇은 내 형보다 더 신뢰했었고…….”

“그래, 그걸 어떻게 배신하겠냐?”

내 말에 마커스가 탄식하면서 주억거리기를 잠시.

곧 나를 바라봤다.

“널 믿지 못해서 미안해, 리.”

“괜찮아, 이해해. 나 같아도 스캇을 더 믿지.”

“말이라도 고맙군……. 호세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말 많은 그놈이 널 괴롭히지 않도록.”

“그래, 들어가.”

상심하는 마커스를 돌려보내는데, 스캇을 해치웠다는 통쾌한 감정이 별로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내게 괴로움을 토로한 마커스의 모습이 더 안타까웠다.

그리고 새삼 또 깨달았다.

캐릭터라고 생각해 오던 마커스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도 현실이라는 것을.

더불어 생각이 더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럼 진짜 내 몸뚱이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기절하는 것처럼 쓰러졌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과연 내 몸은 장판 위에서 썩어 갈 것인지 아니면 시공간이 멈춰서 돌아가게 되는 것인지, 별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답도 없는 일인데, 마커스 때문인지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이 라레플 속의 한국은 어떤지, 이 안에는 또 다른 이강태가 있는지, 그럼 내 동기나 선후임은 뭐 하면서 사는지 등등.

여러 헛된 생각 끝에 웃음이 나고 말았다.

‘염병, 가족이 없는 게 다행이네.’

어머니란 인간은 내가 어렸을 적에 바람나서 이혼한 뒤로 본 적이 없었고, 아버지는 군 입대 할 무렵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서 가족의 ‘ㄱ’도 없었다.

친척들이 몇몇 있다고는 하는데 만나 본 적조차 없으니, 남보다도 못했다.

사귀었던 애인도 얼마 안 가 금세 헤어졌었고.

결국에 혼자 사는 신세였는데, 지금 보니 그게 참 다행이었다.

가족이 있었다면, 만약에 결혼해서 애라도 낳았다면 환장할 만큼 속앓이를 했을 테니까.

이어서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 때였다.

덜컹.

지휘실 컨테이너 문이 열리면서 레이첼이 나왔다.

“리, 아직 안 갔어요?”

“담배 한 대 태우고 가려던 참입니다.”

“나하고 얘기 조금만 할래요?”

“좋지요.”

“…말투가 왠지 나이 든 것 같네요.”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올해 스물아홉 맞죠?”

“아, 예.”

“한국식 나이로는 어떻게 돼요? 한국은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라고 하던데.”

“예, 한국식으로는 서른입니다.”

“그럼 고향은 어디에요?”

“고향은 강원도 홍천인데… 어릴 때 살았던 데라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제 서류에 뭐 다르게 나와 있어요? 자꾸 물어보시네?”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다행히 레이첼이 고개를 저었다.

“서류에는 당신의 출신 부대나 국적 같은 것만 나와 있어요. 다른 건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출신 부대가 어디로 나와 있는데요?”

“제1공수특전여단,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럼 가족 관계는 뭐라고 나와요?”

실제로는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는데 혹여 게임 속에서는 다른가 해서 물어봤을 때였다.

“…….”

레이첼이 대답 대신에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연달아 묻는 게 이상했는지,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을 담아 보내는 것이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도 다르지 않았다.

“먼저 말해 봐요.”

제이크였으면 그냥 대답해 줬을 텐데, 레이첼은 이걸 짚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국가관이나 사명감은 둘이 비슷한데, 하는 짓은 아주 딴판이었다.

특히 레이첼은 의심이나 분석에 타고난 캐릭터.

특수부대 출신도 아닌, 여성의 몸으로 내부 유출이 의심되는 찰리 팀에 괜히 파견된 게 아니었다.

게임이 그저 우연이나 억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가 아주 또렷하고 깊은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됐든 의심 사서 좋을 게 없는 만큼, 나도 늦지 않게 대답해 줬다.

“어머니는 이혼해서 없고, 아버지는 돌아가셔서 없고, 형제자매는 원래 없었고요. 죄다 없는데, 아닙니까?”

일단 당당하게 대답해 주고,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다.

출신 부대를 봐서는 내 신상이 게임 속에 그대로 적용된 것 같긴 했는데, 혹시라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곧 기다리던 레이첼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당신이 맞아요. 그리고 유감이에요, 미안해요.”

사과가 덧붙어서 왔는데, 그것보다는 ‘맞다’라는 대답이 참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이 몸이 진짜 이강태라는 거지.’

게임 속 내가 현실의 나와 같았다.

그러면 이게 평행세계 비슷한 건가 싶은, 쓸데없는 생각이 다시금 이어지려던 때였다.

레이첼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목소리 톤을 높였다.

“하여튼 그나마 다행이에요.”

“예? 뭐가요?”

“스캇 에반스 말이에요. 곧 반군 소탕 계획을 논의할 예정이었는데, 좀 늦었으면 그것도 유출될 뻔했잖아요.”

“예예, 그렇죠. 작전은 언제 합니까? 반군 놈들 빨리 다 털어 버려야 하는데.”

“조만간 하게 될 거예요. 근데 담배 안 피워요?”

레이첼이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보며 물어왔다.

나도 주춤했다.

얘기하다 보니까 담배를 안 태우고 있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깜빡했었네요.”

“담배 피우는 걸 깜빡했어요?”

“아뇨, 오래돼서 잊었는데… 현역 때는 원래 안 태웠습니다.”

입대 전에 피웠다가, 군 생활 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담배를 태우면 호흡이 벅차고, 자연스럽게 체력이 떨어지니까.

그리고 전역한 이래로 다시 담배를 입에 댔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사이에 레이첼의 물음이 이어졌다.

“오래되었다기에는… 고작 몇 달 전이잖아요? 올해 봄까지 현역으로 있었던 걸로 나오는데.”

그랬다. 이제 가을이었다.

봄에 전역했으니, 전역한 지 반 년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민간인이라는 소리.

그러나 이는 게임 스토리일 뿐이었다.

내가 훈련과 작전을 했던 건 무려 10년 전이었다.

지금과 같은 29세였던 시절.

“…느낌은 한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스물아홉이 아니라 서른아홉 같긴 해요.”

“그러게요, 이제는 저도 헷갈립니다.”

새 담배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담뱃갑에 넣었다.

펴서는 안 된다.

전역한 지 10년 된 아저씨가 아니라, 현역이나 다름없는 29세의 청년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팔팔하게 뛰어다녀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