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5화 (5/185)

5화

제이크 다음으로 좋아하는 캐릭터가 레이첼이었다.

비록 군 출신 캐릭터는 아니지만, 실력이나 정신력이 그 이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남자들도 떨어져 나가는 각종 특수 훈련을 수료했고, 그만큼 가치관도 탄탄했으며, 머리까지 비상한 게 바로 레이첼이었다.

거기다가 탄탄한 몸매에 예쁘장하기도 했고.

‘와…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레이첼의 눈에서는 픽셀로 구현하지 못한 생기가 흘러넘쳤고, 악수하느라 잡은 손에서는 땀이 난 것처럼 촉촉했었다.

그녀가 컴퓨터 속 캐릭터에서 진짜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바라보길 잠시,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네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사격 훈련이 일찍 끝나서 왔습니다.”

제이크가 대답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리가 가장 빨리 마쳐서 함께 오게 됐습니다.”

정확히는 10년 된 내 실력이 아니라, 캐릭터를 만들 때 적용했던 3개의 특성 덕분이겠지만, 굳이 군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세상이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떠들어서 좋을 게 없듯이.

그사이 레이첼이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체크인하고 짐 정리해서 바로 내려올게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대답하고서 거구의 몸을 다시 소파에 묻었고, 레이첼이 데스크로 향했다.

로비에 시선들이 힐끗 왔다 가는 게 느껴지길 잠시.

제이크가 돌연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별말이 없군.”

“아, 레이첼 말입니까? 늘씬하고, 예쁘장하네요.”

“……?”

답하자마자, 제이크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소속, 출신, 경력 말이야. 모든 팀원이 물었는데, 자네만 묻지 않았어.”

“아.”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이틀 전에도 그랬지만, 애초에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제이크 입장에서는 별말 없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물론 배신자라고 낙인 찍을 정돈 아닐 것이었다.

메인 스토리상으로는 배신자를 찾을 타이밍이 아니었고, 제이크도 휘하 팀원들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좀 더 묵묵히 지켜보면서 증거가 하나둘씩 드러나면 그때야 행동할 것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다가, 늦지 않게 대답했다.

“팀장이 선별했을 텐데, 어련히 알아서 했겠죠.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오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제이크가 그 말에 이번에는 반대쪽 눈썹을 씰룩였다.

“여자로 본 건 아닌가? 전에 없이 반가워하던데.”

“예?”

그의 시선과 다시금 마주치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보일 만했다. 내 반응도 좀 과장된 면이 있었고, 레이첼의 매력도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제이크의 말마따나, 레이첼이 여자로 보였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30대 초반인 그녀는 예쁘고, 머리 좋고, 실력도 뛰어나서 매력이 충분한 캐릭터였으니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그것도 맞긴 맞는 말입니다. 예쁘장하기도 하고, 우리 팀에 올 정도면 능력도 좋을 거고요. 맞지 않습니까?”

“이성으로 봐도 상관없지만, 임무 수행에 지장이 있으면 안 돼. 최우선은 언제나 임무여야만 해.”

제이크의 눈빛에서 의지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정말 타고난 군인다운 모습.

“그건 걱정 마십시오.”

단단하게 답해 주었다. 나도 핵전쟁이 코앞인 상황에서 로맨스나 찍을 생각은 없었다.

일이 잘 풀려야 연애를 하든 할 터.

이윽고 제이크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했던 훈련이나 한국 특수부대 전술 등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제이크가 몇 번인가 질문을 듣고 대답하길 잠시.

그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봤다.

“그동안은 실력을 숨겼었나? 실력이 뛰어나긴 했어도, 오늘 오전 훈련만큼 잘했던 것 같진 않은데.”

맞는 말이었다.

나는 전역한 지 10년이나 돼서 전투 감각이 가물가물한 상태여야 하고, 게임 스토리에서도 한 달 전에 테스트를 거쳤던 신입에 불과했으니까.

당연히 그때의 기록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성적이 어떤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딱 평균치.

반면에 오늘 오전에 내가 보여 준 건 스페셜포스와 네이비씰, 델타포스 등등 내로라하는 특수부대 출신을 압도하는 결과물이었다.

물론 테스트가 상당히 간단하고 짧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것도 못 됐다.

제이크가 신기하게 바라보기에는 충분할 터.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생각하기를 잠시,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뭐, 이제야 진가를 발휘한 거죠.”

“그게 무슨 뜻이지? 성장했다는 말인가? 고작 한 달 사이에?”

“뭐, 성장에 때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이틀 전에는 목숨이 오갔던 교전도 있었고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멈칫했던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다 돌연 나를 쳐다봤다.

“그럼 제대로 날 잡아야겠군.”

“날이요?”

“레이첼도 왔으니, 영상 촬영하고, 팀원 전부 돌아가면서 테스트 겸 훈련을 진행하지. 훈련장 일정이 잡히는 대로.”

“어… 뭐… 그러십쇼.”

잠깐 고민했으나, 꿀릴 게 없어서 대답할 무렵.

체크인하고 올라갔던 레이첼이 어느샌가 나왔다. 커다란 여행 배낭 대신에 등에 붙는 작은 가방 하나를 멘 모습.

그녀가 일어선 나와 제이크를 올려다보며 시크하게 툭 말을 던졌다.

“이동하죠.”

* * *

레이첼의 임무는 세 가지였다.

PMC인 G&G Corp에 소속된 만큼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되, 국무부에 교차 검증된 보고를 올리고, 제이크 팀 내부의 배신자가 있는지 탐색하는 것.

그간 해 왔던 특작 임무에 비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부의 적은 당연하고, 어쩌면 내부의 적까지 상대할 가능성이 큰 탓이었다.

심지어 국무부가 언제든 꼬리 자를 수 있는 민간 군사 기업이기 때문에, 레이첼의 소속도 CIA에서 G&G Corp로 옮겨야 했다.

졸지에 공무원에서 PMC 계약직이 된 셈.

심지어 사이가 껄끄러운 특수부대 출신들과 부대껴야 했음에도, 레이첼은 모든 명령을 담담히 수행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정의감, 또한 실력까지 충분했으니까.

덜컹.

알 자마쉬의 G&G Corp 찰리 팀 컨테이너 문을 열고, 레이첼은 예상했던 시선들을 받았다.

당황스러워하고 기막혀하는 눈초리들.

부팀장인 스캇이 청소 중이던 총기를 떨어트리듯 내려놨다.

“오, 씨발. 진심이야, 제이크?”

“말조심해.”

“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새로운 팀원이라더니, 여자를 데려올 줄이야!”

마커스도 새까만 피부의 민머리를 쓸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길, 시체 하나 더 보내게 생겼군…….”

“아니지, 멋있는 놈이 갔으니, 예쁜 년이 들어올 차례가 맞잖아?”

곁에 앉았던 호세까지 비꼬는 무렵.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내가 팀장으로서 동의한 일이니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도록.”

그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스캇과 마커스, 호세를 차례로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이어 갔다.

“정 안 되면 덤벼도 좋아, 뭐가 됐든 상대해 주지.”

언성을 높이거나 주먹을 내보이진 않았지만, 위압감이 대단해서 가히 엄포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만 보던 강태가 주춤할 정도.

‘여포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이러려나……. 드럽게 무섭네…….’

금세 반응이 나왔다.

“오우…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토르, 아니, 팀장.”

호세가 가장 먼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고, 마커스도 짧게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팀장.”

마지막에 스캇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얘기를 돌렸다.

“그래서… 출신은 어딘데? 팀장이 동의했다면 적어도 2티어 이상의 출신일 텐데. 거길 나온 여자가 있나? 레인저도 간신히 수료하는 걸로 아는데.”

스캇이 우려를 섞어서 문제점을 짚자, 제이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SAC(Special Activities Center) 출신이야. 사격 솜씨가 뛰어나고, 작전 경험도 많아. 언어와 드론, 전자기기에 특기가 있는 요원이고.”

“잠깐만, SAC? 설마 CIA를 말하는 거야?”

“그래.”

스캇의 눈이 작게 찌푸려지고, 동시에 사과했었던 두 팀원들도 멈칫했다.

CIA하고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엘리트주의에 물든 작자들로 이뤄진 CIA는 협력 작전 중에도 상관 이상으로 간섭하고 종종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전역했는데도 빌어먹을 CIA하고 만나야 한다고?”

“이제는 팀원일 뿐이야, 스캇.”

제이크의 대답이 다시금 낮게 깔렸다.

아주 못마땅한 시선으로 레이첼을 훑던 스캇이 주춤했다.

“크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더는 군말하지 않고 따를게. 저 여자는 몰라도, 너는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전우니까. 믿을게, 제이크.”

스캇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짜증을 털어 내고서 레이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부팀장 스캇 에반스다, 지시에 잘 따르길 바란다.”

“레이첼 포스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레이첼이 악수를 나누면서 다가오는 나머지 팀원들도 바라봤다.

‘호세 페레즈와 마커스 워싱턴. 각각 씰과 델타 출신, 최근 행적에 특이사항 없음.’

그렇게 두 사람과도 인사를 나눴고, 마지막으로 다시금 강태를 바라봤다.

제이크와 함께 호텔로 마중 나왔던 팀원.

‘이름 이강태, 나이 29세. 한국 국적의 아시안이고, 합류한 지는 한 달… 서류나 행적상 특이사항은 없음. 그러나 다른 팀원들과는 달라, 뭔가 있어.’

그녀의 시선이 예리하게 강태를 향했다.

여성인 자신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고, CIA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불만 한번 뱉질 않았다. 마치 신상 정보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지금도 강태는 상황을 관조하듯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만약 이게 성격이라면 아주 너그러운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첼이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리, 아까 인사했지만, 잘 부탁해요. CIA 출신, 레이첼 포스트예요.”

“예에, 잘 부탁드립니다.”

강태가 처음과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맞잡았다.

* * *

레이첼이 들어오면서 드디어 라레플의 메인 스토리를 이끌 팀이 꾸려졌다.

다 해서 여섯 명.

나와 제이크, 레이첼, 마커스, 호세 그리고 배신자 스캇까지.

그중에서도 스캇은 며칠을 더 두고 봤는데, 정말 배신의 ‘ㅂ’자도 티가 안 나는 놈이었다. 오히려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멘탈과 실력도 갖춘, 배신할 거라고는 상상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하긴, 이해는 됐다. 부팀장이라는 자리를 고스톱 쳐서 딴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완전범죄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으니까.

뒤져 보면 증거 확보도 충분히 가능했다.

애초에 스캇을 처리하는 여러 개의 선택지 중의 하나가 법적인 절차였다. 정확히는 조사와 체포.

그것도 당연히 플레이 해 봤었다.

‘노트북이 증거였지.’

암호를 섞은 메일을 보내서 정보를 유출하고, 가상 화폐를 받는 게 스캇이 저지르는 배신이었다.

그리고 때를 봐서 노트북을 챙겼다.

타이밍이 적기였다.

곧장 레이첼과 대화하던 제이크를 찾아갔고, 일부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만, 여기서 해도 됩니까?”

“사적인 내용인가?”

“아뇨, 공적인 내용입니다.”

“그럼 말해도 좋아, 레이첼도 우리 팀원이니까.”

이 말과 상황, 모두 예상대로였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스캇의 노트북을 제이크에게 내밀었다.

“이거 확인 좀 가능하겠습니까?”

“스캇의 노트북을? 왜?”

“술 먹고 들은 얘기라서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술 먹고?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의아해하던 제이크의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첼의 시선도 비슷했고.

그 둘의 시선을 차례로 확인하고, 슬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저도 술을 꽤 먹어서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말해 봐.”

“스캇이 하면 안 될 걸 해서 많은 가상 화폐를 벌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게 마약 거래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루크의 죽음과 연관되었을…….”

“리.”

일순, 나를 부르는 제이크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그 말, 확신할 수 있나? 책임을 져야 할 정도로 심각한 발언이야. 스캇은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델타에서는 내 후임이었고, 지금은 찰리팀의 부팀장이라고.”

“압니다.”

“그 말로는 안 돼, 단순 착오였다고 해도 넘어갈 수 없어. 만약 네가 실수한 거라면, 내 팀에서 나가야 할 거야. 나는 불신하는 팀원과 함께할 생각이 없어.”

아주 정론적인 말이었다.

후임을, 또한 동료를 철썩같이 믿는 제이크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

다 예상한 바였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습니다. 제가 틀렸다면 질 수 있는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나 역시 꿀리지 않게 굳건하게 답을 해 줬다.

이미 해 봐서 알았다. 현실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긴 했지만, 지금하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그때는 너무 늦어서 제이크까지 의심할 즈음이었다.

이내 레이첼의 낭랑한 목소리가 살얼음 같은 분위기를 녹이듯 깔려 왔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확인해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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