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라레플은 결말 이전까지의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게임이었다. 메인 스토리가 유저의 플레이 성향에 따라 변하며, 조연의 사망과 생존 여부도 바뀔 정도.
하지만 수십 번을 플레이 해도 단 한 가지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핵전쟁 엔딩.
이건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부터 핵전쟁으로 끝나는 결과를 정해 놓은 것처럼.
이해는 됐다.
게임은 이름부터 핵전쟁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라스트 레드 플래그(Last Red Flag), 직역하면 마지막 붉은 깃발.
내포된 의미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 대표되는 공산권의 몰락이었다. 이러니 핵미사일이 나오는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선지 메인 스토리가 여러 갈래로 바뀌긴 하지만, 결국에 핵전쟁 쪽으로 흘러가고는 했다.
좀 아쉽긴 해도, 그래도 엔딩 보는 맛이 있었다.
시네마틱 영상에 나오는 새하얀 섬광과 시커먼 버섯구름, 사방을 휩쓰는 충격파, 초토화된 도시 따위가 아주 디테일하고 화려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게임을 할 때나 좋았다.
‘니미.’
지금은 그 핵전쟁 엔딩을 내가 직접 겪게 생겼다.
꿈인지, 현실인지, 환각인지 헷갈려 하거나 볼을 꼬집어서 확인할 이유조차 없는 명백한 현실.
동시에 하나를 더 깨닫고 있었다.
‘아이템 같은 것도 없어.’
어깨에 난 상처는 키보드의 단축키를 눌러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고 큽니다. 일단 압박한 상태로 사무실로 가야겠네요. 스무 바늘은 꿰매야 할 것 같습니다.”
막 도착한 의무 요원이 내 상처를 봐주면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게임 속에 있으니 뭐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현실이었으니까.
더불어 내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죽는 것도 같겠지.’
체험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내 직감이 말하는 바가 그랬다.
‘여기서 뒈지면 끝이다, 끝.’
어깨의 상처를 단축키로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 역시 게임에서 그랬듯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부활도, 재시작도 못할 것 같았다.
혹시 몰라서 가능한 게 있는지, 이것저것 확인은 해 봤었다.
파일 세이브, 파일 저장 같은 단어를 시험 삼아 외쳐 본 데다가 라레플에 없는 것도 소리 내서 발음한 것이었다.
“상태창, 스탯창, 스테이터스… 인터페이스…….”
예상했듯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즉, 이 안에는 내가 만든 캐릭터와 적용한 세 개의 특성만 있을 뿐이었다.
“에라이, 씨팔.”
* * *
습격을 당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임무 역시 자주하던 플랜트 사업차로 온 기업 임원의 경호, 일명 VIP 경호.
이에 단독 군장을 갖춘 총원 6명의 용병이 2대의 험비로 이동하던 상황이었다.
현장을 떠나고 3, 4분 정도 경과했을 때까지도 별일 없었다.
그리고 없을 예정이었다.
떠나온 건설 현장도 아직 가깝고, 도로는 일자로 쭉 뻗어 있었으며, 민가조차 듬성듬성 멀찍이 지어져서 저격당할 위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용병들이 마음을 놓을 무렵, 무전이 왔었다.
-찰리(CHARLIE) 하나, 여기는 찰리 둘. 픽업트럭 5대가 전방에서 마주 오는 중. 진행 계속해야 되는지, 답변 바람.
앞에 있는 험비에서 온 무전이었다.
제이크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여기는 찰리 하나, 픽업트럭이 철판으로 개조됐나? 무기는?”
민수용 트럭을 개조한 무장 차량이 제법 많기 때문에 묻는 것이었다.
험비에 거치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같은 대구경 중화기부터 공격 헬기에 달린 러시아제 로켓포까지.
이는 육안 식별하자마자 바로 차를 돌려야 하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한데 돌아오는 답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겉보기에 이상 없음.
“깃발이나 표시는?”
소속을 표시하는 깃밧을 달거나 페인트칠을 하기에 묻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답은 같았다.
-없는 것으로 보이나, 거리가 멀어서 확실하게 식별하기 어려움.
이 역시도 그나마 다행인데, 트럭이 무려 5대나 된다는 게 썩 마뜩잖았다. 이렇게 마주할 우연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이크가 명령을 내렸다.
“찰리 둘, 여기는 찰리 하나. 즉시 도로에서 이탈한다, 우측 방면으로 크게 우회하도록.”
-찰리 둘, 수신 양호.
그 말과 함께 앞서가던 험비가 도로 밖으로 벗어났고, 제이크가 타고 있던 험비도 덜컹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비포장된 흙바닥이 엉덩이와 등을 때려 댔다.
갈림길이나 샛길이라도 있으면 좀 낫겠으나, 도로는 운행 중인 한 줄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창밖을 주시하던 제이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픽업트럭들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제이크가 황급하게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찰리 둘, 차 돌려서 현장으로 복귀해! 피격당하면 바로 응사하도록.”
-찰리 둘, 수신 양호.
부아아앙―!
험비의 엔진음이 크게 울리고, 동시에 차들이 도로로 급하게 올라섰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따라오는 게 명백해진 상황.
억지로 원래 가려던 시가지로 가서는 안 됐다.
현장을 경비하는 용병들이 있는 건설 현장으로 돌아가 지원을 받는 것이 옳았다.
더구나 픽업트럭도 어느새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내가 기관총 잡는다.”
제이크가 천장의 해치를 열기 위해 일어나려던 무렵, 무전이 울렸다.
-RPG!
일어서려던 제이크와 운전대를 쥐고 있던 루크, 조수석의 강태까지 눈이 휘둥그레진 순간.
콰아아아앙―!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RPG-7의 탄두가 운전석 아래쪽의 타이어를 때린 것이었다.
콰가가각!
타이어 하나가 박살 나서 아스팔트를 긁어 대며 돌았고, 쇳소리를 내면서 멈춰 섰다.
그렇게 차내의 움직임이 멎을 무렵, 제이크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이런 시발… 존! 괜찮습니까?!”
“으으… 예, 좀 어지럽지만… 괜찮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VIP의 안위부터 파악한 제이크가 이어서 앞쪽으로 소리쳤다.
“루크! 리! 상태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루크는 운전석 쪽 철판이 찢어지며 복부에 파편이 박혔고, 강태는 머리의 충격으로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제기랄, 존! 내려서 휠 옆에 붙어 있어요!”
제이크는 멀쩡한 VIP를 내리게 하고서 중상을 입은 루크를 끌어냈고, 마지막으로 혼절한 강태를 바닥으로 꺼내 놨다.
그리고 유턴해서 돌아온 부팀장의 험비에 VIP를 욱여넣으며 소리쳤다.
“먼저 출발해! 지원 요청 다시 하고!”
그와 동시에 AK-47의 발포 소리를 들었고, 황급히 달려온 순간에 허물어지는 반군 한 명을 봤었다.
강태가 격발하여 맞힌 것이었다.
가슴께에 두 발, 얼굴에 한 발이 정확하게 박힌 모습.
흡사 모잠비크 드릴이었다.
몸통에 두 발을 먼저 맞히고 이어서 머리를 맞히는 사격술이었는데, 강태가 그걸 비스듬히 앉은 채 돌격 소총으로 적중시킨 것이었다.
이후의 활약은 더 대단했다.
험비 지붕에 거치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픽업트럭 두 대를 신속 정확하게 파괴했고, HK416 소총으로 현장을 이탈하던 나머지 픽업트럭까지 멈춰 세웠었다.
정확히는 픽업 트럭의 운전수를 사살하고 차량 바퀴까지 터뜨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끝내주는 사격.
더불어 교전 뒤에 험비를 내려오는 모습은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다 못해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제이크는 강태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 잘 봤어, 신입. 특히 그 깡이 마음에 드는군. 실전 경험이 많이 없던데 말이야.”
이어서 지원 온 대형 SUV에 몸을 실을 때였다.
제이크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강태를 잠깐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리,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군.”
강태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투로 인한 흥분이 식고 난 뒤에 불안이나 초조함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유형의 암울함이었다.
짜증 혹은 허탈감.
급기야 강태가 눈을 감으면서 길고도 진득한 한숨을 흘렸다.
“하아아… 아닙니다.”
“임무 수행에 차질이 있는 건 아니겠지?”
“…있을 리가요.”
강태가 천천히 대꾸했다.
뭔가를 생각하듯 반 박자 늦게 나온 대답이었다. 감정은 여전히 교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기 그지없는 태도.
강태를 보던 제이크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루크의 죽음 때문인가……?’
굳이 찾자면 그 외의 이유는 없었다. 어쨌든 VIP는 생존했고, 습격한 반군을 한 명도 놓치지 않았으니까.
제이크가 위로 대신에 간결한 해답을 내놨다.
“심리 상담 서비스라도 받아 봐.”
“아… 그거, 예. 그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제이크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강태를 챙기는 건 이만하면 됐다.
팀장으로서, 군인 출신으로서, 남자로서 묵묵히 버티고 있긴 했지만, 제이크에게도 루크의 죽음은 비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PMC의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같이 복무하진 않았어도, 제75레인저연대와 스페셜포스를 거쳐 온 선후임 관계였다.
강태보다 제이크의 마음이 더 아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루크…….’
제이크가 그렇게 속앓이를 하는 사이.
금세 건설 현장에 들어간 험비가 컨테이너 단지 앞에 멈췄다.
제이크와 강태가 소속되어 있으며, 플랜트 사업의 임원 경호와 현장 경비 등의 임무를 맡은 PMC 업체, G&G Corp(Goodman&Gordon Corporation)의 현장 사무실이었다.
라레플 속에서 초반부에 자주 본 익숙한 광경임에도 강태는 별 감상 없이 굳은 표정으로 험비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장 의무실로 들어가서는 18바늘을 꿰맸다.
거즈 한장을 붙인 채, 걸을 때마다 얼얼한 어깨를 슬쩍 쳐다만 보던 무렵.
강태가 멈췄다.
본부 컨테이너에서 나오는 사람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팀장인 제이크 옆에 걷고 있는 부팀장, 스캇 에반스.
두 대의 험비 중에서 앞서 가던 험비에 탔던 팀원으로 VIP를 태우고 급하게 퇴출에 성공한 자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스캇의 진짜 정체.
‘배신자.’
앞으로 몇 개의 에피소드에 걸쳐서 저질렀던 배신들이 천천히 드러나게 될 인물이었다.
거기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
‘만약 저 새끼를 먼저 처리하면……?’
엔딩이 바뀐다고 확신할 순 없어도, 바뀔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오늘 피습도 스캇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고, 나중에는 다른 팀원 한 명이 더 죽거나 부상으로 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핵전쟁 위협도 빠르고 가깝게 다가올 예정이었고.
만약 스캇을 먼저 처리하면, 핵전쟁을 막진 못하겠지만 늦출 순 있을 것이다.
잘하면 연계된 빌런들을 죽이는 것도 가능할 터.
강태의 얼굴이 비로소 풀렸다.
“…일단 배신자 새끼부터 재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