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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 보니 전장 한복판-2화 (2/185)

2화

그제야 미처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저앉듯 기울어진 사막색 험비(HMMWV), 모래로 덮인 황량한 아스팔트 도로, 드문드문 지어진 아랍식 건물과 멀리서 공사 중인 산업 단지까지.

이곳은 알 자마쉬였다.

서남아시아의 내전 국가를 모티브로 만들어 낸 가상의 도시.

그리고 라레플을 시작할 때 늘 보던 곳이었다.

‘…진짜잖아.’

다시금 확신했다.

시각, 후각, 촉각도 틀림없이 선명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었다.

그냥 아는 것이었다. 꿈속에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불분명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헷갈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게 현실이고 진짜였다.

그 순간.

“……!”

총구가 보였다.

험비 범퍼 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슬그머니 튀어 나온 모습.

그러자 수십 번 플레이 했던 게임 장면들이 더더욱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래, 저 총구…….’

곧 있으면 날 발견하고 조준할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반군은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고, 돌아온 아군에게 사살되는 게 시나리오였다.

이 역시 라레플 시작 장면 중 하나.

하지만 현실에서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적이 오는데, 어떻게 가만히 본단 말인가?

당연히 반응해야만 했다.

게임 속에서는 키보드가 작동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손발을 다 움직일 수 있었다.

척.

내게 달려 있던 HK416를 고쳐 잡았다.

부대에서 썼던 주력 화기는 아니었지만, 여러 화기를 다뤄 본 데다가 총도 거기서 거기인지라 쓰기 어렵진 않았다.

전역한 지 오래되긴 했어도, 그때의 감각도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

철커덕.

노리쇠를 후퇴 장전하며 총알을 확인하고, 손잡이를 잡으면서 엄지로 조정간을 단발로 돌려놨다.

그리고 범퍼 쪽으로 총부리를 돌려놓는 순간.

터벅. 인기척과 함께 터번을 둘러 쓴, 검은 수염을 기른 반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

놈과 눈이 마주쳤다.

방아쇠울에 걸쳐 놨던 검지를 움직였다.

격발은 순식간이었다.

타탕! 탕!

머뭇거리거나 기다림도 없었다.

마치 현역 시절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빠르게 적을 제압하고 있었다.

털썩.

반군이 쓰러지면서, 동시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임에서는 나 대신에 적을 사살했을 캐릭터.

“다행이군, 신입. 근데… 루크?! 제기랄! 루크!”

걸걸한 목소리의 제이크 러셀이었다.

내가 소속된 PMC 팀의 팀장이자, 라레플의 메인 조연 중의 한 명.

또한 라레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였는데, 실물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엄청 크네.’

2미터에 달하는 키, 반팔 티셔츠가 터질 것 같은 삼두와 이두, 주차장 기둥 같은 굵직한 몸통은 보는 것만으로 압도적이었다.

산타할아버지 뺨치는 풍성한 금색 수염이 나중에서야 눈에 들어올 정도.

흡사 부활한 바이킹 같았다.

그러나 겉모습 때문에 제이크라는 캐릭터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생긴 것만이 아니라, 행동과 말, 사고방식조차 모두 군인 중의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내가 동경하는 델타포스 출신.

“제기랄, 이 자식이 결국 가장 먼저 떠났군, 빌어먹을 레인저답게.”

빠르게 루크의 사망을 확인한 제이크가 탄식을 흘리고서 곧장 나를 쳐다봤다.

“넌? 다친 곳은 없나?”

“음, 저는…….”

답을 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영어가 나와……?’

열린 입에서 ‘Um, I'm…….’ 하고 영어가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어라고는 군대에서 쓰던 용어가 아니면, 떠듬거리면서 읽고 콩글리쉬나 좀 떠들 뿐.

한데 생각해 보니 제이크와 루크가 했던 영어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깨달았다.

라레플의 캐릭터들은 영어를 주고받았음을.

‘기가 막히네, 이거…….’

판단과 함께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투다다다다다다다―!

세찬 총격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남아 있던 우리 측 험비 한 대가 후퇴하면서, 지붕에 달린 50구경 중기관총을 반군에게 쏴 대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나머지 팀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있었다.

호송하던 VIP를 멀쩡한 험비에 태워 퇴출하는 것이고, 이제 나와 제이크가 지원이 올 때까지 적을 상대해야 했다.

이는 일종의 튜토리얼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이동과 사격, 지붕에 거치된 50구경 중기관총까지 다루며 키보드 조작법을 터득할 수 있게.

그리고 지원군이 도착하면 튜토리얼은 그대로 끝이 났다.

지레 겁먹은 반군들이 멀리서 험비 여러 대가 오는 것만 보고도 바로 차를 돌려서 도망가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장면은 늘 아쉬웠다.

반군이 끌고 온 도요타 픽업트럭 5대 중 2대가 아군의 반격으로 이미 망가졌고, 적의 전투 능력이 형편없어서 충분히 제압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쏜 RPG-7으로 험비조차 못 맞히는 놈들이니까.

델타포스 출신인 베테랑 팀장 제이크와 호흡만 잘 맞춘다면 둘이서 싹 다 제압할 수 있었다.

그냥 총만이 아니라, 기관총도 있었으니까.

바로 제이크에게 확인했다.

“VIP 퇴출 완료했고, 지원 도착할 때까지 응전하면 되는 겁니까?”

내 말에 제이크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래, 정확해. 그럼 뭘 해야 할지도 알겠군.”

“지붕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다만, 지금 내 말은 게임하고는 다른 전개였다.

튜토리얼처럼 진행되는 인 게임에서는 단순 이동 및 HK416을 이용한 조준 사격 그리고 험비 지붕에 올라가서 거치된 기관총을 사용하는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었다.

그 순서에 맞게 게임이 진행되었고.

그러나 그건 게임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바로 전력으로 쳐야지.’

순서대로 이동하거나 사격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예컨대 험비 위에 달린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통한 공격.

그거면 도요타 트럭 3대 정도는 알루미늄 호일처럼 찢어 버리는 게 가능했다.

이에 제이크를 보자, 다행히도 만족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해, 내가 아래서 사격하지.”

몰래 왔던 반군을 제이크 대신 내가 처리했듯, 게임 속의 튜토리얼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되는 모양.

그의 말이 덧붙어 나왔다.

“내가 옆에서 주의를 끌 테니까, 몇 초 있다가 올라가. 그리고 위험해지면 바로 내려와. 그 위는 맞히기 좋은 과녁 같은 자리니까.”

화력이 거센 기관총이라서 그만한 집중 견제사를 받는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험비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총 맞기에 딱 좋았으나, 조금도 겁 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한때 군인이었고, 또한 평생 군인이고 싶었으며, 아직도 군에 미련이 남은 사람이었다.

즉, 주어진 임무 앞에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설령 게임 안에서 전사할지라도, 당장은 특전사 출신으로서의 할 일을 해야 했다.

물론 게임 안에서 피격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진 못했다.

진짜 죽는 건지, 아이템으로 회복이 되는 건지.

그러나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반군들은 지금도 도요타 픽업트럭의 엔진음과 총성을 번갈아 내고 있었으니까.

“이동해.”

제이크의 말을 들으면서 벌어진 험비의 문짝을 슬그머니 열었고, 험비 내부로 조심스레 기어 들어갈 무렵.

탕! 타당! 타다다다당―!

제이크의 총소리가 퍼지면서, 반군의 반격 소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팅! 티팅!

제이크가 엄폐한 험비 뒷부분에 맞은 탄이 튕겨 나가는 사이, 나는 조심스럽고도 신속하게 내부의 발판을 밟고 험비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앞에서 침착하게 손을 놀렸다.

‘노리쇠 후퇴, 전진, 잠금 장치 풀고 조준.’

모든 과정이 신속하진 않아도 제법 차분하게 이뤄졌다.

비록 단순 교육 외에는 다뤄 본 적이 없는 기관총이지만, 총기 구조나 다루는 방식은 다를 게 없는 덕분이었다.

그리고 거치대를 돌리면서 적을 겨누는 순간.

주춤했다.

누군가 보조하는 듯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묵직한 기관총이 수월하게 돌아갔다, 기관총이 아니라 일반 소총을 들고 조준하듯이.

심지어 지향과 조준은 오차 범위를 줄여 주듯 알아서 조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감상할 틈은 없었다.

제이크를 향해 사격하던 반군 몇이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격발!’

생각을 마치면서 동시에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다다! 투다다다다당!

거센 반동을 잡기 위해 짧게 끊어 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도 같은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동이 거센데도 조준 보정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는 상황.

이를 깨닫는 순간, 12.7㎜의 탄환들이 도요타 픽업트럭을 주저 앉히듯 박살 내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احترس(조심해!)”

“!إنه رشاش ثقيل(중기관총이다!)”

반군의 목소리와 함께, 움직이던 도요타 픽업트럭들이 자빠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투다다다― 콰가강!

차량 두 대가 순식간에 기동력을 상실하고 멈춰선 순간.

피슛―!

내 어깨로 총탄이 스쳐 갔다.

화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반팔 티셔츠 팔 부분이 젖는 게 느껴졌다.

그 뒤로 여러 발의 총알들이 더 날아왔다.

피슝― 피슝! 타다다당!

귓가로도 두어 발이 더 스쳐 갔다. 이에 총구를 돌려 나머지를 제압하려는 순간.

철컥, 철컥.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다.

“기관총 기능 고장!”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단순한 탄 걸림 같은 잔고장 같았지만, 뚜껑을 열어서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남아 있던 마지막 픽업트럭이 방향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도주였다.

짐칸으로 반군 몇 명이 급히 올라타는 모습.

저걸 놓칠 순 없었다.

매달고 있던 HK416을 M2 옆에 거치하고 견착했다.

휙― 턱.

순식간에 도트 사이트 안의 붉은 점이 적에게 찍혔다.

기관총을 돌렸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조준을 돕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감상할 틈은 없었다.

적 발견 시에는 발포해야만 했다. 방아쇠울에 걸려 있던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세 발을 나눠 격발한 순간.

마지막에 픽업트럭의 뒷유리가 깨졌다. 운전석에 있던 사람의 형체가 흔들렸고, 동시에 앞바퀴가 돌아갔다.

운전수를 맞힌 것이다.

끼이이이이익―!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픽업트럭이 흙바닥으로 틀어졌다.

이어서 다시 격발했다.

타다당! 타당! 타당―!

끼익― 쿠웅!

몇 미터를 더 가다가, 결국 차가 무너진 집터에 처박혔다.

뒤에 있던 반군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듯 떨어졌다. 충격이 심해 몸조차 못 가누는 모습.

이에 사격을 멈출 무렵에 제이크의 총소리도 멎었다.

그가 퍼진 도요타 픽업트럭 뒤에서 저항하던 반군들을 대부분 사살한 것이었다.

대충 봐도 열댓 명 정도.

‘역시… 깔끔하네.’

험비에서 내려오자, 어느덧 지원 온 차량들이 막 도착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피 묻은 내 어깨를 툭 쳤다.

“실력 잘 봤어, 신입. 특히 그 깡이 마음에 드는군. 실전 경험이 많이 없던데 말이야.”

“예, 실전은 오래전에 뛰긴 했는데…….”

대답하다가 주춤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멀쩡했다.

상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차분해도 너무 차분했다.

중동에 파병 갔던 10여 년 전의 현역 때도 이러진 않았었다.

단순 교전이 끝난 뒤에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가쁘게 뛰었고, 총을 잡았던 손아귀는 벌게져서 얼얼했었다.

반면에 지금은 제이크와 둘이서 반군들을 모조리 작살낸 상황.

죽이고, 상처 입힌 반군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내게 상황을 알려 줬던 루크는 코앞에서 안면이 피격되어 전사했고.

‘이걸 코앞에서 보고도 멀쩡해?’

말도 안 되는 일들이었다.

게임 안에 들어온 상황이라고는 하나, 난 방금 전까지 현실처럼 반응하고 움직였으니까.

그 순간, 몇 분 전의 일이 뇌리를 스쳐갔다.

‘…특성!’

이거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내가 왜 이렇게 침착한지 그리고 조준도 왜 그렇게 잘됐는지.

특성 1 <명사수>

: 에임 보정의 효과가 적용되어 조준 속도와 정확도가 향상됩니다.

특성 2 <특급 체력>

: 오랜 시간 전력 질주로 달릴 수 있고, 체력 부하로 발생하는 신체적인 상태 이상에서 빠르게 회복합니다.

특성 3 <강철 멘탈>

: 전투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정신적인 상태 이상에 저항합니다.

이중 명사수와 강철 멘탈의 효과를 본 게 틀림없었다. 특급 체력도 적용됐을 터.

“허…….”

헛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살펴보니, 내 몸 역시 서른아홉의 내 몸뚱이가 아니었다.

무릎도 굽힐 때마다 쑤시지 않았다.

멀쩡했다. 아니, 건강하다 못해 강인한 몸뚱이였다.

몇 분 전에 만들었던 바로 그 캐릭터.

내가 부러워했던 크고 날렵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이강태였다.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잘생겼을 게 분명했다.

그 끝에,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좆 됐네.”

비로소 라레플의 엔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십 번을 보면서도 늘 멋있다고 감탄했던 바로 그 시네마틱 영상.

염병할 핵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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