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그게......”
김기범 제1차장은 비록 다소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다 털어 놓았다. 국정원 내의 사내 정치에 밀린 시점에서 그들이 내 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김기범 제1차장은 결국 그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제안을 받았다.
다행이라면 그 이후에 그들은 특별히 어려운 요구는 하지 않았다.
박종수 국정원장 역시 거의 대동소이한 답을 내놓았다.
“안산 병원의 인허가와 같은 일에 도움을 줬다는 말인가?”
“네. 그 요구는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관여한 업체도 있을 텐데, 그들은 누구지?”
“......신명 해운입니다.”
“호오. 그래.”
조민호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
신명 해운은 꽤 잘 나가는 중견 회사였지만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운송하는 제품 중에는 의료 장비와 의약도 포함했다.
이 장비는 전 세계 곳곳에 배송되었는데,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배송한 의약품을 제공한 업체가 바로 아스트라 제약이다.
그들은 제삼 세계 국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전 세계에 공급했다.
하지만 윌리엄 부국장 통해서 이 소식을 보고받은 FBI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 아스트라 제약을 조사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이 제약 회사에 대한 미국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진행되었다.
무려 5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뉴스에 언급된 것과는 달리 FBI 역시 슬쩍 이 조사에 같이 합류했다.
그리고 9억 달러 규모의 탈세, 횡령 협의가 드러났다.
아스트라 제약 주가는 무려 60% 가까이 폭락하면서 휘청했다.
조민호는 나름 신경 써서 무너트리려고 했던 제약 회사가 이렇게 쉽게 무너진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이들이 자본을 댔구나.’
그리고 한국 역시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국정원이 검찰과 힘을 합쳐서 안산 병원을 비롯한 사전에 최영민 사장이 찾은 모든 병원을 동시에 덮쳤다.
혹시라도 정체불명의 조직이 꼬리 자르기를 할까 염려해서 진행된 일이었다.
조민호는 그 과정에서 외할아버지 이충원을 결국 찾아냈다. 다행히 캡슐 안에 있던 그는 아직은 살아 있었다.
‘역시 파킨슨병이구나.’
이미 신경 세포가 상당히 사멸되어서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주변 시선 때문에 이충원을 당장 치료할 수가 없었다.
이번 습격을 통해서 당장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희생자만 무려 천 명이 넘었다. 설사 능력이 된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당장 치료할 수는 없었다.
다행이라면 의문의 캡슐 장비가 그들 생명을 여전히 유지한 까닭에 당장 사망할 정도로 다급한 환자는 없었다.
‘외할아버지.’
착잡한 얼굴로 이충원을 바라보던 조민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이미 자기가 위험한 상태를 사전에 알고 만약 대비해서 유산을 큰아버지에게 맡겨두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타난 조철영 역시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국정원 요원에게 몇 가지를 들은 조철영 역시 눈치는 있었다. 그 역시 멍하니 자신의 장인어른을 살필 뿐이었다.
조민호는 물론 그냥 조철영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혹시 외할아버지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까?”
“글쎄다.”
이미 조민호에게 다 이야기했다고 생각한 조철영은 그저 멍하니 상상도 못한 이충원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정도로 거리를 둔 이충원 행동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내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원한 것 같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너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그저 안부만 묻는 것이라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특히 너에 대해서 신경 쓰는 눈치였지만 난 그저 외할아버지로서 걱정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니었던 같아.”
당시 실패자로 낙인 찍혔던 조철영은 세상일에 아예 무관심했다. 이미 아내는 죽은 마당에 이충원의 연락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연락을 받아도 그저 그렇다고만 말했다.
그런 기억이 제대로 남은 리가 없었다.
그가 조민호를 만났을 때조차 이충원에 대해서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런데 혼수상태의 이충원 모습을 보자 그 기억이 떠올랐다.
착잡한 조민호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할아버지는 자기 위험을 알았다는 말입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더 나에게 적극 연락하지 못했어. 아마 내가 이 일에 연루될까 염려한 것이겠지.”
“그랬군요.”
‘하지만 나 역시 퍽치기당해서 실험체가 된 후로는 굳이 더 아버지를 쫓을 필요가 없었겠지.’
***
조민호도 외부 시선 때문에 외할아버지를 따로 치료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악화하자 이 문제를 고민했다.
아니 외할아버지만이 아니라 몇몇 환자 상태도 심각하자 대안을 세웠다.
‘약재가 필요한 단약은 곤란해. 쉽고 간단한 다른 대안이 필요해.’
그는 과거 5인방에게서 뽑아내는 선천지기 스탯 40은 얼마든지 그 특성에 맞는 환자를 찾는다면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귀중한 것인데, 그냥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점에 떠올렸다.
문득 이 선천지기를 저장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 대안은 마의에게서 배웠던 의술 중에 옥을 떠올렸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옥은 만병을 퇴치하고, 기를 보충해준다고 한다.
실제로 옥의 성분 중에는 인체 필수 광물이 다량 포함되어 있고, 마그네슘은 인체 세포 조직과도 상호 공명 작업을 한다.
다만 이 전제 조건은 몸의 특성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사 옥에서 기가 나와도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조민호는 지름은 5cm 정도에 내부에 공간을 만들고, 1cm 정도 크기 나사 모양으로 해서 돌려서 막을 수 있는 옥을 최영준 차장에게 부탁했다.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선천지기을 이용해서 선천지기 옥, 즉 선옥에 집어넣었다.
이 선옥은 그냥 내버려두면 조금씩 기운이 새어나오는데, 그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선옥 선천지기 누설양을 절묘하게 조절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 부분 역시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결과는 나왔다.
각 선옥 특성에 맞는 사람이 착용한다면 마치 혼원기를 사용해서 치료하는 것과 비슷하게 피부 접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흡수된다.
‘내가 치료하거나, 아니면 직접 진맥해서 그 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 하지만 외할
아버지 생명 연장은 가능할 거야.’
***
윌리엄 부국장은 의문의 조직을 쫓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조민호에 대한 것 역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조민호 혼원기 덕분에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기심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조민호가 캡슐 환자에 대해서 유심히 살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조민호가 다시 캡슐 쪽으로 다가가자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겨우 한 숨을 돌린 핀처를 비롯한 다른 이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민호는 국정원과 경찰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윌리엄 부국장을 이용했다.
그는 슬쩍 다른 이들 시선을 파한 채 실험용 선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외할아버지 목에 걸어주었다.
“그게 뭡니까?”
“옥입니다.”
“옥?”
다행히 인터넷에 이 옥에 대한 것은 자세히 나와 있어서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선옥에서 흘러나온 파킨슨병 선천지기가 외할아버지 몸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유사한 특성의 혼원기는 몸속으로 파고들어서 천천히 신진대사를 바로 잡아 주었고, 심지어 손상된 신경 세포의 악화를 더 막아주었다.
아니 조금씩 손상된 신경 세포를 회복시켜 주었다.
겉으로 봐서는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없을까요?”
조민호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건강을 기원하는 것뿐입니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아마도.”
핀처 FBI 요원은 단순히 기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자 슬그머니 남는 선옥을 부탁했다.
조민호는 결국 만든 선옥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 선옥을 살피던 핀처 요원은 고개를 갸웃한 채 다른 이들에게 돌렸다. 그들 역시 특이한 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충원 안색이 생각보다는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치 좀비처럼 비쩍 말라 있는 이충원 피부가 점점 활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이충원 상태를 살피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정신을 회복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조민호 역시 흥미를 느꼈고, 뒤늦게 이충원 선천지기와 파킨슨병 혼원기 두 가지를 섞여서 그 효과가 더 좋아진 점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윌리엄 부국장의 도움을 얻어서 상태가 나쁜 환자에게 이 선옥 목걸이를 일일이 달아주었다.
“건강 기원입니다!”
“아, 네.”
딱히 목걸이를 걸었다고 항의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조민호는 선옥을 착용한 이들의 상태가 느릿하게 회복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방긋 웃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군.’
“......”
윌리엄 부국장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저 멍하니 선옥을 쳐다보기만 했다.
조민호는 피식 웃으면서 선옥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를 해주었다.
‘이제 신명 해운 차례군.’
***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부르르 뜬 신동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갑자기 회사에 걸린 비상에 대해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동명 상하이호는 곳곳이 녹이 슬었고, 심지어 엔진 상태도 나빴다. 엔진 고장 난 것 때문에 수리한 횟수를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신동일은 왜 자신이 다급하게 이 배를 타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신 팀장,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김지수에게 다시 접근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사고 친 것도 아니잖아!”
“사장님이 직접 지시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새벽에 경호팀장 신경훈이 깨워서 허겁지겁 이곳에 도착한 신동일은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끔뻑 거렸다.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신경훈 팀장은 곧장 신한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가 가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이들을 배에 승선시키면서 신동일을 설득했다.
“저도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검찰이 움직인 것이 분명합니다.”
“설사 검찰이 움직였다고 해도 내가 왜 이렇게 도망가야 하는 거야? 설마 마약 때문이라고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게 아닙니다.”
신경훈은 답답했지만, 신동일에게 차마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동명 상하이호는 이미 출항을 위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황당한 사태에 신동일은 영문을 몰라서 배를 둘러보았다.
수십 명의 경호원은 선원과 같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바빴다.
그는 영문을 몰랐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배 선실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기를 들고 한창 통화를 하던 신경훈은 허겁지겁 신동일 뒤를 쫓았다.
***
신동일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자 정신없이 움직이는 선원 뒤를 따라갔는데, 그들이 화물 상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다시 정리하는 것을 확인했다.
마치 퍼즐처럼 상자를 이리저리 한 쪽으로 밀고, 다른 상자를 앞쪽으로 배치했다.
딱 봐도 뭔가 감추려는 것이 역력히 드러난 행동이었다.
‘도대체 뭘 숨기는 거지?’
그는 신명 해운 경영에도 관심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몰랐다. 심지어 신명 해운이 어떤 물품을 옮기는지도 몰랐다.
너무 정신없이 움직임 덕분인지 위쪽에 올라갔던 나무 상자 하나가 그만 밑으로 굴러떨어졌고, 결국 상자가 열려버렸다.
특이한 은색 상자 하나가 밖으로 굴러 나갔다.
신동일은 기겁했다가 고개를 갸웃한 채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캡슐?”
뒤늦게 따라온 신경훈 팀장은 기겁한 채 신동일 행동을 말렸다.
“도대체 뭘 하는 겁니까?”
“야아, 신 팀장, 너 행동 좀 이상하다. 아니 그것보다 이게 다 뭐야?”
“이사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놔!”
버럭 화를 낸 신동일은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