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이러한 작업이 그 흔한 NG 하나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워너 임원이 가장 이상적으로 그린 밑그림대로 영화 수정작업이 진행된 덕분에 걸린 시간은 고작 3주에 불과했다.
커스틴 감독 역시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로빈이 과거 영화 경험치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실제 나온 결과에 감탄했다.
‘역시 로빈인가?’
***
조민호는 느긋하게 지내면서 영화 개봉날짜만을 기다렸다. 그는 굳이 서둘러서 나서지 않았다. FBI 고위직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았고, 가장 큰 문제는 CIA와 FBI의 갈등이다.
FBI 멜빈 요양원 특별 수사팀은 두 조직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이 수사팀 대다수는 어리석을 정도로 윌리엄 부국장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행히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핀처 요원이었다.
제이크의 친구이기도 한 핀처 요원은 특별 수사팀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사했다. 윌리엄 부국장을 조사하면서도 그와 동행한 흔적이 있는 조민호를 발견한 후에 트럼프 호텔까지 직접 찾아왔다.
“FBI입니다.”
“조민호입니다.”
윌리엄 부국장 덕분에 안도한 조민호로서는 예상 밖의 방문이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날 어떻게 찾은 거지?’
핀처 요원은 깊은 눈빛을 한 채 조민호를 자세히 살폈다. 그는 놀랍게도 능숙하지는 못해도 한국어를 제법 했다.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수사 대상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윌리엄 부국장의 지인인 제임스나 에반과 자주 어울리시더군요. 그 부분 때문에 몇 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전형적인 미남인 핀처는 차분하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휘두르지 않은 채 조민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민호도 그의 방문 때문이 아니라 핀처가 자신을 찾았다면 그자들도 자신을 방문할 것을 우려해서 인상을 찡그렸다.
핀처는 무덤덤한 얼굴로 윌리엄, 제임스, 에반과 같이 찍힌 자신의 CCTV 사진을 테이블 위에 슬쩍 내려놓았다.
심지어 멜빈 요양원을 방문해서 소피아를 만난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지압사라고 들었습니다만 한국에 있는 분을 굳이 미국까지 초청한 윌리엄 부국장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곧 당신 치료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죠.”
그가 이해하지 못한 점은 파킨슨병 환자인 소피아와 관계였다.
조민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요?”
“조민호씨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 실마리가 있다고 전 확신합니다. 이번에 일어난 사건 동선에 조민호씨가 늘 끼어 있었으니까요.”
“전 초청 받고 미국에 온 치료사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죄라도 됩니까?”
“......”
핀처 요원도 감정 표현이 전혀 없는 조민호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조민호를 방문한 것은 이성적인 추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감 때문이다.
윌리엄 부국장 행동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조민호 등장 이후다. 그런데 그 조민호는 이상할 정도로 윌리엄 부국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사실 조민호에 대해서 확신하고 이곳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제이크 죽음을 조사했다. 아직 제대로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페이만 선생과 관련된 멜빈 요양원 사건이 터지자 자기 직속상관의 비리로 협박해서 이번 수사팀에 합류했다.
이미 FBI 윗선에서 제이크 사건을 은폐한 것까지 경험한 터라 비밀리에 조사했고, 결국 그 흔적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조민호에게서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당황했다.
“페이만 선생을 조사하던 제이크가 의문의 사고를 당해서 죽었습니다. 즉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했다고 확신합니다. 당시 제이크가 중요한 증거를 찾았다고 상의하려고 찾은 사람이 저였습니다.”
“흠.”
조민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핀처 요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역시 한국에서 의문의 조직을 파악한 후에 관련된 이가 적지 않게 죽은 것을 잘 알았다.
‘하긴 미국에서도 당연히 있었겠지. 이제까지 비밀을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나도 그런 것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도 있고.’
핀처 요원의 처지를 이해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지난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자기 고백이 아니었다. 친구를 잃은 한 FBI 요원의 처절한 후회와 반성이었다.
다만 그 이야기를 왜 조민호 자신 앞에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전혀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핀처 요원은 많은 갈등을 거듭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아니 뭘 말입니까?”
“당신은 분명히 뭔가 알고 있습니다. 제 감이 당신을 가리키니까요. 아마 누구도 당신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저만은 다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건 또 뭐야?’
조민호는 상대가 어디 아픈가 싶어서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을 가리켰다. 하지만 핀처 요원이 조민호 손을 붙잡은 채 소리쳤다.
“부탁입니다. 저도 FBI 윗선에서 이 사건을 덮으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러기에 이곳에도 전 혼자 온 겁니다. 그놈들을 반드시 잡아서 죗값을 치루게 할 겁니다.”
당연히 무시하려고 했지만, 손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핀처의 경혈을 자연스럽게 살필 수가 있었다. 혼원기가 알아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흥미롭군.’
핀처 요원은 윌리엄 부국장과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조민호는 슬그머니 핀처의 잠재 선천지기와 오염도가 120과 2%보다는 독특한 그의 특성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고민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그가 원래 원한 것은 FBI 국장급 수준의 고위직이었지만 핀처 요원은 마치 자신처럼 탁월한 고유 속성을 가졌다.
어차피 그 자신이 원한 것은 FBI 내에서 누군가 그들 조직을 추적하는 거다. 그런데 윌리엄 부국장은 안타깝게도 관리 요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핀처 요원은 꽤 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조민호는 슬쩍 그의 손을 뿌리치는 척하면서 경맥을 잡아서 경혈을 확인했다.
다행히 핀처는 이미 막바지에 몰려서 인지 쉽게 떨어지지 않은 채 계속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핀처 속성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대응되는 혼원기를 만들어서 집어넣었다. 변화는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 혼원기는 무서운 속도로 경맥을 타고 흘러가서 뇌경혈에 안착하면서도 뇌조직 일부와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사실 병자가 아니라 멀쩡한 사람에게 강화된 혼원기를 이렇게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효과는 상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적용되었다.
특성 변화 충격을 경험한 핀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는 관자놀에 총을 맞은 것처럼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
당황스러운 현상에 핀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결국 무릎을 끊었다. 마치 온몸의 신경이 뚝뚝 끊어지는 충격에 제대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불과 십 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껍질이 벗겨지는 충격을 느낀 핀처는 양손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조민호는 혼원기가 무사히 안착해서 안정화되는 것을 보면서 윌리엄 부국장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 확연히 깨달았다.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페이만 선생이 뭔가 특이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아마 조민호를 방문하기 전이라면 핀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추리 능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반응했다.
“설마 페이만 선생이 자기가 한 짓을 감추기 위해서 멜빈 요양원을 습격했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 자 배후가 아닐까요. 인간을 상대로 인체 실험하는 자들인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FBI 내에 손을 쓸 수도 있겠죠. 일테면 수사 방해도 그 일환일 겁니다.”
경악한 핀처는 뒤늦게야 제이크의 죽음, 페이만 선생 의혹에 대한 몇 년간의 조사내용을 한 번에 다 떠올리면서 경악했다.
“맙소사!”
조민호는 생각보다 더 뛰어난 상대 반응에 만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걱정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그놈들을 상대하려면 보통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지.’
실제로 매혹 특성도 포함된 혼원기 때문에 핀처는 조민호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심을 깔끔하게 접었고, 페이만 박사에 대해서 질문했다.
조민호는 빙빙 돌려서 자신이 추론한 범위 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가 치료사라서 핀처 요원처럼 감이 좋습니다. 소피아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모르더군요. 증거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만약 멜빈 요양원 환자 중에 소피아같은 환자가 더 있었다면 CIA가 추적하는 것처럼 느꼈을 테니, 페이만이 그들을 없애려고 했겠죠.”
“가, 감사합니다.”
“뭘요. 어차피 페이만 선생이 이미 사라진 마당인걸요.”
“아 페이만 선생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CIA도 모르는 사실이던데?”
“페이만을 따로 추적 중인 제 해커 친구 통해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 이제까지 놈들을 비밀리에 추적했다는 말이구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용해. 역시 내 판단이 정확했어.’
“명함이나 하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미 감을 확실히 잡은 핀처는 뭐가 그리 급한지 밖으로 나가면서도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지간해서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놈들을 대적할 수 있을까?’
살짝 갈등이 일어났지만, 굳이 FBI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서 깔끔하게 접어버렸다. 그는 배후 정체만 알면 그 윗선을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
멜빈 요양원을 둘러싼 CIA와 FBI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습격자 중에 전직 CIA 요원이 꽤 있었는데, 이들에 관한 조사 때문이었다.
FBI는 이들이 미국 내에서 일으킨 사건이라서 자기 관할이라고 했고, CIA는 전 요원의 죽음을 가장해서 사라진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조민호로서는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놈들의 세력이 드러날 것이라 예상해서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중에 핀처 요원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문명의 이기가 다 끊어진 산자락에 숨어버린 페이만 선생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는 제이크 죽음과 관련된 페이만 선생을 지금까지 따로 추적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앞서 나간 것이었다.
핀처 요원은 페이만 선생을 잡기가 무섭게 다시 십여 명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 무사히 페이만 선생을 FBI 지역 사무국까지 데리고 갔다.
물론 FBI 지역 사무국 내부 습격도 있었지만 십여 명의 FBI 요원이 사망한 와중에도 핀처 요원은 홀로 그들을 다 막아냈다.
그는 조민호 조언에 따라서 멜빈 요양원뿐만 아니라 페이만 선생이 기존에 관리한 다른 환자에 대한 것도 원점에서 다시 조사했다.
FBI 내부에 마치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난리가 나버렸다.
이 조사에는 저명한 의사 출신의 FBI 요원이 합류하면서 사건은 점점 커져만 갔다.
조민호도 은근슬쩍 끼어들고는 싶었지만, FBI에서 이번 멜빈 요양원 사건에 인원을 대폭 확충했고, CIA 역시 이 사건을 철저하게 감시한 터라 구경만 했다.
‘이제 미국 정부도 눈치를 챈 것 같아.’
너무 뜨겁게 달아오른 사태의 정점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은 조민호는 박희관 부장에게서 조정연이 이번 영화 투자 지분에 끼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당분간은 지켜보자. 미국 정부보다는 핀처가 더 흥미로워. 아마 그놈들도 가볍게 보고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야.’
***
조민호는 한국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오성 바이오의 바스클린 임상 3상 시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는 오성 바이오도 언론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바스클린 임상 3상 시험 소식으로 한국은 떠들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오성 바이오는 복제약 중심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새로운 신약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개강과 동시에 4학년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1학기 때와는 또 달랐다.
취업 준비에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들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박진만이나 김영탁은 오히려 취업이 확정된 터라 느긋했다.
아니 그들은 나름 직장 상사가 될지 모르는 조민호 눈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