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조민호는 뒤늦게야 소피아 증상은 주로 파킨슨 알파로 이루어졌고, 이와는 달리 로빈 증상은 파킨슨 베타가 주류를 형성하는 것을 파악했다.
‘이거 아무래도 파킨슨병 초기 전 단계로 보이네, 윌리엄 부국장이 그래서 로빈을 의심했구나.’
그는 로빈 손을 놓은 채 잠깐 침묵했다가 힐끗 눈을 부릎 뜬 채 자신을 쳐다보는 구해선을 쳐다보았다.
‘왠지 입이 가벼울 것 같은데......’
아니 꼭 그게 아니라도 지금처럼 예민한 시기에 굳이 문제의 소지를 남기기 싫었고, 윌리엄 부국장처럼 굳이 손을 쓰고 싶지 않았다.
“통역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네?”
구해선은 대놓고 축객령을 내리는 조민호 태도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기 로빈 옆에 있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상대가 그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자신을 돌보듯 쳐다보는 차가운 시선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한의학에 대해서 전혀 모를 텐데, 그런 부분을 통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파킨슨병 근원에 관해서 확인한 조민호는 냉정했다.
“아뇨. 그렇게 전문적인 것도 아닙니다. 전 그저 지압사일 뿐이니까.”
“아, 네.”
구해선은 여전히 미적거렸지만, 로빈 매니저가 눈치를 보다가 결국 그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후유.”
영문을 전혀 모르는 로빈은 양손을 슬쩍 올리는 시늉만 했다.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조민호는 아직 로빈이 파킨슨병이라고 진단받을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걸 굳이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럴 필요가 없지. 그냥 단순 우울증으로 진단하고, 이걸 치료해주는 것이 좋겠어. 당분간은 눈에 띄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공짜로 치료해줄 수는 없는데......’
“으음, 치료는 2-3일 정도면 충분합니다만 다른 예약 환자 때문에 3일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저, 정말 치료가 가능한 겁니까?”
“네.”
로빈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이미 휘트니 쪽에서 이야기를 들은 필립모어 선생이 로빈을 대신해서 수락해버렸다.
***
박희관 부장은 원래 해외 투자팀을 이끌었고, 이쪽만 생각했다가 느닷없이 조민호 덕분에 아예 조민호 관련 투자를 전담했다.
처음에는 이직해야 하나 갈등도 많이 했지만 배효진 사건과 에플 대박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조민호를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다만 갑자기 조수현 회장이 미국으로 떠나서 조민호를 만나라는 말에 당황했다.
“네? 미국 투자는 이미 그쪽 전담팀이 진행하지 않습니까?”
“나도 모르네. 민호 이야기로는 미국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하니까.”
“?”
너무 뜬금없는 지시라서 박희관 부장도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싫은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사정을 알 수가 없을까요?”
조수현 회장 역시 갑자기 조민호에게 연락을 받았고, 다급한 연락에 갑자기 구한 항공권을 박희관 부장에게 내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비자는 문제 없을 테니, 오늘 저녁 비행기로 뉴욕에 가게.”
“하지만......”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냐. 이번 에플 주식 가치가 2조를 넘겼어. 그러니 VVIP 투자자라고 생각하고, 그냥 따르게.”
“......알겠습니다.”
박희관 부장도 새삼스러운 눈길로 조수현 회장을 쳐다보았다.
조수현 회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박 부장, 바뀌는 것은 없어. 민호는 그저 단순한 투자자라고만 생각해.”
“알겠습니다.”
***
미래 증권 내에 조민호 이야기는 생각보다는 더 많이 퍼졌다. 비록 보안을 유지했다고 해도 알음알음 에플 펀드 대박 이야기는 계속 나왔다.
그 이야기는 미래 증권 경영진에 소식통이 있는 임서이에게도 전해졌다.
임서이도 조민호가 얼마나 놀라운 치료 능력이 있는지 아는지라 입을 조심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조민호와 척을 질까 조정국이나 조지연에게 박희관 부장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물론 홍콩 사무소에 갔지만, 미래 증권이 투자한 빌딩을 정리한 덕분에 재미를 보지 못했던 조정연이 결국 한국에 돌아왔다.
“잠깐 들린 것뿐입니다.”
“휴가가 2주면 너무 길다.”
“우리 미래 그룹 정기 휴가를 주말 끼고, 미리 당겨서 사용한 것 뿐입니다.”
덕분에 총 휴가기간은 무려 16일이었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조정국이 피식 웃었다.
“민호 때문에 온 것 아냐?”
“아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보기 싫다. 사람이 그렇게 살지 좀 마.”
“너 말투가 좀 삐딱하다.”
“이번에는 또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그 핑계로 미국 가려고?”
“아니라니까.”
자나 깨나 장남 생각만 하는 임서이도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면서 남편 눈치를 봤다.
조수현 회장은 남인 양 밥만 먹었고, 오늘 있을 재계 모임 일정 때문에 급히 들어왔던 김재상 비서실장은 다시 나가버렸다.
조정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기 아버지,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중국 사업을 하겠다고 한 사람은 너였다?”
“하지만 지금 투자한 건물은 죄다 팔아서 현금 보유만 늘리고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이세요?”
“그러면 네가 직접 나서서 괜찮은 상품을 알아보면 되잖아?”
“중국은 관시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회사 내에서는 아무도 거기에 관해서는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제 고작 이십 대 후반의 조정연이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설사 한국 재벌 2세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수현 회장도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박희관 부장 따라서 미국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제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덕분에 인맥이 제법 있어서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조정국이 결국 끼어들었다.
“형, 정말 창피하지도 않아?”
“무슨 개소리야? 사업 가능성이 보여서 활로를 찾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에휴.”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이 여기 찔끔, 저기 찔끔 기웃거리는 조정연 행동에 크게 실망한 조수현 회장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본인 딴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해봐.”
“감사합니다.”
냉큼 고개 숙이는 조정연. 아주 간과 쓸개까지 다 내어 놓은 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조민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것 때문에 절박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어.’
***
박희관 부장은 조정연에게 같이 미국 가자는 연락을 받았지만, 슬쩍 무시한 채 조민호가 지금 숙박하고 있는 트럼프 호텔에 도착해서 스위트 홈을 찾았다.
내심 감탄했지만 이미 에플 투자로 초대박을 친 조민호라면 크게 부담될 호텔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갑자기 조민호가 왜 자신을 호출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나온 것은 어거스트 러쉬 영화 투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문을 잘 몰랐지만, 미래 그룹 미국 지점에 연락해서 자료를 요청했고, 개괄적인 자료는 얼마 있지 않아서 곧 받았다.
“워너 쪽에서도 비관적으로 본다는 말입니까?”
“영화 줄거리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부모를 찾아서 떠나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지금 트렌드와는 달라서 수익성은 그렇게 높지 않을 겁니다.”
“그런 영화를 왜 기획한 거죠?”
“로빈 때문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모티브를 이용한 거죠. 아마 전성기 시절의 로빈이었다면 큰 기대를 모았을 겁니다. 그런데 최근 로빈 건강 이상 때문에 말이 많으니까요.”
심한 우울증 때문에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역시 알코올 중독이다. 영화 촬영을 할 때는 철저하게 규제를 하지만 연기력 자체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영화 촬영 전에도 재활원에 들어가서 몇 달 정도 치료를 받았다. 그 덕분에 어거스트 러쉬 촬영은 마무리 단계였지만 그 수준이 높을 리가 없다.
“실망을 많이 한 팬은 결국 이번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겠군요.”
“제작사도 그것 때문에 고민일 겁니다. 그러니 빨리 찍어서 상영하고 나면 약간의 수익만 보고 끝낼 생각입니다. 굳이 CL 엔터 쪽에 투자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고, 다른 투자자가 외면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조민호는 생각보다는 꽤 깊은 정보를 파악한 박희관 부장 능력에 만족했다.
“워너 쪽을 통해서 지금이라도 투자를 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지금쯤은 감독 통해서 로빈 상태를 파악했을 테니, 싫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투자 지분을 받으면 가능성이 높은 다른 영화 쪽에 바로 투자할 수 있으니까요.”
파킨슨병이라고 말하지 않고 치료하는 경우에 치료비를 챙기고 싶은 조민호는 샛볕같이 반짝이는 눈빛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만약 로빈 상태가 좋아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가정입니다만 로빈이 우울증과 알콜 의존증이 깨끗하게 치료되면 지금 영화 촬영본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대로 그냥 상영할까요?”
“그거야......”
“지금은 거의 술이 너무 많이 채서 비몽사몽일 순간일 거고, 만약 이 상태에서 정신이 말짱해질 때 영화 촬영본을 본다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일테면 전체는 아니라고 일부를 다시 찍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 로빈의 자기 영화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려울 겁니다. 워너 쪽에서 영화 개봉을 연기하면 손해가 엄청날 테니까요.”
“그러니까요. 우리가 30% 정도 지분을 얻으면 워너 쪽은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제야 조민호가 한 이야기를 알아들은 박희관 부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한 협상까지 해서 돈도 안 되는 영화에 투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네.”
이미 에플 펀드 초대박 때문에 굳이 의아한 조민호 지시에도 박희관 부장은 고개만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
영화는 상대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데, 투자자 유치는 꽤 중요하다.
투자자가 생기면 회계와 제작 문제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제작자다.
제작자는 영화감독 촬영 상황 점검, 마케팅, 배급 문제에도 관여한다.
이번 어거스트 러쉬 프로젝트 책임자인 마크는 영화 막바지 단계에서 늘어지는 상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는 특히 로빈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두 번 다시 로빈 주연 영화를 제작하지 않겠다고 내심 맹세를 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들.’
워너 윗선에서는 아직도 로빈에 대한 향수 때문에 이 영화를 기획한 것인데, 퀄리티가 예상한 것보다 너무 나빴다.
로빈 인지도가 있어서 영화는 망하지는 않겠지만 3억 달러, 4억 달러 수익을 올리는 영화가 빵빵 터지는 것을 보면 속이 다 탄다.
“누가 왔다고?”
“한국의 미래 증권이라는 곳에서 왔는데, 영화 제작에 투자하고 싶다고 합니다.”
투자자는 많을수록 좋다. 리스트를 줄이는 일은 늘 환영할만한 일이다. 분노했던 마크는 영업용 미소를 한 채 박희관 부장을 만났다.
처음에는 별생각 안 했는데, 에플 8억 달러를 투자했다는 소리에 태도를 달리해서 올해 하반기, 내년 상반기 영화 기획안을 슬쩍 소개해주었다.
에플 펀드 이야기에 눈빛이 달라진 상대 모습에 피식 웃은 박희관 부장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혹시 개봉 앞둔 영화에 투자할 수는 없을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어거스트 러쉬같은 영화 말입니다. 제가 아는 지인 통해서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흠.”
마크는 영문을 잘 몰라서 박희관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야기 들을 수는 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빨리 정리하라고 지침이 난 영화에 왜 관심을 두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이번 영화 펀드에 투자한 VIP가 로빈의 팬입니다. 그래서 투자자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늦게라도 투자하고 싶어 합니다.”
어거스트 러쉬 때문에 정말 괜찮은 영화 하나가 뒤로 밀린 것에 통탄한 마크 수석은 마른 침을 삼켰다.
“가능은 합니다만......”
“제작비가 얼마죠?”
“3,000만 달러 좀 안 되는데......”
“저희가 지분 40%를 인수하는 걸로 해서 1,500만 달러를 투자하죠.”
워너 내부에서 보수적으로 보는 영화 수익은 대략 4,000만 달러다. 이 기준으로 보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 4,000만 달러로 가능성이 높은 영화에 투입하면 이익을 더 키울 수도 있다.
“......진담입니까?”
“네. 아, 로빈 이야기는 잘 압니다. 그래서 저희 고객이 더 로빈 영화에 투자하고 싶어 합니다. 투자자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영화에 충실했으면 하니까요. 너무 상업적인 영화만 막 쏟아지면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으음.”
“이 기획안 중에 한두 가지는 더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단 로빈 영화 투자가 그 조건입니다.”
“......내부적으로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아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