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그의 시선은 슬쩍 조민호를 향했다. 안가를 습격했다가 죽은 9명의 사망자 때문이다. 차마 조민호에게 질문하지 않았지만, 그 문제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조민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정도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윌리엄 부국장과는 달리 선천지기 매혹에 그나마 영향을 덜 받은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들을 처리한 걸로 해주세요. 아, 저격수도 있을 테니까. 그자도 다시 확인하기 바랍니다.”
“저격수요?”
“네.”
자세한 이야기를 조민호는 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 부국장은 조민호 말을 이상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손짓해서 반박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보다 한숨을 내쉬면서 오늘 일에 대한 대처를 떠올렸고, 머리를 내저으면서 자기 양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일단 FBI 애들이 자기 영역 침범했다고 난리를 칠 거고, 그다음은 CIA 내부인가.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유령에 홀린 것도 아니고, 그 감각은 도대체 뭐였지?’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움직였다. 그런데 마치 옷을 입은 것처럼 탁월한 전투 감각이 발휘되었다. 스스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
아무리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도 간단한 대화 정도는 알아듣는 조민호는 뒤늦게야 윌리엄 부국장 변화를 매혹 수법 부작용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슬쩍 윌리엄 부국장 시선을 피한 채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멜빈 요양원 주변에서는 거대한 폭발과 화염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고, 총격전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멜빈 요양원에서 사망한 환자도 구급차에 실려서 이송 중이었다.
몰려온 근 백여 명의 기자로 멜빈 요양원은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이 사태가 결코 조용히 무마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르지. CIA 내부에서도 굳이 일을 키울 생각은 없을 테니까. 그보다는 오히려 윌리엄 부국장이 좀 걱정돼.’
***
넓은 객실에 뉴욕 센트럴 파크를 조망할 수 있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은 5성급 호텔이다. 대리석으로 꾸며진 욕실은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 온몸이 상쾌하다.
조민호는 이곳 호텔을 둘러보면서 새삼 CIA의 힘을 느꼈다.
“설마 이곳도 CIA 안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간혹 필요에 따라서 사용됩니다.”
이 정도 호텔은 주로 CIA 작전과 관련해서 미국 국익에 큰 영향을 줄 외부 인사를 위해서 사용된다. 겉으로 드러난 조민호와는 격이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명의를 데니스 조라고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신분증이니, 혹시 필요하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신분증은 놀랍게도 조민호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 안의 프로필 대다수는 실제로 데니스 조 명의였다.
“설마 가짜는 아니겠죠?”
이제까지 굳어 있는 윌리엄 부국장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뇨. 실제로 존재합니다. 다만 지금은 죽은 사람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데니스 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윌리엄 부국장 안색이 좋지 않았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은 슬픔이 살짝 떠올랐다.
조민호도 새삼 윌리엄 부국장의 진정을 깨닫자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는 말을 넌지시 해주었고, 진맥했다.
윌리엄 부국장 상태는 확실히 김미애 혼원기 영향으로 이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이유는 뜻밖에도 효율 때문이었다.
보통 일반인이라고 해도 혼원기 흡수율은 고작 0.1-0.2% 남짓하고, 특성이 어느 정도 일치되는 경우에 2-3% 정도에 불과하다.
제임스와 에반이 2% 범위에 속했다.
‘22%라니.’
윌리엄 특성 일치율을 상상을 초월했다. 강화된 김미애 혼원기를 무려 22% 가까이 흡수해서 신경세포에 관여하는 MPTP(Methy-Pheny-Tetrahydropyridivne)에 변형을 일으켰다.
이 변종 MPTP는 도파민을 비롯한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해서 변화를 일으켰다.
운동 신경이 자극을 받았고, 그 여파는 뇌세포에도 영향을 주었다.
최면, 파스킨병, 심지어 췌장암 혼원기가 서로 결합하면서 융합되었고, 그것이 마치 뇌세포를 프로그래밍하듯이 변화를 주었다.
무학을 익힌 두칭리 보좌관은 후천지기를 얻었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윌리엄 부국장은 감각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각자의 정체성과 특성이 김미애 혼원기를 받아들여서 스스로 의지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다.
‘이게 뭐지?’
조민호는 의아한 눈으로 윌리엄 부국장을 쳐다보았는데, 눈치를 보던 제임스가 슬쩍 자신의 핸드폰으로 촬영한 윌리엄 부국장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놀랍습니다.”
윌리엄 부국장도 민망한지 눈치를 보다가 그때 느낀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냥 알 수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총격이 이어지고, 저쯤에서 쏘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멜빈 요양원 환자를 구하겠다는 각오뿐이었습니다.”
“마치 전투 예지 능력 같네요.”
“아, 맞습니다. 전투 예지, 바로 그거였습니다. 상대가 공격할 때 그 순간을 알 수가 있었으니까요. 정말 그 기분은 말로......”
근엄한 윌리엄이 아이처럼 흥분해서 자기감정을 폭로하다가 따가운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자 무안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건 마치 각성자의 특성 같잖아?’
웹 소설에 한 때 푹 빠졌던 조민호도 각성자 소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걸 현실에서 자신이 직접 보게 되자 당혹스러웠다.
처음에는 다시 전투 예지를 없애려고 하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윌리엄 부국장은 사실 상당히 위험한 상태다. 차라리 이런 능력이 있다면 오히려 이 상황을 헤쳐나갈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조민호는 다른 두 사람도 확인하고서야 새삼 자기 능력이 발전했다는 것과 선천지기 스탯이 100을 넘어서자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적용하는 부작용(?)에 대해서 피부로 느꼈다.
‘아무래도 미국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네.’
***
멜빈 요양원 총격 사건은 당연히 인터넷에 동영상이 올라갔지만 불과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다 사라졌다.
심지어 이 사건은 5명의 테러리스트가 일으킨 사건으로 축소되었고, 사망자 역시 멜빈 요양원 다섯 명이 죽을 것을 포함해서 1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축소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기사 역시 불과 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린 사건에 대한 뉴스가 서서히 퍼지며 밀려버렸다.
CIA는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일단 이 사건을 덮었다.
물론 많은 미국인은 이런 CIA 작태에 대해서 맹비난했다.
윌리엄 부국장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몸을 낮추었다.
그는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면서 겨우 한숨을 돌렸고, 오늘은 그린 사건 문제에 대한 마무리 정리에 오히려 집중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CIA 건물 입구를 들어갈 때 경비를 하던 이들조차 뜨거운 눈으로 윌리엄 부국장에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 CIA 요원조차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기도 했다.
‘흠.’
윌리엄 부국장은 아침 거울에서 봤던 자신의 툭 튀어나온 똥배(?)에 힘을 준 채로 자기 사무실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시선은 계속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린 사건 브리핑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몇몇 병사들이 범행 후에 수 시간 동안 사건 현장을 통제하면서 수니파 세력의 범행이라고 조작한 것입니다. 결국 아비르 마을 사람도 혼란을 경험했고,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범행도 문제지만 그 사후 처리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윌리엄 부국장 역시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차피 노스 캐롤라이너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이 불가피해. 그러니 명확한 사실로 근거해서 처벌하는 점을 강조해. 특히 법정 사태를 중심으로 사건을 더 키워.]
[알겠습니다.]
그린 사건은 이미 돌이키기에는 어려웠다. 차라리 이에 따른 미국 전체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번 멜빈 요양원 사건을 이 뉴스로 덮는 것은 그 덤이었다.
그런데 그린 사건 회의가 끝나자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모두 손뼉을 쳤다.
“흠.”
윌리엄 부국장은 마치 전쟁 영웅을 대하는 듯한 이들 태도에 어깨를 으쓱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박수 소리는 회의실을 벗어나서 통로를 오가는 이들에게로 이어졌다.
윌리엄 부국장을 인식하는 모든 CIA 요원은 뜨거운 시선으로 영웅을 바라보았다.
‘민망하네.’
***
레이즈 CIA 국장은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앉아서 물끄러미 윌리엄 부국장의 영웅적인 동영상을 지켜보았다.
동영상은 멜빈 요양원 CCTV 화면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윌리엄 부국장이 움직이는 동선과 정확히 일치했다.
매복한 테러리스트가 멜빈 요양원 내에서 움직이면서 총을 겨눌 때를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윌리엄 부국장이 움직였다.
윌리엄 부국장이 그냥 막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정확하게 그들을 조준해서 제거했다.
아마 모르고 봤다면 첩보 영화의 특수 효과라고 했을 테지만 이 동영상을 보고 있는 이들은 그렇지가 못해서 힐끗 중앙에 홀로 앉아서 냉수를 홀짝이는 윌리엄 부국장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오십대 초반으로 체력이 한창 떨어지는 윌리엄 부국장이다. 배가 툭 튀어나와서 200m를 뛰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는 미해병대를 시작으로 델타포스를 비롯한 다양한 특수 작전에 경험을 쌓은 윌리엄 부국장 프로필에서 눈을 뗀 채 아직도 믿기지 않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51세 맞습니까?”
“......네.”
민망한 윌리엄 부국장도 새삼 자기 나이를 인식했다.
이번 일에 단단히 화가 난 마이크 FBI 부국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칫하면 두 자리 숫자의 희생자가 나올 뻔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고 처신하신 겁니까. 더욱이 이건 CIA 영역도 아닙니다. 도대체 톰슨 보좌관에게.....”
로버트 차관보가 분노해서 떠들고 있는 흥분한 마이크 부국장 입을 가로막았다.
“이미 VIP도 내부적으로 윌리엄 부국장의 독단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결정한 사안입니다. 쓸데없이 논지를 바꾸지 마세요.”
“하, 하지만......”
“압니다. 윌리엄 부국장이 홀로 결정한 것을. 하지만 그의 리더쉽 때문에 최악에는 세 자리 숫자가 나올 참사를 막았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이미 백악관에서 잠정 결론이 난 것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레이즈 CIA 국장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 역시 새삼 프로필과 동영상을 다시 살피면서 믿기지 않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버트 차관보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바쁘신 윌리엄 부국장을 이렇게 부른 것은 질책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습격한 자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죽은 자들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들이 왜 멜빈 요양원을 습격한 겁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국내 문제는 FBI 담당입니다.”
“하지만 윌리엄 부국장이 때마침 습격 직전에 어머니 소피아씨를 퇴원시켰더군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지금은 사라진 페이만 선생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그자에 대한 의혹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요양원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멜빈 요양원에 죽은 사망자 다섯 명도 알고 보니, 페이만 선생과 관련이 있더군요. 이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겁니까?”
“의심만 했습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윌리엄 부국장이 자신의 어머니를 멜빈 요양원에서 옮긴 것 때문에 일어났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들이 왜 안가만 해도 10명, 에드워드 팀에 20명, 멜빈 요양원에 15명으로 모두 45명을 동원해 습격했을까요?”
윌리엄 부국장도 잠깐 침묵했다. 그 역시 정말 알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내 영역이라서 이렇게 이슈가 된 시점에서는 자신조차 간접적으로도 관여하기 힘들었다.
“제가 정말 알고 싶은 진실입니다.”
예상한 답변.
애초에 미국 국내 문제는 FBI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다른 이들도 결국 더 이상 윌리엄 부국장에 대한 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민을 위해서 목숨을 내건 헌신적인 행보에 국민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이어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안색이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있던 레이즈 국장도 어쩔 수 없이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부국장은 당당한 자세로 일어나서 회의실을 나섰다. 그는 힐끗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레이즈 CIA 국장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CIA 내부에서 정보를 흘린 자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설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