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이번 우물 프레임으로 명성을 올린 최영준 차장이 슬그머니 질문했다.
[혹시 11번길의 기적 열화판이 메틸클린인 것은 아닙니까. 11번길의 기적이 비록 기적적인 치료 효과를 보였지만 제조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1번길의 우물을 모델로 삼아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메틸클린을 개발했을 거고, 그것이 오성 바이오 입장에서 이익이니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성 바이오 홍보팀이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개연성이 높은 이 질문에 기자들끼리 소란이 더 심해져 버렸다.
이곳 회견장에 나타난 기자는 오히려 오성 바이오 말을 믿지 않았다.
“어, 생각해보니 진짜 그럴듯하네.”
“아니 그러면 오성 바이오가 11번길의 우물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신약을 개발했다는 소리잖아?”
“맙소사 그러면 11번길의 기적은 진실이라는 말이잖아!”
“하지만 식약청에서는 이미 11번길의 우물이 별다른 성분이 없다고 했잖아?”
“공무원 애들 말을 못 믿지.”
기자 회견장은 혼란을 거듭한 모습을 본 최영준 차장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면서도 조민호가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
글로벌 제약 회사인 아스트라는 미국에 본사를 두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을 벌이고 있는 회사다.
고혈압 치료제를 시작으로 해서 심혈관계 종류 약을 판매했다.
이들 매출에서 적지 않는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중추 신경계 치료제다.
따라서 아스트라가 중추 신경계 경쟁사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감시한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들의 주가가 5% 가까이 폭락해버리자 당황해서 확인했는데, 뉴욕 타임지에 나온 오성 바이오의 메틸클린 기사 때문이라는 것을 찾았다.
이 기사는 딱히 메틸클린의 대단함보다는 오히려 11번길의 기적 사태를 흥미롭게 기술했다.
아시아 한구석에서 일어난 이 황당한 사태를 통해서 한국인의 의식을 숨김없이 그대로 비판했다.
어이가 없는 사태였지만 아스트라는 한국 아스트라 코리아 지사장에게 지시해서 사태 파악은 한 후에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폭락한 아스트라 주가는 다시 반등해서 회복되었다.
그런데 국내 제약 업체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메틸클린 신약 개발과 연결되는 업체는 꽤 큰 타격을 받고 주가하락을 이어갔다.
조민호는 기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국내와 해외 반응에 고심했다.
‘쉽지 않네. 하긴 신약 개발이 쉽게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다만 11번길의 기적 사태가 워낙에 특이해서 지켜본 것일 테고.’
그랬다.
단순히 카더라 소식만으로는 글로벌 제약 회사인 아스트라에 영향 주기는 어렵다. 다만 매출 규모가 작은 국내 중견 업체는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메틸클린을 빨리 개발해야 하는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바스클린 신약 개발도 이제 임상 2상 시험 막바지 단계였고, 임상 3상 시험은 또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이제는 미국 FDA 승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고, FDA 승인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에도 손을 쓰야 했다.
‘이제 스티븐 치료를 시작해야겠어.’
지금은 11번길의 기적을 통해서 얻은 것이 꽤 많았고, 특히 특성 혼원기에 대한 이해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무려 63개의 유전자 변이와 12개의 핵심 신호 전달 체계에 대한 것을 하나씩 살펴서 그것을 전부 특성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60명의 장애 아이를 치료하는 것처럼 하나씩 나누어서 작업했고, 그 결과물을 한 번에 다 합쳐서 구조화에 들어갔다.
세포 생존을 시작으로 해서 혈관 형성, 기질, 면역, 후생성 변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작업이었다.
조민호는 과거 무학을 창안할 때도 이렇게까지 복잡한 작업을 해본 적이 없기에 오랜만에 도전의식마저 느끼면서 이 일에 빠져들었다.
11번길의 기적을 비롯한 지금까지 조민호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생명 창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신비로운 췌장암 혼원기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롭구나.’
생명의 청사진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 췌장암 혼원기는 췌장암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포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 혼원기에 다시 한 번 환자 특성을 결합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
조민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스티븐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스티븐에게 뭘 요구할까?’
***
2001년 에플 4분기 매출은 고작 작년 대비 24%가 줄어든 14억 달러에 불과했고, 저가격PC공세라는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핏이 출하된 후에 상황이 아주 달라졌다.
올해 4분기 아이핏 출하 대수는 무려 870만대를 넘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 매출만 2001년 에플 매출을 넘어선다.
이제 에플의 스티븐은 부활한 휘트니와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홍보활동을 자연스럽게 펼칠 정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심지어 그가 키운 픽사는 승승장구를 기록하면서 디즈니 품으로 넘어갔다.
스티븐의 이런 놀라운 모습에 에플은 날이 갈수록 성장을 거듭했다.
스티븐이 없는 에플은 누구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스티븐이 이번 췌장암 수술 이후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설은 에플에게는 큰 악재였다.
아이핏 이후 과연 에플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회의감은 점점 커졌다.
스티븐은 계속되는 언론과 경제 전문가의 지겨운 건강 우려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았고, 로버트 힐 대사를 스토커처럼 공격했다.
그런데 드디어 로버트 힐에게서 연락을 받자 래리와 같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티븐은 지겨운 파파라치를 의식해서 모자, 선글라스, 마스크로 중무장했고, 래리 역시 스티븐의 강요에 얼굴을 숨겼다.
“아니 한국에서 날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래야 하는 거야?”
“닥쳐.”
“나에게 화를 내면 어떻게 해. 이렇게 치료가 늦어진 것은 그만큼 상대가 신중하다는 소리잖아.”
“네가 무능해서 그래. 로버트 힐 대사에게 상원으로 밀어준다고 한다든지 방법은 많았어. 그냥 전화질만 하니, 일이 진행될 리가 없잖아!”
“그놈의 더러운 성격은 여전하네.”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 잘 살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
혀를 내두른 래리는 다혈질인 스티븐 태도에 툴툴거리면서 가끔 주변 시선에 모자를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차량에 올랐다.
“하지만 괜히 실력도 잘 모르는 치료사를 상대로 개소리하지 마라. 결과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치료가 제대로 받을 때까지는 성질 좀 죽여.”
“나 바보 아냐.”
“아니 넌 분명히 상대가 조금만 이상한 소리해도 들이박을 것 같아서 그래.”
“내가?”
“그래.”
스티븐의 악명은 에플 내에서도 자자했다. 지시에 불응한 직원은 그날부로 퇴출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마음에 들지 연구원을 마치 스토커처럼 괴롭혔기 때문이다.
래리는 괜한 문제를 만들기 싫어서 다시 한 번 스티븐을 압박했다.
“아이핏 매출 대박 때문에 네 영향력도 많이 회복되었어. 특히 음악 업계에서 성공 덕분에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 디지털 음악 시장에 한해서인지만 당분간 경쟁사는 등장하지 않다고 하잖아. 한국 음반 시장 역시 마찬가지야. 그러기 자기 위치에 대해서 자각 좀 해!”
우쭐한 스티븐은 피식 웃었다.
“아마 다음 차세대 무기가 나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지겠지.”
“차세대 먹거리 말하는 거야? 벌써 준비가 다 끝났어?”
“흐흐흐, 비밀.”
하지만 스티븐 눈빛은 좋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그림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강이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근한 자랑질이지만 래리는 굳이 스티븐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스티븐 성격을 잘 아는 터라 오히려 기대했다.
‘그래서 네 건강이 문제야.’
췌장암 수술 이후로 스티븐 안색은 몰라보게 초췌해졌다. 특히 무리하게 일을 할 때면 그 상태가 더 악화하였다.
래리도 주치의와 같이 그렇게 스티븐을 설득하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티븐은 마치 자신의 생명을 깎아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발 이번에는 이 친구가 치료되어야 할 텐데......’
***
스티븐도 겉으로는 래리에게 큰소리쳤지만 내심은 많이 달랐다. 그 역시 극악한 췌장암 생존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후계자에 대해서 내심 고심했다.
‘팀이 정말 잘할까?’
회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대체하는 최고 경영 책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이 다시 부활시킨 에플의 미래가 결정된다.
새로운 CEO 양성 계획은 이미 에플 내에서 진행 중이었다.
스티븐은 자신이 탄 차량이 경기 외곽의 한 별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복잡한 상념을 일단 털어 냈다.
경호원이 탄 차량 역시 같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입구 경비원에 의해서 한쪽에서 내렸고, 그들은 막아서는 이들과 대립했다.
스티븐이 크게 고함쳐서 그들을 일단 물러나게 하였다.
래리는 힐끗 단아한 한국 별장 모습에 한 번 시선을 돌아보았다.
정원에서는 마침 IT계의 영웅을 보게 된 최영준 차장이 흥분된 얼굴을 한 채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다.
“중아일보의 최영준 차장이라고 합니다. 스티븐 당신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기자라는 소개에 움찔한 스티븐은 래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최영준 차장이 방긋 미소 지었다.
“아 이곳에는 기자가 아니라 로버트 힐 브로커로 나왔을 뿐입니다.”
“흠, 스티븐입니다.”
“래리입니다.”
두 사람은 자기 경호원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고서야 이곳 별장을 지키는 경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영준 차장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면서 한쪽으로 물러나면서 손을 별장 안으로 가리켰다.
“스티븐의 경호 때문에 경비에 주의를 많이 기울였습니다.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
별장 안은 미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한옥 방식이었는데, 내부는 깔끔했다. 한 쪽으로 나 있는 창을 통해서 주변 경관을 잘 드러났다.
한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이어서 스티븐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스티븐은 이보다 거실 중앙에 조용히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는 조민호를 발견하고는 흠칫했는데, 아니 깜짝 놀랐다.
“!”
일단 너무 어린 나이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기운에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과거 동아시아를 여행할 때 인도에서 본 적이 있었던 선지자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도 저렇게 신비하지는 않았다.
‘맙소사!’
그가 인도를 방황하던 시절은 에플에서 쫓겨난 이후에 모든 일이 잘 되지 않던 시점이다. 건강도 빠르게 나빠져서 스스로를 돌아보려고 했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동아시아의 신비로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스티븐은 그 어떤 곳에서도 조민호와 같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을 본 적은 없었다.
동양 사상을 전혀 모르는 래리가 조민호 모습에 크게 실망해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진지한 스티븐 모습에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조민호는 살짝 놀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오히려 덤덤하게 질문했다.
‘......역시 잠재 선천지기 스탯이 1,600을 넘어. 정말 가면 갈수록 놀랍구나.’
“치료비는 어떻게 할 겁니까?”
최영준 차장이 중간에 통역을 해주었다.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은 래리가 발끈해서 소리치려고 한 것을 스티븐이 오히려 막았고, 래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 얼마를 원하는 겁니까?”
다른 환자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조민호가 오히려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스티븐을 치료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지만, 문제는 치료하고 난 다음이다. 휘트니도 만만치 않았지만, 스티븐은 더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선천지기를 흡수하는 정도로만 생각한 조민호였지만 스티븐을 기다리면서 휘트니에 대해서 생각했고, 이 잠재 선천지기가 일종의 카르마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만약 스티븐을 치료하는 것은 단순히 그 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의 카르마에도 영향을 주게 되면, 스티븐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스티븐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경건한 어조로 고개를 숙였다.
“제 치료의 대가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 스티븐?”
오히려 옆에 동행한 래리가 입을 딱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스티븐 모습을 쳐다보았다.
조민호는 독특한 상대 태도에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나중에 말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