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아니 그분은 사외이사님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경영 간섭해도 되는 거에요?”
“아, 그렇지. 흠, 그런데 나도 잘 몰라. 뭐 사장님이 하라고 하잖아.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지금 날 보고 김건중 회장 막내딸이 고작 오성 바이오 사장을 겁낸다는 말을 믿으란 말인가?’
“그런가요?”
가자미눈을 한 장연주 대리는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 김지수 차장을 쳐다보면서 슬쩍 다른 서류를 살피다가 익숙한 두 사람 이름을 발견했다.
“어? 이들은 뭐에요?”
“아, 인사팀에서 우리 오성 바이오 쪽으로 확정한 신입이야. 참, 두 사람 전부 다 장 대리와 같은 대학 출신이네.”
“......그러네요.”
따가운 시선에 안 그래도 조철영 이사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한 김지수 차장은 화장실 핑계로 도망가 버렸다.
그녀는 평소에는 그렇게 냉정한 김지수 차장이 조민호 아버지 때문에 맛이 갔다는 것에 혀를 내두르면서 박진민과 김영탁 이름을 살폈다. 자연스럽게 지난 회의 때 조민호의 영향력을 떠올렸다.
‘물론 대주주를 대리해서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사외이사가 회사 경영에까지 미주알고주알 할 수가 있을까.’
솔직히 조민호가 사내 상사가 된다는 것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했다.
‘확인해봐야겠어.’
***
오늘 물리학과 선후배 회식은 오성 그룹 입사가 확정된 박진민이나 김영탁을 축하 자리를 겸해서 평소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물리학과 선후배는 모두 두 사람 앞에 가서 잔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은 물리학과 선배가 돌아가면서 잔을 따라주는 환대가 싫지 않았고, 주변에서 칭송하는 말도 오히려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방금 퇴근한 듯한 오피스 복장을 한 채 나타난 장연주 대리 때문이다.
장연주 대리는 두 사람 맞은 편에 떡 하니 앉아서 계속 술을 따라 주었다.
“자자, 마셔, 너희는 오성 그룹 합격했다고 좋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사회 나가면 알게 될 거다. 지금은 참 좋은 시기란 걸.”
“아, 네.”
“회사 일과 자체가 정해진 시간 동안 다람쥐처럼 반복하는 거야. 돌출 행동 따위는 용납 안 해.”
군대를 갔다 온 두 사람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조직 생활이니......”
“군대와 비교하면 안 돼. 직장 상사란 게 아무리 좋아도 매번 스트레스를 주니까. 웃기는 게 뭔지 알아? 강한 위계의식 가지고 일하면 상사가 짜증 내. 그때가 제일 괴로워.”
타율적 노동에 찌 들려서 지속해서 압박은 받은 장연주 대리는 맥주잔에 가득한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카아!”
“지금 직장 상사가 많이 괴롭힙니까?”
“김지수 차장? 아니 진짜 괜찮아. 그런데 상사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일이 제때 되지 않으면 막 은근히 히스테리를 부려. 퇴근할 때 되면 피곤해서 쓰러지기 바빠.”
“......아, 네.”
두 사람도 얼핏 김지수 차장이 인간적으로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가 문득 익숙한 이름이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상사님이 오성 그룹 막내딸 김지수를 말하는 겁니까?”
“어? 너희도 아는구나. 진짜 사람 진국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일이 바빠지면 이야기가 달라. 살인적인 업무를 지시하는데, 환장하겠다니까.”
두 사람은 그제야 안면이 있는 김지수 차장에게 압박받으면서 무미건조한 직장 하루 생활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기가 푹 죽었다가 막상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반발심 때문에 발끈했다.
“선배, 왜 그래요?”
“민호 말이다.”
두 사람은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자기 민호는 왜요?”
“이 새끼들이 지금 날 놀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너희 둘 다 이미 오성 바이오로 결정 났어. 그런데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 하냐?”
“......우연이겠죠.”
“내가 민호에게 확인해볼까? 가만 민호 이 녀석은 어디에 있어?”
“아, 민호는 요즘 연구하는 게 있어서 못 왔어요.”
“그런데 너희도 머리가 있잖아. 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너희들 이력서를 내가 확인해봤는데, 부정 채용으로 의심되더라.”
“......우리도 열심히 했습니다.”
“미안, 내가 말이 헛나왔다.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가 술만 먹으면 떠들었던 그 민호가 내가 아는 민호가 맞아?!”
“......네.”
“진짜?”
두 사람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렇지 않을까요?”
“에휴, 내가 대삐리데리고, 뭘 하는 건지.”
장연주 대리는 결국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두 사람이 알아서 채워주는 잔을 묵묵히 먹기만 했다.
“너희들 민호가 오성 바이오 사외이사라는 것을 알지? 야아, 그런데 알고 보니, 민호 영향력이 장난 아냐. 우리 차장님도 끔뻑 죽어. 심지어 경영진은 민호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 이번에도 그냥 한마디만 했는데, 오성 바이오 본사가 발칵 뒤집혔어. 덕분에 난 피똥을 쌓고!”
“......네.”
두 사람도 조민호 때문에 혜택을 봤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들 자신과 회사 실세 조민호 관계를 떠올리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둘 다 잔을 마시다가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옆에 왔던 다른 동기나 후배도 장연주 대리의 서슬시퍼른 압박에 침묵했다.
장연주 대리는 이미 오성 바이오 비서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은 다들 눈치를 보면서 슬슬 기었다.
박진민 역시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설마 회사 출근해서도 민호 부하 노릇 해야 하는 거?’
***
조민호는 오성 바이오 경영보다는 신약을 이용해서 아스트라 제약을 흔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한 가지 지시를 내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철영은 입장이 좀 달라서 회사 적응 때문에 오성 바이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꼼꼼하게 살폈고, 크게 당황했다.
민호 이야기를 가볍게 전달만 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제 사무실은 편하게 준비해주십시오. 아 그리고 ADHD 치료제는 갑자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당장 신약을 개발하다니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현실적으로 생각 좀 해주십시오. 네, 물론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따가운 가족의 시선을 느낀 조철영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조수현 회장의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 최태한 사장님 전화야. 지난 회의에서 몇 가지 안건을 정했는데, 다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어.”
“벌써?”
“아니 뭐 그냥 새로운 신약 조사하는 걸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 것뿐이야. 아예 새 프로젝트를 잡아서 예산까지 벌써 편성했더라.”
“너 제법이다!”
“에이, 내가 뭐한 것이 있나.”
하지만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조정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전 새로운 사무실도, 비서도 전혀 안 붙여 주던데요. 심지어 임원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유격 받다가 팔, 다리마저 부러져서 군국 병원에 입원까지 했어요!”
조수현 회장도 입 다물었고, 조정연은 회사에서 왕따당한 것이 창피해서 가족에게 아무런 말을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사실을 안 임서이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저, 정말이니?”
“후유, 아니네요.”
차마 창피해서 주제를 돌린 조정연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작은 아버지, 김정욱 전무는 성격이 까칠해서 절 계속 압박하더라고요.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어? 그래? 정말 사람 좋은 분이던데, 식사도 몇 번 얻어먹고 그랬어.”
“네? 그 사이코......, 아니 김 전무가 그런 분이 아닐 텐데요?”
“아, 그런가.”
“가만 최태한 사장이 따로 바이오 관련해서 봐야 할 자료를 잔뜩 던져주지 않던가요?”
“전혀. 아, 오성 연구소에서 몇 사람 붙여주기는 했는데, 그들 통해서 지금 배우는 중이다.”
“......”
조정연은 임원 교육받기 전에도 회사 내에서 은근히 왕따를 당했다. 대다수 임원에게서 여러 가지 압력을 받았다.
그런데 조철영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개새끼들.’
조수현 회장은 대충 짐작하는 것이 있어서 그냥 모른 척 식사만 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 식사 분위기를 지키고 싶었다.
다만 그도 듣는 귀가 있어서 은근슬쩍 조민호에게 입을 열었다.
“민호야, 넌 어때?”
“저야 늘 그렇죠.”
“이제 곧 1학기는 끝이고, 졸업하면 오성 바이오 사외이사만이라도 열심히 해. 지금은 인맥 쌓는 것이 더 바람직해.”
“으음.”
조민호도 인간 산삼 스티븐을 떠올리면서 이전처럼 고집부리지 않았다. 이미 인맥이 있었다면 치료 작업도 순탄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느끼자 조수현 회장이 슬그머니 조민호를 설득했다.
“미래 본사에도 자리하나 만들어줄 테니, 쉬엄쉬엄 해 봐.”
밥 먹던 다른 가족은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서로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은 다들 잔뜩 긴장했다.
조민호 역시 대수롭지 않게 거절하려다가 문득 스티브 치료비를 떠올렸다.
“아뇨. 괜찮......, 혹시 에플 분위기에 대해서 좀 아세요?”
조수현 회장은 뜻밖의 주제가 나오자 자신이 아는 몇 가지 사실을 털어놓았다.
에플은 최근 몇 가지 내부적인 문제가 터졌는데, 그중에 하나가 스톡옵션 부정이다.
“스톡옵션 지급일자를 조작해서 주식 매입가격을 낮추는 백데이팅을 했다는 소리가 있어. 주식 거래 중단까지는 안 가겠지만, 타격이 크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서 조사하고 있으니까.”
“간단한 문제는 아니군요.”
“거기에 노트북 배터리 화재도 문제야. 이것 때문에 소니가 제작한 배터리 200만개 리콜까지 신청했어. 한 마디로 박살났지. 아마 에플 경영진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다.”
“지금은 에플 투자가치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자기 말을 잘 알아듣는 조민호 행동에 흡족한 미소를 짓은 조수현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히 스티븐 회장은 췌장암 수술까지 받은 상황에서 이런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대로 경영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주가는 바닥을 길수밖에 없어.”
조민호 눈빛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만약 스티븐 회장 건강이 좋아진다면 상황이 달라지겠군요.”
“암, 다르다 말다. 스티븐 능력은 이미 아이핏으로 이미 증명했어.”
“괜찮네요.”
“뭐가?”
“스티븐 건강이 좋아 진다에 투자하고 싶어서요.”
“그건......”
조수현 회장도 뒤늦게 리핑과 시중신 치료를 떠올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조민호에게 감정 많은 조정연이 한껏 비웃었지만 무시했다.
오히려 무시당해서 발끈한 조정연 입을 일방적으로 막아버렸다.
“설마 에플에 투자하라는 말이야?”
“상황 봐서요.”
“하지만......”
“확실하면 할 겁니다.”
“그래.”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더 언급하지 않았다.
조정연은 아버지에게 무시당한 것을 느꼈지만,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스티븐 회장은 당장 올해를 넘기기 어렵다는 소리가 파다하던데, 저 새끼는 미친 것 아냐. 차라리 잘 되었다. 이번에 에플투자해서 제대로 망해라!’
***
래리 브라우드의 황당한 주장 때문에 잔뜩 분노한 스티븐은 췌장암 재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 한창 성장기를 달리는 회사 일에도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이 와중에 백데이팅 통해서 부여받은 주식 부정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옵션행사를 취소해서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에플 주식은 자칫하면 나스닥 규정 위반으로 거래 중단을 당할 수도 있었고, 노트북 리콜 문제도 계속 스티븐을 괴롭혔다.
엎친 대 덮친 격으로 아이핏을 빼앗으려는 강도에 대항하다가 15세 청소년이 사망한 일이 터져버렸다.
스티븐도 다급하게 유족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의를 표했다.
아이핏 인기가 얼마나 놀라운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는데, 아이핏은 휴대폰 기술의 발전 때문에 잠시 반짝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무섭게 발전했다.
스티븐은 아이핏 대박 덕분에서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역시 스티븐입니다.”
“디지털 컨버전스 현상 가속화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히려 그 파도를 타고 위에 올라선 스티븐의 선경지명에 경의를 표합니다.”
등 뒤에서는 사이코다, 정신병자를 남발하는 애들이 앞에서는 온갖 아부를 다 늘어놓았다.
‘이 새끼들, 내가 반드시 다 잘라버린다!’
사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저놈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가 지분 확보를 통해서 아군 세력을 더 키워나갔지만, 불행히도 회사 지분은 다 가진 저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잘 나가는 아이핏을 더 키우기 위해서 컨텐츠에 더 주목했고, 자연스럽게 요즘 뜨고 있는 가수를 살폈다.
‘응? 휘트니 신곡이 1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