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편하게 이야기하는 스티븐이었지만 마음속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역시 병상 머리맡에 잠들어 있는 딸 리사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감았다.
새삼 앞으로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퇴출당한 후에 절치부심 때만 기다렸다. 이제 회사로 돌아와서 망해가는 회사를 겨우 정상 궤도에 올렸다.
그런데 더 갈 수 없다니.
심란해서인지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래리 브라이드 발걸음 소리도 느끼지 못했다.
리사는 먼저 병실에 나타난 래리 브라이드 때문에 잠에서 깼고, 그에게 간단하게 인사만 한 후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부녀 사이에 존재하는 차가운 냉기에 래리 브라이드가 혀를 찼다.
“아직도 리사와 화해를 안 한 건가?”
“우린 싸운 적이 없어.”
“리사 이야기는 다르던데, 너 없을 때 얼마나 욕하는지 알면 충격받을 거다.”
“난 리사에게 최선을 다했다.”
“기가 차네, 그러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욕먹는다. 도대체 자기 딸에게 학비조차 안 도와주는 아비가 어디 있어?!”
얼핏 생각하면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감정적인 대립이 더 컸다. 스티븐도 냉소적으로 웃었다.
“남 가정사에 끼어들지 마!”
“진짜 별종이다!”
“마음대로 지껄여.”
둘은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기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스티븐도 리사 이야기가 불편한지 주섬주섬 위에 옷을 걸쳤다.
“스티븐.”
“조지 선생 이야기할 거면 그만 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혹시라도 지금 진행하는 표적 항암치료제를 믿는 것 같은데, 그 방식이 꼭 너에게 성공한다고 장담하기 어려워.”
스티븐은 10만 달러를 들여서 자신의 암세포 염기서열을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표적 항암치료제 개발을 진행했다.
이 방식은 특정 암세포에서 정상인보다 과도하게 만들어지는 특정 돌연변이를 이용했다.
그는 이 수단 말고도 방사선 표적 치료 방식에도 나름 투자했는데, 이 방식만으로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용건이 뭐야?”
“내 말을 끝까지 들었으면 해.”
그는 힐끗 뭔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표정을 한 래리 브라이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의사이자 질병 발생 연구자이기도 한 래리 브라이드는 의학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가진 그의 친구였다.
“왜 그래?”
나름 충분히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알아봤지만, 여전히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 때문에 래리 브라이드는 다시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로버트 힐에게서 받아온 그의 진료기록을 내밀었다.
“?”
스티븐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한 채 서류를 확인하면서 병실을 천천히 나서다가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로버트 힐 대사 이름을 들어봤을 거고, 그는 희귀한 아담스 스턱스 증후군을 앓고 있었어. 물론 과거와는 달리 잘만 관리하면 이 병으로 사망하지는 않아. 문제는 일반적인 아담스 증후군과는 달라서 치료하기가 쉽지 않았어.”
그의 표정이 아주 달라졌다.
“그런데 완치했다고? 아니 어떻게?”
“자네가 찾던 방법의 하나야. 대체 의학으로 치료했다는 거야.”
하지만 이미 대체 의학에도 수십억을 투자했던 스티븐은 이미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무슨 개소리야? 지금 내 상태가 뭔지나 알아? 난 췌장암으로 수술 후에 암세포 전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환자야. 현대 의술로는 이제 대안이 없어. 몇 년 안에는 반드시 사망 진단서를 받는다고!”
래리 브라이드도 누구보다 스티븐 사정을 잘 알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굳이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어차피 염기서열 분석까지 한 마당이잖아. 크게 실망한 대체 의학이라고 해도 다른 돌파구가 있을지도 몰라.”
안 그래도 피곤했지만 차마 래리를 생각해서 보고서를 다시 살피다가 한 가지를 확인했다.
“대체의학이라면 혹시 한의학을 말하는 건가?”
“지압법이야!”
이미 인도에 있으면서 중의학도 알아본 스티븐은 지압법이 무엇인지 일반 미국인보다는 잘 알았다.
“제정신이야?”
래리 브라이드 역시 반쯤 긴가민가해서 멈칫했다.
“......나도 이전까지는 믿지 않았어. 거기 자료 보면 환자 몇 사람에 대한 차트도 더 있지만 휘트니도 그 방식으로 치료받았어.”
여기에 갑자기 웬 휘트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소리에 스티븐은 버럭 소리쳤다.
“꺼져!”
“정말 휘트니도 그 지압법 통해서 마약 중독과 성대 이상도 치료했어. 그러니 그녀의 최근 신곡이나 한번 들어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스티븐은 병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내질렀다.
“날 그만 모욕해!!!”
래리 브라이드는 예상보다 더 격렬한 스티븐 반응에 슬쩍 물러났다. 솔직히 로버트 힐과 휘트니 치료에 대한 것을 그 자신조차 다 믿지는 않았다.
‘바보는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지압으로 췌장암 치료가 가능할까?’
***
조민호도 오성 바이오에 ADHD 치료제 신약 개발에 대해서 과제를 하나 던져 주었지만, 스티븐 치료에 관한 연구도 병행했다.
췌장암과 휘플 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생각처럼 이 치료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더욱이 췌장암을 치료하는 것과 휘플 수술받은 췌장암을 치료하는 것은 그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때마침 로버트 힐 통해서 저쪽에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긴 스티븐 같은 사람이 지압법을 믿을 리가 없잖아.’
아마 보통 환자였다면 기를 사용한 침술법인 혼원기 치료법에 대해서 굳이 설득하기보다는 그냥 손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휘트니 잠재 선천지기가 네 자리를 넘겼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티븐 역시 그 못지않은 잠재 선천지기를 가졌다.
살아있는 만년하수오(?)나 마찬가지인 스티븐을 포기할 수는 없다.
조민호는 어차피 스티븐이 살기 위해서라도 결국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했고, 지금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췌장암은 일반적인 암과는 달리 조기 발견한다고 해서 치료되는 것도 아니고, 크기가 작다고 해서 치료가 쉽지도 않아.’
이 췌장암은 알코올이나 지방 음식과 관련이 있는데, 조금씩 매일 마시는 술은 췌장 실질이 섬유화가 진행되면서 딱딱하게 변한다.
문제는 이 섬유화가 80% 이상이 넘어야 통증이 생긴다.
지방의 과도한 섭취 역시 이 췌장암에 영향을 준다.
이 췌장암 치료에서 치료약은 수술 후에 남아 있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보조 요법이거나 수술하기 어려워서 생존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즉 치료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조민호는 오성 바이오 연구소에서 췌장암 환자에게 효과가 우수하다는 것이 증명된 젬시타빈을 구해서 자기 몸에 직접 테스트했다.
수십 개의 분자 생물학적인 발생기전에 영향을 끼치는 젬시타빈은 조민호 경혈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췌장암 환자 중에 90% 이상에게서 발생하는 EGFR 과발현이 나타났다. 복잡한 하부 신호전달 체계에도 영향을 줬다.
멀쩡한 조민호는 자기 몸속의 신호전달체계는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젬시타빈 변화를 따라서 혼원기를 하나씩 조합해나갔다.
베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그다음 절차는 역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젬시타빈이 공격하는 특이한 물질을 발견했다.
‘이게 뭘까? 아, 난 정상이지.’
조민호는 젬시타빈이 공격하는 특성을 하나하나 거꾸로 역 추적해서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췌장암 혼원기를 만들었다.
‘......이건 놀랍네.’
K-RAS는 세포 증식과 사멸에 관여하는 대표적인 단백질인데, 췌장암 환자 90% 몸에서 이 K-RAS 돌연변이가 발견된다.
젬시타빈은 놀랍게도 멀쩡한 K-RAS 세포를 공격했다.
조민호 몸속의 세포 증식은 이 공격에 부담 없이 방어했다. 아니 천 년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달걀을 바위에 던진 것처럼 결국 사그라졌다.
조민호는 이 특성을 췌장암 혼원기에 조금씩 구겨 넣었다.
췌장암 혼원기는 신호 전달체계 변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간이 갈수록 덩치를 키워갔다.
‘어떻게 만들기는 만든 것 같은데......’
몇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멀쩡한 조민호 자신을 상대로 해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서 효과가 제대로 발휘할까 하는 의문이다.
‘임상 시험을 해봐야 하는데, 이것은 이것대로 문제구나.’
물론 선천지기를 이용해서 김정환 부장 검사의 폐암을 치료할 때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나중에 다른 환자에게 응용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왕이면 과거보다는 스티븐 치료를 통해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문제를 떠올린 조민호는 오히려 밝게 웃고 말았다. 지금은 대안이 없을 것 같지만, 아예 방법이 없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관을 만났다.
‘재미있어.’
***
조민호는 스티븐 혼원기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도 굳이 스티븐 쪽에 매달리지 않았다. 인간 산삼에 대한 기대가 있지만, 꼭 스티븐에 집착하지 않았다.
‘세상에 늘린 게 환자고, 따지고 보면 스티븐도 제약 쪽과는 달라서 아쉬운 것은 없으니까.’
넌지시 아버지 조철영에게 당부해서 오성 바이오 경영진을 압박했다.
[기대에 못 미치면 차라리 다른 제약 회사를 인수할 겁니다.]
오성 바이오는 평소와는 달리 시장바닥처럼 바쁘게 변해갔다.
임직원은 ADHD 신약 개발을 위해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해야 했고, 어떤 식으로 신약 개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오성 바이오 연구소가 제일 바쁘기는 하지만 사전 조사를 진행하는 기획실, 비서실 역시 정신없기는 매 한 가지다.
오성 바이오는 조민호 한 마디에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다녔다.
갑자기 일주일 내내 새벽 2시까지 야근하면서 ‘힘들어 죽겠다!’고 독백하던 장연주 역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중에 김지수 차장이 깊은 수심에 잠긴 것을 봤다.
그녀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김건중 막내딸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전화하는 김지수 차장 목소리는 짜증과 분노로 가득했다.
[엄마, 그만 좀 해. 난 진짜 선 볼 생각이 없다니까. 대통령 친족이고, 재벌이고 관심 없어. 아빠랑 이미 이야기 끝난 거야!]
마침 기회가 왔다가 판단하자 장연주는 슬쩍 끼어들었다.
“집에서 벌써 결혼하라고 하세요?”
“후유, 말도 마. 이젠 꿈에서도 악몽을 꾼다니까. 하루 단위로 바뀌는 데, 아주 미치겠어.”
최근 김지수가 오성 바이오 사태를 무난하게 해결한 것도 있지만, 그녀의 미모가 널리 알려지면서 아들 가진 집안에서는 전부 선보자고 제안했다.
오성 그룹에 견줄만한 가문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의외로 적지 않았다.
재계, 정치를 비롯해서 소위 말하면 힘 있다고 생각한 집안에서는 난리였다.
“하긴.”
장연주 대리도 순순히 인정했다. 옆에서 지켜본 그녀의 평가 기준에 따르면 김지수는 의외로 재벌가 딸과는 달리 성격도 나쁘지 않았고, 씀씀이도 선을 넘지 않았다.
“아주 미치겠어!”
김지수 차장은 냉수를 마구 마시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녀는 그 틈을 노려서 책상 위에 있는 프로필을 확인했다.
“어? 조철영 이사님에 대한 건가 보죠?”
“아, 비서나 사무실을 준비해야 하니까.”
“조정연 이사와는 달리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아, 그거? 그래도 우리 회사 대주주잖아.”
“조정연 이사도 그렇지 않아요?”
“그런가?”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에이, 설마 저한테까지 비밀로 하실 거에요?”
“아냐!”
“실망에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도 도와줄 수 있을지 말에요.”
“그게......”
이미 조민호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직원에 비해서 가까워진 장연주 대리는 서류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 조철영 이사님 아들이 조민호 이사님에요?”
“몰랐어?”
“당연히 몰랐죠. 민호 집안은......”
김지수 차장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귀를 기울이다가 소리쳤다.
“민호씨가 대단하잖아. 지금 회사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도 새로운 신약 연구에 대한 압박을 넣어서이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녀는 마치 자기 자랑이라도 된 것처럼 임원 회의 내용을 다 이야기했다.
경악한 장연주 대리는 최근 오성 바이오 사내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원인이 조민호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