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힐끗 조수현 회장을 쳐다보았는데, 그의 심사도 복잡해 보였다.
“정연아,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박사 학위까지 받는 게 어떠냐?”
“아버지, 여기 민호 보세요. 대학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회사 일을 하잖아요. 그깟 박사 학위보다는 사회 경력이 더 중요합니다.”
전부 조민호 핑계를 명분으로 코넬 박사 과정을 여기서 접겠다는 의사를 숨김없이 그대로 표시했다.
조수현 회장은 이미 지난 학기 성적이 개판이라는 것과 심지어 마약 혐의를 받았다는 것까지 따로 보고를 받았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국내 와서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나마 다른 재벌 2세처럼 막장은 아니지만, 성격이 다혈질이라서 걱정스러웠다.
‘혹시나 민호 녀석에게 대들었다가는......’
두 사람을 교대로 쳐다보았는데, 역시 조민호를 바라보는 조정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조민호는 그런 반응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묵묵히 조정연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조정연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민호야, 일단 반갑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아버지 일에도 도움을 준다는 소리도 있던데, 앞으로는 나랑 상의해. 이번 드라마 펀딩 프로젝트는 내가 담당할 테니까.”
내심 비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여기 볼 일 때문에 간단히 무시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큰아버지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나도 빠질 수 없어.”
그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 비서에게 커피 심부름까지 시킨 후에 기다렸다.
그런데 조수현 회장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나머지 이야기는 따로 하자.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나가 봐라.”
“아버지......”
“회장님!”
“알았어요.”
조민호는 혀를 차면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박희관 부장은 준비한 자료와 노트북을 꺼내서 간단하게 드라마 펀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안건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단순히 펀딩 자금이 문제가 아니라 뜻밖에 많은 영화 제작사나 방송국 측에서 다양한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배효진의 믿기 어려운 연기 변화 뒤에는 이미 미래 증권이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조민호는 물끄러미 설명을 듣다가 다시 손을 들어서 막았다.
“대충 이해는 합니다만 전 드라마 산업은 잘 모릅니다. 그 일은 큰아버지가 알아서 해주시고요. 오늘 제가 이렇게 온 것은......”
다시 회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흥분한 조정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
조수현 회장도 골치가 아픈 얼굴로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조민호 역시 왜 조정연이 저러는지 박희관 발표 내용을 보면서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별의별 벌레가 다 꼬이네.’
***
부자간의 지루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박희관 부장 발표 자료를 살폈다.
“회장님에게 이미 말했지만 IT 사업 관련해서는 미국에 있던 제가 더 잘 압니다. 이번 드라마 펀딩은 민호가 감당할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아직 민호가 맡는 것이 아니라, 박희관 부장이 책임질 거다. 그리고 앞으로 회사에서 할 일은 내가 따로 정해주마. 지금은 그만 가 보거라.”
“회장님!”
“정연아......”
차갑지만 가라앉은 목소리는 조금 전의 조수현 회장과는 전혀 달랐다. 흥분한 조정연조차 찔끔해서 조수현 눈치를 봤다.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민호 관련된 일은 네가 감히 왈가왈부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회사 내에서 조민호 명성이 벌써 자연스럽게 돌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내심 불안한 조정연은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조정연.”
조수현 회장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하자 갈등하는 조정연도 분통을 터트렸고, 회의실을 나가면서 조민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조민호는 민망한 조수현 회장을 보면서 지금까지 조용한 가족 내에 풍파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하면서 내심 혀를 찼다.
‘무림이나 현대나 다를 바가 없군. 어째 망나니가 없다고 했어.’
“미안하다.”
조민호는 조수현 회장 성정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가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나 동생은 맘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세요.”
“그래. 그 부분은 내가 단단히 주의하라고 경고 하마.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온 거야?”
“백용훈 변호사 관련해서 몇 마디 해주려고요.”
“......설마 대법원장 후보 지명을 받은 백용훈 변호사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변호사 맞습니다.”
“으음.”
다른 사람과는 달리 대법원장이 가지는 영향력을 잘 아는 조수현 회장을 마른 침을 삼킨 채 신 비서에게 이야기해서 냉수부터 마셨다.
특히 백용훈 변호사는 현 여권 성향이라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백용훈 변호사가 설사 대법원장이 된다고 해도 친 대통령 성향이라서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아뇨. 그 사람은 오히려 친 헌법 성향을 보일 겁니다. 그러니 사전에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즉 미래 증권에 압력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반대일 겁니다.”
“......진담이냐?”
“네.”
조수현 회장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결국 회장실에서 담배까지 피웠다. 만약 백용훈 변호사가 정부와 여당 정책에 반대로 대법원이나 헌법 재판관을 이용해서 투자 판결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경우를 떠올리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최악의 규제를 단정하고 미래 증권 법무팀이 연구 중이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을 가정해서 다시 일을 짜야 한다.
“혹시 민호 네가 백용훈 변호사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다는 말이야?”
“설마 제가 그럴 힘이 있겠습니까? 제 말은 모든 사람이 봤을 때 합리적인 판결을 앞으로 내릴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합리적인 판결. 바로 그거야.”
당황한 조수현 회장은 말을 더듬거렸다.
조민호는 현명한 조수현 회장이 자기 조언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닫자 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자세한 이야기는 더 필요 없겠군요. 나머지는 큰아버지가 알아서 판단하세요.”
“자, 잠깐만......”
하지만 조민호는 곧 회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가만 백용훈 변호사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설마 민호가 그를 치료해주면서 몇 가지 타협을 본 것일까? 맙소사 그렇다면......’
지난 류엔둥 사건을 떠올리면서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자칫 조정연이 조민호를 상대로 엉뚱한 사고를 쳤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상했다.
‘정연이 이놈을 불러 일을 더 크게 벌이기 전에 막아야겠어.’
***
대법원장 임명 절차는 대통령이 대법원장 후보 지명을 통해서 국회 인상 청문회 과정을 거친다.
국회 동의를 얻은 대법원장은 임기 6년으로 법관 임용, 재임용, 인사권을 포함해서 헌법 재판과 3명에 대한 지명권을 가진다.
심지어 중앙선관위, 부패방지위, 인권위 위원 지명까지 있다.
이 인사 권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법관 임용이다.
대법원장 인선이 사법 개혁이라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마 정권 초라면 여러 가지 다양한 절차를 거쳐서 신중하게 임명을 진행한다.
하지만 현 정권은 황당하게도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에 일격을 당한 후라서 전광석화처럼 대법원장 임명을 밀어붙였다.
여권 역시 현 정권에 손을 보탰다.
그들은 야당의 다양한 지적에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이렇게 성의 없이 할 거면 도대체 왜 하는 겁니까?!”
일방적으로 야당을 무시하는 여당 행동은 여론에도 좋지 않았다.
다행히 큰 비리가 없는 백용훈 변호사는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었다.
역시 다낭신 관련된 부분가 청문회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사법부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대법원장이 건강 때문에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수 있습니다. 이번 후보는 우리 야당에서 절대 불가입니다!”
백용훈 변호사 측에서 오성 의료원의 다낭신 검진 결과를 보여주었다.
“지난주 검진 결과입니다!”
다낭신 이야기는 곧 인사청문회 생방송을 통해서 대중에도 알려졌다.
박진민 역시 저녁에 친구와 같이 맥주 한 잔을 걸치면서 이 뉴스를 봤다.
“헐, 저게 뭐야? 병원 검진 결과로는 이상이 없다는 소리잖아?”
안주를 주섬주섬 집어 먹던 김영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 야당 진짜 못한다.”
당당하게 내세운 공격이 그 자리에서 분쇄되면서 이의를 제기한 이를 포함한 야당은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렸다.
박진민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저 병신 새끼들은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여당 새끼를 상대로 아직도 삽질이야!”
무능한 야당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호프집을 가득 채운 다른 손님 역시 황당한 청문회 뉴스에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조민호는 오히려 씩 웃으면서 물끄러미 백용훈 변호사 표정을 살폈다. 처음 봤을 때와는 안색이 많이 달라졌다.
청문회 과정 내내 자신이 과거 잘못한 것에 대해서 시인했고, 자신이 잘한 것에 대해서는 또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호프집에 와 있던 다른 시민은 의외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오히려 호감을 보였다.
“민호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너 저 미친 여당놈들을 지지하는 거야?”
“아니.”
“하긴 미래 그룹 재벌 3세가 지금 야당을 지지할 리가 없지.”
“난 양쪽 다 마음에 안 들어. 어차피 둘 다 오십보백보니까.”
“저 대법원장 후보는 이번 정권에서 자기 안위를 위해서 밀어붙이잖아. 내 선배 이야기로 자기 라인 판사를 쫙 깔아서 자기 입맛대로 판결 내릴 거고, 투자 관련 판결에 대해서는 미래 증권에도 부정적이잖아.”
“그럴 일은 없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저 양반이 진짜 정체를 몰라서 그래. 가만 혹시 아는 다른 정보가 있어?”
박진민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아는 이런저런 정보를 풀었다.
“저 변호사가 문제 많은 것을 알아?”
“겉으로는 민법의 정석 어쩌고 하지만 정작 다 구라야. 저런 새끼가 보면 꼭 자기 똘마니를 쫙 깔아서 자기 권력을 남발해.”
“저 새끼 겉보기와는 아주 다른 양아치야!”
‘역시 내 예상대로군.’
“그런 걱정하지 마. 왜 사람이 살다 보면, 개과천선해서 바뀐다고 하잖아. 저 변호사 양반도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글쎄다. 민호 실력을 나도 인정하지만 이제까지 저 변호사 양반이 변호한 사건 보면 욕만 나오는 사람이야!”
“두고 봐야지.”
***
최근 검찰청의 행보가 공격적으로 변화하면서 중앙지법의 영장전담 판사 부담 역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났다.
특히 이전과는 달리 김정환 부장검사 같은 중앙지검 검사가 영장이 기각 나와도 노골적으로 계속해서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많은 시민은 이런 김재건 부장판사 행패에 욕설을 퍼부었다.
김재건 부장판사는 덕분에 업무가 대폭 늘어나서 김정환 부장검사의 행패에 내심 크게 분노했다.
‘날 더럽게 본다고 해서 너희는 나랑 다를 것 같아. 너희가 아무리 그래 봐야 그 자리에서 오래 못 버텨.’
이보다는 신임 백용훈 대법원장 이후에 있을 자리 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자신은 승진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는 라인 통해서 들었기에 내심 기대했다.
자기 앞에 앉은 자기 후임 예정인 황장준 부장판사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이 자리가 생각보다는 정말 편해. 적당히 눈치껏 판결하면 괜찮거든. 불만 많은 이들이 있어도 일주일만 지나면 기억하는 새끼들은 없으니까.”
“선배님도 참 그런 이야기가 만약 사람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지가 어쩔 건데?!”
업무 시간에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 걸리면 징계를 받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앙지법 내에서도 다들 실세라는 소리가 퍼진 후에 눈치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장준 부장판사가 전화를 받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아, 우리 이 대법원장님이 이제 업무를 시작했을 테니, 좋은 일이겠지.”
그의 안색은 곧 창백하게 변한 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저기 선배, 그게 말인데요.”
“그 괜히 질질 끌지 말고 말해.”
이번 중앙지법 영장 전담 판사 보직 이동 취소와 김재건 판사 징계에 말을 더듬거렸다.
“......저기 서, 선배 이름이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개소리야?!”
그는 화들짝 놀라서 곧 법원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단순히 징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민 단체에 의해서 직권 남용과 뇌물죄로 기소를 당했다.
법관은 다행히 탄핵이나 금고 이상 선고가 아니면 파면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파면이나 해임을 당하지 않았다.
문제는 만약 유죄 판결이 나면 감방행이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씨발.”
창백한 표정을 한 김재건 부장판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후다닥 뛰어나갔다.
“서, 선배, 가,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