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조민호가 하기로 한 연기는 위험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해주는 지나가는 행인 역할이었다.
여행을 왔다가 납치를 당할 뻔한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서 강도에 맞서는 연기를 펼쳤다.
정확히는 가상의 강도를 앞에 두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꺼져!”
무대에 오르면서 누적된 기세가 이 이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다가 마치 테러에 의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일거에 터지면서 무대를 크게 뒤흔들었다.
배효진 때문에 크게 실망한 심사관 다섯 사람이 이 한 마디에 모두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경악해서 입을 딱 벌렸다.
아무런 효과가 없는 무대에 세찬 바람이 부는 것처럼 흔들렸는데, 포효하는 사자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한 쪽 카메라를 통해서 나온 화면에 잡힌 조민호 모습은 압도 그 자체다.
표정 연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그 기세만으로 그냥 주변을 씹어버렸다. 마치 연기를 위해서 태어난 생명체 같았다.
설마 하던 심정으로 지켜보던 윤석민 PD는 심사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박!’
다른 심사관 역시 경악했다.
“마, 맙소사!”
카메라 존재감이 무엇인지, 씬스틸러가 무엇인지 연기의 정석을 완벽하게 보여준 조민호는 건조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이제 오디션 봤으니, 약속 꼭 지키세요!”
조민호는 힐끗 심사관과 환호성을 내지르는 윤석민 PD 모습을 뒤로 한 채 터벅터벅 무대에서 내려와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 잠깐만요. 조민호씨,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윤석민 PD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조민호 뒤를 따라갔다.
표정 연기는 개성이 별로 없는 배우나 해당한다. 조민호처럼 저렇게 개성이 압도적이면 굳이 자기 연기만 하면 된다.
지켜보는 관객은 조민호 연기에 몰입되어서 빠져들기 때문이다.
“?”
나머지 심사관과 마지막 오디션 참석자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도대체 누구야?’
***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하지만 조민호나 윤석민 PD 둘 다 당장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윤석민 PD가 단순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배효진 캐스팅을 그녀의 열악한 연기력 때문에 이 자리에서 혼자 결정할 수가 없었다.
드라마의 다른 스태프에게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 설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민호는 그런 윤석민 PD보다는 노리던 목표 유명환이 수행원 한 사람과 동행해서 건물 안쪽에 나타난 모습을 힐끗 살폈다.
그를 발견하자 숨김없이 그대로 배효진 손을 잡았는데, 그녀는 이전처럼 반발하지 않았다.
배효진은 조민호 행동보다는 파격적인 그의 연기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윤석민 PD가 아예 노골적으로 부탁하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유명환 과장은 분노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수행원 한 사람과 같이 선글라스를 한 채 나타나서 조민호를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슬쩍 얼굴을 붉히는 배효진, 쓸개라도 내놓을 듯한 윤석민 PD, 이런 두 사람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러워하는 오디션 지원자들까지 유명환 과장의 타오르는 질투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185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여자의 시선을 확 끄는 외모까지 갖춘 유명환 과장은 삼십 대 후반 정도 나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두 눈은 섬뜩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조민호는 곧 사라지는 유명환 과장 뒷모습을 물끄러미 확인하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안 것에 만족했다.
‘잠재 선천지기 스탯이 110은 넘겠지만, 오염도가 72%가 넘어 보여. 결국, 실효 잠재 선천지기는 31정도인가. 대충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겠어.’
과거 그가 만난 사람 대부분은 오염된 선천지기를 가져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기존 만남을 토대로 해서 잠재 선천지기와 후천지기 사이의 규칙성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팀플레이 통해서 선천지기가 늘어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반대급부도 존재했다.
아니 인간 스스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면서 잠재 선천지기도 유동적으로 변했다.
악의가 심할수록 선천지기 오염은 심해지고, 순수한 노력을 반복할수록 선천지기 순도는 더 좋아진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간의 잠재 선천지기도 지속해서 변해갔다.
그것은 조민호도 전혀 상상을 못한 선천지기의 진정한 의미였다.
조민호는 유명환 과장 옆에 붙어 있는 다른 수행원도 살폈다.
‘후천지기 스탯이 2라, 일단 제대로 된 무술을 배웠다는 소리인가. 정제된 살기가 가득한 것을 봐서는......군 출신으로 보이는군. 이놈들 도대체 정체가 뭘까?’
두 사람 모습을 확인하면서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른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저 두 사람이 아니라 그 배후다. 저런 인물과 결탁하여 있는 권력 집단이라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설사 검찰청 검사라고 해도 저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내가 직접 오기를 잘했어.’
문득 두 사람을 쫓을까 하다가 최영민 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멀리서 두 사람을 철저히 추적해서 연결된 고리를 찾아주세요.]
‘아무리 봐도 수작을 부릴 것 같은데, 먼저 선수를 칠까? 아니야. 그렇게 어수룩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아. 일단 계속 자극해서 지켜보면 배후 세력도 조금씩 드러나겠지.’
***
딱히 급한 것이 없는 조민호는 굳이 성급하게 유명환 과장에게 손쓰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세력을 동원하도록 부추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 어떤 이들이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대신 최영민 사장 통해서 그들 세력을 샅샅이 확인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른 가족은 큰아버지 조수현 경호원이 알아서 보호한다.
사람을 이용한 습격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윤석민 PD가 라인 엔터를 직접 찾아와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뒤늦게 연락받은 조민호도 강종훈 대표 사무실에서 윤석민 PD를 만났다.
이미 조수현 회장의 조카란 사실을 들어서인지 윤석민 PD는 사뭇 다른 눈으로 조민호를 쳐다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조민호가 재벌 3세라서 오히려 드라마에 더 출연하고 싶을 수도 있다는 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저도 조민호씨와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드라마 제작사의 투자자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투자금은 뺀다고 하던가요?”
“네. 제작사 투자자의 주거래 은행 담당자가 다른 사업의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겠다고 태도를 바꿔서라고 합니다.”
열악한 드라마 제작 업체 입장에서 투자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대기업 계열사가 아니라면 그 재정 상태가 열악하다.
다른 자금줄 하나만 압박하면 불과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해서 망해버린다.
하지만 조민호 오히려 폭력보다는 현대식 압력이 제법 신사적이라고 생각했다.
무림 시절에 공갈, 협박, 폭력, 피와 죽음이 전문 분야인 조민호에게 불행히도 이 현대는 그런 무법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운이 좋은 놈이야.’
조민호가 말이 없자 윤석민 PD는 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올지 몰랐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별 주장이 없던 저희 드라마 국장님도 갑자기 배효진 캐스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재미있네요.”
“답답합니다. 물망에 오른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면 드라마는 고만고만해질 뿐입니다.”
“투자금이라......”
그는 오디션 자체는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 토마스를 공갈 협박해서 벌어들인 공돈(?)을 떠올렸다. 더욱이 한쪽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배효진 모습에 피식 웃다가 큰아버지 조수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민호입니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얼마죠?]
[일단 네 지시대로 대출금 1,500억은 다 갚았는데, 세금이나 수수료를 비롯한 잡다한 비용 다 떼고 나면 남는 돈은 3,000억이 좀 안 될 거다. 상하이 건물 임대료 수익이 제법 컸고......]
[제가 혹시 드라마 투자를 좀 하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안 될 것은 없다만 갑자기 웬 뜬금없는 드라마야? 으음, 뭐 사정은 있겠지. 투자자 놀이 한 번 해보려고 하는구나. 그러지 말고, 차라리 드라마 펀드를 하나 만들어서 하는 게 어떠냐? 그게 오히려 드라마 제작하기도 좋고, 나중에 마케팅하기도 훨씬 나아. 번거로운 세금 문제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건 큰아버지가 알아서 해보세요.]
전화를 끊은 조민호는 사무실에 모여 있는 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얼마면 됩니까?”
그도 조민호가 당장 큰돈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듣자 일단 자기 사정을 말해주었다.
“네? 투자금을 말하는 거라면, 일단 급한 대로 30억만 있으면 제가 드라마 제작사 사장님을 협의해서 기존 투자금을 상환하면.....”
“제가 개인적으로 50억 내죠. 나머지 자잘한 것은 알아서 교통 정리해주세요. 다른 투자사 자금을 빼고 싶다면 다 빼세요. 부족한 돈은 제가 추가로 더 송금하죠.”
“......농담이시죠?”
“우리 큰아버지가 조수현 회장이란 거 이미 들었지 않습니까. 설마 조수현 회장님이 그 정도 돈을 못 굴리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저, 정말 그 돈이 가능합니까?”
“계좌나 불러 주세요. 오늘 즉시 계좌에 돈을 쏴줄 테니까.”
“......”
윤석민 PD도 경악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사람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재벌 3세라고 해도 당장 이 자리에서 50억 투자를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드라마 국장님도 문제......”
조민호는 다시 손을 들어서 그의 입을 막은 후에 양주민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KBC 국장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다.
[제가 바로 손을 쓰겠습니다.]
[협박은 곤란합니다. 말 나오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해주십시오.]
[하하하, 그런 일은 없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살아있는 권력과의 전쟁에서 조금씩 밀려서 최근 강기창 경감 게이트와 무영 그룹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 때문에 양주민 검찰총장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저자세였다.
조민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해주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시간이 걸려도 문제가 없는 것을 원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 통화를 끊으면서 의아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의혹이 가득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피식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몇 시간 후면 반응이 올 테니까.”
아니 굳이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는데, 조민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온 전화를 받은 윤석민 PD는 드라마 국장 전화를 곧 받았다가 끊었다.
“맙소사 저, 정말 해결되었습니다. 국장님은 일단 오케이 했습니다!”
“더 문제는 없죠?”
“아, 당장 급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힐끗 여전히 경악해 있는 배효진을 착잡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스텝 설득은 어떻게 해서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력 해결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럽 풍경을 잘 이용해서 그녀 연기력을 보완한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보통 여배우 연기력 정도만 되어도 최소 중박은 칠 텐데......’
조민호도 금방 문제를 알아챘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해결해 드리죠. 그러면 나머지 문제는 더 없는 겁니까?”
“......어떻게 해결하신다는지 잘 모르겠지만 더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까요?”
“본인 각오에 달려 있겠죠.”
배효진은 따가운 두 사람 시선에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조민호 생각은 좀 달랐는데, 치료만 잘 끝나고 나면 그녀의 연기력은 오히려 물이 오른 것이라 확신했다.
***
미래 증권이 주로 하는 투자는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다.
최근 중국이나 미국 부동산 투자를 검토하면서 중국을 시작으로 투자를 늘릴 계획이다.
실제로 상하이 빌딩 투자 대박이 터지면서 펀드 자금은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쉬쉬하다가 결국 소문이 난 것이 바로 오성 바이오 투자다. 이 당시만 해도 괜찮은 투자였고, 오히려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라서 사내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지분 10%를 1,450억을 매각했다는 말에 한동안 말이 많았는데, 대부분 직원은 왜 저 가격에 매각했는지 의문을 토했다.
그런데 오성 바이오 1차 임상 시험 부작용 사태가 터진 후에 불만은 쑥 들어갔다. 오히려 나머지 10% 지분도 매각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었다.
이 신의 한 수는 미래 증권에서도 한동안 논란거리가 되었다.
미래 증권 해외 투자 1팀 박희관 부장 역시 이 회사 일에 의문을 토하면서 조간신문 한구석에서 짧은 뉴스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오성 바이오 1상 임상 시험 부작용을 극복하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