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물리학과 건물 바로 앞에서 주차해 있던 검은색 차량 문이 열리면서 후다닥 내린 강종훈 대표가 강의 건물에서 나오는 조민호를 불렀다.
-민호씨!
박진민과 김영탁 역시 가볍게 인사를 하다가 차 안에서 살짝 얼굴을 내미는 배효진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특히 김영탁은 경악한 채 후다닥 배효진에게 달려가서 사인을 부탁했다.
배효진은 밝은 미소를 한 채 서명을 해주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더 배효진을 좋아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비록 연기력 때문에 욕을 많이 듣지만 어지간한 톱 연예인을 압살하는 미모 때문이다.
그림같은 배효진 얼굴에 두 사람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주변을 오가던 다른 물리학과 대학생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민호는 갑자기 시끄러운 주변 분위기에 두 사람을 슬쩍 피해서 차량 반대문을 열고 차 안에 슬그머니 탑승했다.
박진민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 미, 민호야, 너 거기서 뭐 해?”
“갑시다.”
조민호는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차량을 바로 출발시켰다.
강종훈 대표도 무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배효진 매니저에게 지시 내렸다.
배효진이 탄 차량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두 사람은 발을 동동 굴리면서 매정한 조민호 욕을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야아, 세상에 배효진이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지금 김지수는 얼굴이나 몸매만 놓고 비교하면 배효진보다 반 수 위이기는 하지만 원판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배효진보다 못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느낌이 전혀 다르다.
김지수는 알게 모르게 재벌 2세라는 특유의 느낌이 여전하지만, 배효진은 이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청순미가 더 압도적이다.
“당근이지, 화장은 거의 안 한 것 같은데도 진짜 예쁘다!”
김영탁은 사인을 품에 앉은 채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가 곧 불만을 토로했다.
“도대체 민호 이 인간은 어떻게 단 한마디 설명도 안 해주냐?!”
***
배효진이 논스톱 5로 브라운관에 처음 데뷔한 후에도 말이 많았다.
특유의 이미지 자체가 워낙에 넘사벽이라서 고정 멤버로 합류했지만 워낙에 마네킹 이미지가 강해서 존재감이 없었다.
실제로 논스톱 멤버들은 전부 다 배효진을 병풍처럼 취급했다.
어떻게 연기를 하면 할수록 너 퇴보해서 말이 무성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지 차량 안에서도 대본을 붙잡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매니저 이윤기는 그런 배효진을 안쓰럽게 쳐다보면서 힐끗 강종훈 대표 눈치를 봤다. 도대체 왜 저 조민호란 인간을 임시라고 해도 로드 매니저로 받아들인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종훈 대표는 이윤기 눈치를 삭 무시한 채 조민호에게 오늘 유명환 과장이 직접 촬영장에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만 하고 나서는 차량에서 내려버렸다.
이윤기 매니저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조민호에게 힐끗 쳐다보았다.
“전 효진이 매니저 이윤기입니다.”
“조민호입니다.”
“저희 사장님이랑 잘 아는 가 봐요?”
“잘 몰라요.”
간단명료한 대답에 이윤기는 힐끗 건방진 조민호를 쳐다보면서 입을 살짝 깨물었다. 무례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비록 조수현 회장 조카라는 이야기를 사전에 들었지만, 화가 났다.
‘개놈의 새끼, 재벌 3세라고 나대는 건가?’
이윤기의 차가운 눈빛에도 신경 쓰지 않던 조민호는 오히려 대본을 붙잡고 죽으라고 연습하는 배효진을 쳐다보았다.
연기를 잘 모르는 조민호조차 투박한 말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배효진이 부단하게 연기 연습하는 모습을 통해서 서문소혜가 끊임없이 검술 연마에 노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단순히 연기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언어 장애란 것을 모르나 보군. 그렇지만......’
배효진 경우에 발달장애로 말미암은 언어 장애이기는 하지만 그게 두드러진 것은 아니어서 일상적인 생활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연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감정을 이입해서 캐릭터 흉내 내는데, 일정한 한계 자체를 극복하지 못했다.
조민호는 딱히 배효진이 예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서문소혜를 판박이처럼 닮은 그녀 외모를 보자 자연스럽게 지난 감정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억누르면 누를수록 그 지난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감정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돌리려고 하다가 문득 배효진 선천지기 흐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진짜 놀라운데?’
반복적인 연습 덕분에 장애 일부가 해소되는 현상이 가끔 나타났다. 탁월한 잠재 선천지기가 영향을 준 것이었다.
무학 수련은 전혀 하지도 않은 일반인이 보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처음 보는 이 현상에 조민호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이윤기 시선에 피식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솔직히 태어나서 오디션 현장을 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궁금했다.
***
드라마 피아노 협주곡을 준비 중인 윤석민 PD는 예상치 못한 조유리와의 일방적인 계약 변경 문제 때문에 분노를 터트렸다.
최근 제안받은 다른 영화 때문에 출연료라는 뻔한 명분을 만들어서 계약을 깨트렸다.
‘나쁜 년.’
한물갔다는 소리 때문에 무시당한 것이다.
문제는 사건 해결인데, 구멍 난 배역을 구하기만 하면 된다.
결국 이쪽저쪽에 다급하게 손을 내밀어 봤지만, 드라마 일정이 맞는 여배우는 없었다. 그나마 일정이 비어 있는 이는 주인공 이미지와 맞지가 않았다.
일단 여주 특성을 잘 나타내는 몇 사람을 찍었다. 특히 배효진은 오히려 조유리 보다 훨씬 더 여주인공과 잘 맞았다.
‘차라리 잘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드라마 제작 투자사 중에 한 사람이 배효진을 오디션에서 무조건 아웃시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개새끼들.’
윤석민 PD도 뒤늦게 누군가 배효진에게 압력 넣는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결국 대안으로 부랴부랴 공개 오디션을 열었다.
이번 오디션 시작은 자유연기와 임시로 배부한 대본을 들고 한 사람씩 나와서 연기한다.
이번 드라마가 ‘봄 동화’, ‘가을 연가’로 이름 놓은 자기 명성 때문인지 오디션에 참여한 숫자가 생각보다는 많았다.
이미 1차에서 80% 가까이가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 숫자가 백여 명을 넘었다.
이번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높은지 잘 보여주었다.
윤석민 PD는 심란한 마음에 힐끗 배효진이 왔나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막 오디션 준비실에 들어가는 그녀를 발견했다.
착잡한 마음에 잠깐 그녀를 보다가 동행한 한 남자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키는 고작 176cm 정도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주변을 꽉 제압하는 그 강력한 카리스마에 손가락으로 사각형 형태 창을 만들어서 간이 카메라 테스트한 후에 깜짝 놀랐다.
‘물건이다!’
그 기묘한 카리스마는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을 완전히 제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텝 한 명에게 달려가서 모바일 카메라를 가져와서 상대 몰래 영상에 직접 담아서 확인했다.
카메라 앵글을 가득 채우는 그 폭풍 카리스마를 본 윤석민 PD는 난다긴다하는 수많은 스타를 압살한다고 확신했다.
이제는 배효진 따위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운 채 후다닥 달려가서 가지 명함을 내밀면서 간단한 소개를 했다.
“혹시 이번 드라마 오디션 참석자입니까?”
“아뇨.”
“그러면 오디션에 참석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네.”
“......혹시 제 말을 못 믿을지 모르겠지만 제 경력은 봄 동화, 가을 연가로 시작되는데, 나름 이 바닥에서 그 경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번 드라마 오디션 최종 결정권자이기도 합니다. 오디션 참석만 한다면 대우는 중견 배우 이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상대는 명함을 힐끗 확인하고는 썰렁한 어조로 툴툴거렸다.
“전 배우 아닙니다만?”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아는 전문 기획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연기는 전혀 경험이 없어도 그쪽에서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그냥 기획사 통해서 저희랑 계약하고, 드라마에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연기란 것은 태어나서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좋습니다. 흰색 도화지 아닙니까. 제가 명작을 그릴 수 있도록 붓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림 그리고 싶은 생각 없네요.”
냉랭한 어조로 일갈한 조민호는 터벅터벅 걸어서 오디션 대기실 안에서 기다리는 백여 명의 오디션 후보자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한쪽에 놓인 의자에 풀썩 앉았다.
“......”
배효진은 입을 딱 벌린 채 윤석민 PD가 한 일방적인 러브콜을 한마디로 거절한 조민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무리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지만, 톱 탤런트도 앞에서는 윤석민 PD에게는 저러지 못했다.
이곳에 모인 백여 명의 오디션 후보는 이 오디션 통과를 위해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단역부터 시작해서 십 년을 노력해왔다.
가까스로 1차 오디션을 통과하고, 이번에는 죽을 각오로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누구는 윤석민 PD가 직접 가서 애걸복걸까지 하면서 부탁했다.
일방적인 거절에 충격받은 윤석민 PD는 다과로 내놓은 사과를 와삭와삭 씹어 먹는 조민호 앞에 가서 다시 부탁했다.
“일단 이번 오디션 카메라 테스트를 한 번만 해보면 어떨까요? 꼭 드라마 출연이 아니어도 경험상 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싫네요.”
사과 하나는 단숨에 먹어치운 조민호는 이번에 수박 조각 하나를 한 입에 꿀꺽 삼켰다.
“정말 안 될까요?”
조민호도 문득 거절하려다가 힐끗 배효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다시 주변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유명환 과장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가만 이번 오디션도 놈이 방해했다면 결국 배효진은 무조건 불합격이잖아. 그건 곤란하군. 놈을 좀 더 자극할수록 틈이 더 보일 텐데, 어떻게 한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한 가진 조건을 들어준다면 드라마 출연도 아니고, 고작 오디션 정도쯤은 봐줄 수 있습니다.”
“조건이라 하시면......”
“제가 효진씨 로드 매니저인데, 효진씨가 이번 드라마에 나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깜짝 놀란 윤석민 PD는 뒤늦게야 배효진과 조민호가 일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부 압력이 당장 머리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어차피 배효진을 아웃시키면 조민호도 자기 제안을 계속 거부할 것이다.
카메라 테스트를 수락한다면 과연 자기 안목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니 꼭 조민호 카메라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배효진은 그다음이다.
‘꼭 조연이 아니라고 해도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끌 만한 재능이야.’
“좋습니다.”
“흠.”
‘하도 강종훈 대표가 연기 재능이 대단하다고 해서 그냥 해본 말인데, 정말 들어줄지는 몰랐네. 난 연기 자체를 전혀 해본 적이 없어서 문제가 있을 텐데, 뭐 내 알 바는 아니잖아.’
***
“정말 열심히 노력하셨습니다.”
“조금 전의 그 분노한 연기는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단역 배우 활동도 열심히 하셨고, 감성 연기가 풍부한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의례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오디션 지원자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이런 오디션을 특히 많이 경험해본 이라면 저게 곧 이번 오디션 탈락입니다란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배효진은 그나마 최선을 다한 연기를 보였지만 오디션 지원자 중에서 압도적인 미모에도 불과하고, 투박한 어투가 너무 드러났다.
“논스톱 5 잘 보고 있습니다.”
“감정 연기 깊이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번 오디션 심사관은 다소 실망스러운 얼굴로 힐끗 윤석민 PD 안색을 살폈는데, 도저히 캐스팅에 찬성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고했습니다.”
윤석민 PD 역시 다른 심사관 압박을 모른 척 시선을 피했지만, 한숨을 내쉬웠다.
외부 압력도 문제지만 그 못지않게 저 발열기도 심각했다. 자칫하면 배효진 때문에 드라마가 망해버릴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하늘이 안 도와주는구나.’
손을 들어서 막 드라마 작가 이소영의 의견을 막았다.
“아직 한 사람 더 있습니다.”
“?”
다들 오디션 지원서가 더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임의로 일단 오디션 시험에 올렸습니다. 그러니 보고 나서 말하죠. 카메라 테스트 결과를 특히 주시해주세요.”
이번에 오디션 무대에 올라온 것은 무덤덤한 조민호였다.
놀랍게도 단순히 걸어서 무대에 올라가는 것만으로 주변 분위기를 장악했다.
심사관은 숨조차 죽인 채 조민호 워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