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이학준 비서실장도 당혹스럽기는 매 한 가지였고, 그는 결국 김건중 회장 양해를 구한 후에 보고를 올린 홍석우 이사에게 연락했다.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는 그는 다시 최진석 부장을 거쳐서 민경기 과장에게 전화했다.
아니 이학준 비서실장이 직접 민경기 과장에게 전화했다.
“지금 봐서는 친구들이 입사 지원할 때 같이 지원한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놈 큰아버지가 조수현 회장이라며?”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거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스포츠카 한 대는 선물 받았고, 지금 삶의 질은 일반 서민이랑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상한 놈이군. 지가 아직도 서민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김건중 회장은 재벌가로 태어나서 화려한 삶을 살아왔다. 애초에 서민 삶 따위는 이해조차 못 했다. 나름 노력한다고 해도 그 생각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가 아들에게 서민의 삶을 무시하지 말라고 주의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업 경영 효율을 올리기 위함이다.
김지수가 예외적이지만 어디까지나 막내딸 편애일 뿐이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쉽게 버릴 수는 없겠어. 지수랑 비슷한 타입인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가만 결국 우리 회사에 장난으로 입사 지원서를 냈다는 말이네.”
“그럴 겁니다.”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하거나, 아니면 취업 청탁하려는 건가. 설마 내가 알아서 자기 뒤치다꺼리까지 할 거로 생각하나?”
“그렇다고 봅니다.”
그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차라리 조민호에 대해서 몰랐다면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오성 바이오까지 걸려 있었다.
“이 실장, 정말 바스클린 임상 3상을 포함해서 상용화까지 문제없겠어?”
“아무래도 임상 3상이 문제입니다. 특히 인체에 실험하는 경우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해보지 않고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동물실험과는 다르겠지?”
“차원이 다릅니다.”
“좋아. 이대로 조민호 그놈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줘. 뭐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바는 아니지만, 괜히 쓸데없이 자극해서 엉뚱한 오해는 아예 만들지도 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수 말인데, 갑자기 헛소리하다가 오성 비서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 것이 설마 조민호 이놈 때문이야?”
“다른 부서로 돌릴까요?”
“아니 차라리 그냥 조민호 놈을 전담하는 쪽으로 돌려.”
“......괜찮을까요?”
“남녀 관계란 게 막으면 막을수록 더 뜨거워져.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나아.”
“만약 사모님이 아시면......”
“굳이 알리지는 마. 그리고 미래 그룹 조수현 회장 일족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아니 솔직히 그놈 능력을 고려하면 차고도 넘쳐.”
“네.”
***
민경기 과장은 갑자기 직접 이학준 비서실장 전화를 받자 공황에 빠졌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 가까스로 상황을 설명했다.
“......조민호와, 그 친구가 장난삼아서 지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사과하고 포기했는데, 그 조민호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따로 경고까지 해주었......”
대답은 물론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앞으로 조민호와 관련된 인사 서류는 모두 비서실에 직접 보고해.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간섭하지 말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
“네? 비, 비서실에 직접 보고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따로 오성 그룹 인사팀에도 지시가 갈 테니까, 혹시라도 기분 나쁘게 한 일이 있으면 조민호에게 직접 가서 정식으로 사과해. 괜한 분란을 일으키면 당장에 회사에서 퇴출당할 테니, 제대로 해!”
“아, 알겠습니다.”
아니 실수하면 그냥 회사에서 잘라버리겠다니.
그것도 오성 그룹의 이인자가 한 말이다.
민경기 과장은 식은땀을 주르르 흘리면서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한동안 넋을 놓았다.
최진석 부장 역시 이미 중간에 전화를 받은 터라 사정을 잘 알았다.
“민 과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도 반쯤 쇼크에 빠졌지만, 파들파들 떨고 있는 최진석 부장 모습에 혀를 찼다.
‘저 나이에 잘리면 정말 오갈 데 없어. 더욱이 블랙리스트로 찍히면 이직도 어렵고.’
심지어 홍석우 이사 역시 꽁지 불붙은 망아지처럼 나타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민경기 과장은 오히려 이성을 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을 찍어서 확인했으니, 나머지 일 처리도 확실히 하겠습니다.”
“이봐, 민 과장, 정말 문제없겠어?”
“저만 믿어주십시오.”
다행히 겨우 두 사람도 안도했지만 역시 의문 한 가지를 떨치지 못했다.
“그 친구는 대통령의 숨겨둔 아들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세 사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조민호를 특채 1차에 합격시켰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다만 민경기 과장과, 최진석 부장은 2차 실무 면접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면접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그것은 홍석우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2차 면접은 분위기 봐서는 틀림없이 합격이고, 3차가 문제잖아. 다른 사람에게도 경고를 해줘야 하나?’
***
[......조민호 귀하는 이번 오성 그룹 신입사원 특별 채용에 1차로 합격하였음을 알려 드리며, 2차 일정을 아래와 같이 통보합니다.]
조민호는 역시 종강 과목이 하나만 남겨 놓은 터라 오늘도 느긋하게 메일함을 뒤지다가 발견한 이 서류에 피식 웃었다.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서 지켜볼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사 지원을 해봤다.
결과는 생각 그 이상이었다.
‘역시 발 빠르네.’
겨울 방학을 앞둔 시점에서 앞으로 미래 진로를 고민하면서 토익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도서관을 찾은 박진민과, 김영탁이 마침 조민호를 보자 농담 삼아서 툴툴거렸다.
“뭐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설마 특채에 합격이라도 한 거야?”
“글쎄.”
그도 처음에는 두 사람을 자극할까 싶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학과 박사 1년차 선배가 이번 특별 채용 1차에 합격했다.
“지난달에 특별 전형에 서류 넣은 장연주 선배가 합격했어. 솔직하게 말 해봐.”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 합격할 기회를 뺐을 수도 있구나.”
“괜한 걱정 마라. 선배에게 알아보니, 정말 필요한 사람이면 특별 채용으로 따로 뽑으니까.”
“그런가? 그게 말인데......”
이상하게 말꼬리를 질질 끄는 조민호. 두 사람은 눈치가 빨라서인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민호 옆에 앉았다.
“너, 서, 설마 진짜 특채 1차에 합격한 거야?”
조민호도 괜히 자랑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어. 합격했다.”
“말이 안 되잖아. 비꼬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너 써넣던 채용 서류 나도 대충 봤는데, 아무런 경력도, 특별한 인턴 경력도 없었잖아. 평균 학점은 나보다도 더 낮잖아.”
그도 전생 전의 자기 학점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그러게 말이다.”
“......뭔가 잘못된 거야!”
조민호는 피식 웃으면서 실제로 이메일로 온 합격 통지서를 보여주었다.
“맙소사!”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같이 서류 넣으면 될지 모른다고.”
“하, 하지만......”
조민호가 한 말이 새삼 심장을 후벼 팠다.
-후회할 텐데?
-됐어!
“하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깊은 한숨.
조민호에게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갑갑하고, 이 빌어먹을 상황이 짜증 날 뿐이었다.
조민호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재벌 3세라고 한 것은 너희잖아. 재벌 3세 찬스가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오성 그룹이잖아. 미래 그룹이 요즘 핫하다고 해도 오성 그룹과 비교할 수는 없잖아. 아무리 조수현 회장님이 대단해도 오성 그룹에 채용 압력을 어떻게 넣어?”
“우리 큰아버지가 제법 힘 있어. 아마 최근 같이 협업하는 일 때문일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설득력이 없어.”
“......”
그리고 두 사람은 정말 조민호를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일과, 오성 그룹 특별 채용 이야기는 격이 너무 달랐다. 솔직히 무슨 대통령 아들 친구가 아니고서는 이게 말이 되지 않았다.
최근 와서 한 거짓말이라고 했던 말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가만 이학준 비서실장을 잘 안다고 했잖아. 설마 그것도 진담이었어? 아니 그게 어떻게 말이 되냐?’
조민호는 물론 다른 고민에 빠졌다.
‘과연 오성 그룹 임직원은 어느 정도 수준의 선천지기를 가졌을까?’
***
마음은 공기업이라고 하지만 정작 현실은 중소기업이라고 한다. 그만한 현실에서 오성 전자에 입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과 내에서 오성 그룹과 같은 대기업에 취업한 숫자까지 따로 관리할 정도다.
한국대 물리학과라고 해서 특별히 예외적이지는 않았다.
조민호의 특채 1차 합격은 과 내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중에 상하이 빌딩과, 오성 바이오 지분 매입 결과에 흥분한 조수현 회장이 한국대에 30억 장학금을 기부했다.
굳이 조민호 능력이 아니라고 해도 재벌 3세 소리를 듣는 순간에 언론 관심을 피하기 어렵다. 그때부터는 아주 사소한 일도 좋지 않은 소문이 되어서 터져 나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는 뜻이었다.
조민호도 뒤늦게 과내에서 따가운 주목을 받았지만, 그저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보다 빌딩 구입과 동시에 벌써 700억 수익과, 다른 한 편으로 175억 관시에 혀를 내둘렀다.
‘뇌물 규모가 장난 아니군.’
하지만 현재 상하이 미래 빌딩 가치를 감안하면 그다지 큰 비용은 아니었다.
더욱이 추가로 몇 개의 앨리엇 매물 이야기도 솔솔 나왔다.
조민호는 가끔 조수현 회장에게서 진행 상황을 들었는데, 번거롭다고 해도 조카라는 신분을 떠나서 고객에게 보고하는 것이 회사 기본 규칙이라고 들었다.
이번에 특별 채용 1차 기회를 놓친 박진민은 조민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고려대 미대와 3:3 미팅을 제안했다.
“하자.”
조민호도 과연 이런 소소한 미팅 추억에서 누구를 만날까 기대했다.
이 시기에 김지수가 마침 한국대 물리학과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조민호를 보자 다가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로서는 환자를 대하는 것이라 시큰둥했다. 환자가 의사와 같이 있다 보면 흔히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봤다.
김지수는 그런 조민호와는 좀 달랐다.
“죄송해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요.”
“괜찮습니다.”
가벼운 오피스룩을 한 그녀는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수수하면서도 묘하게 귀족적인 이미지가 잘 결합하여서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
약속 장소를 잡기 위해서 확인 전화를 돌리던 박진민과, 김영탁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몰라서 눈치만 봤다.
아니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조민호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야아, 소개 좀 해줘야지!”
“아, 이쪽은 나랑 좀 아는 김지수씨야.”
“김지수입니다.”
김지수는 꾸벅 허리를 숙였고, 두 사람 역시 어어 하면서 인사했다.
“혹시 두 사람이 서로 사귀는 사이?”
그녀는 의외로 얼굴을 붉히면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조민호가 일축했다.
“아냐. 그냥 일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낼 뿐이다.”
박진민은 이제까지 여자 친구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은 조민호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