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그녀는 길쭉한 팔을 쭉 뻗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을 접시에 담아서 아삭아삭 씹었다.
미술품 구매 때문에 홍콩에 가 있다가 가장 늦게 나타난 김건중 처 최태희도 깜짝 놀랐다.
“너......진짜 내 딸 지수 맞아?”
“왜들 그래?”
그녀는 히죽 웃으면서 자기 자랑을 끝내고 난 후에 최근 자기 변화를 가족에게 각인시켰다. 이제는 더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자 후다닥 밥을 먹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남아 있던 가족은 영문을 몰라서 막내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김건중 회장은 이미 저 일이 조민호 솜씨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한 터라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마.”
“여보, 잠깐만, 지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재 성장기 지난 지가 언제인데, 키가 저렇게 커요. 그리고 저 피부는 또 뭐죠?”
김건중 회장도 조민호와 관련된 엄청난 양의 사연을 떠올리면서 짜증 냈다.
“직접 가서 물어봐!”
“?”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김건중 등을 쳐다보기만 했다.
***
오재호 박사는 막 점심을 먹을 때쯤에 이학준 비서실장 호출을 받고 김지수 최근 진료기록부까지 챙겨서 나타났다.
그 역시 김건중 회장이 곧바로 김지수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나서도 선뜻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추론을 늘어놓았다.
“그게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유전적 저 신장 경우에 체질적으로 성장 지연일이 일어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주로 성장 호르몬 결핍증이나 염색체 이상 같은 경우입니다.”
“지수가 설마 그런 질병도 있었어?”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추론을 하자면......”
“내가 박사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야. 단지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해.”
“.....으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아가씨의 심방세동 자체가 부정맥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신진대사 여러 곳에 영향을 줍니다.”
“그 병이 완치된 후에 성장 호르몬 분비도 정상으로 돌아갔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부 표피는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입니다. 단순하게 부정맥 현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그는 힐끗 서재로 나타난 김지수를 보면서 입을 딱 벌렸다.
치료가 끝난 후에 정밀 검사는 이미 몇 달 전에 끝났다. 그 이후에 다시 보게 된 김지수는 자신이 아는 그 김지수와는 전혀 달랐다.
김지수는 실험실 몰모트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에 버럭 소리쳤다.
“아빠, 자꾸 이러면 나 화낼 거에요!”
“녀석아, 내가 뭐라고 했냐. 여기 박사님이 잠깐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런 것뿐이다.”
“박사님, 이제 됐죠?”
“아, 네.”
오재호 박사는 안 그래도 원인 불명 환자 작업이 진도를 나가지 않는데, 얼마 전에는 특이한 상태 환자 네 명이 나타나서 머리가 아팠다.
다행이라면 오성 의료원 전문가들은 바보가 아닌 터라 한 가지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았다.
원인 불명 환자 치료와 역으로 그 과정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 일 때문에 이번 일에 참여한 의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두 가지 변화는 환자 치료 방법에도 큰 혁신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미 수십 차례 확인해서 자료가 넘쳐나는 환자를 굳이 다시 살필 이유는 없었다.
“으음.”
“오 박사.”
“아, 회장님,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됐고. 재 왜 저렇게 된 건지 확인할 수 있겠어?”
“그게......지금 당장은 답변할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아무리 봐도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김건중 회장도 뒤늦게 혀를 찼다.
“알겠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가씨도 시간만 주면......”
“됐어. 정밀 검사는 이제 그만 해. 가봐.”
“회장님, 이 일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저 원인을 파악하면 혁신적인 신약 개발도 가능합니다. 제가 비록 아가씨 일을 간과했지만......”
“나가!”
“......네.”
오재호 박사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서재를 나가고 말았다.
김건중 회장도 굳은 안색을 한 채 이학준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자네도 대충 감이 와?”
“오 박사가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심방세동 완치 때문일 겁니다. 특히 치료할 때 그 효과가 남아서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유전병이 치료되면서 이제까지 지연된 성장이 다시 시작되었고, 피부 재생 역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봐야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도 합리적인 추론에 따른 의견만 늘어놓고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네 사람과 비교하면 손을 쓰기에 따라서 살인도 가능하고, 사람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군. 그야말로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명왕이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확인해보겠습니다.”
“후유, 지수 저 녀석 자존심 건드리지 말고, 가능하면 남의 시선을 끌지 마. 필요하다면 비서실에서 믿을만한 놈들을 골라서 확인해 봐. 유전자 분석인지, 염색체 분석인지도 최대한 속도를 올려.”
“네.”
김건중 회장도 지시를 내려놓고서는 막내 김지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욕망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
요즘 조민호는 주변 일이 워낙에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나름 고민하는 척했지만 사실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허겁지겁 조민호 오피스텔을 직접 찾아온 조수현 삼촌에게서 유엔둥에서 연락 왔다는 말을 들었다.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중국에 못 간다고 그러세요.”
조수현도 크게 당황했다.
“야, 너 유엔둥이 어떤 사람인지나 알아?!”
이미 한 번 퇴짜를 맞은 조민호는 오히려 느긋했다.
“제가 알게 뭡니까. 좋은 말로 치료해준다고 했을 때는 싫다고 한 사람일 뿐입니다. 정 그쪽에서 원하면 한국으로 오라고 하세요.”
“민호야, 그러지 좀 말자.”
“저 바빠요.”
“도대체 뭐 한다고 시간이 없다는 거야?”
“기말고사 준비해야 합니다.”
그 침착한 조수현 회장도 머리에 꼭지가 돌았다.
“......민호 너 이 새끼.....,아 미안하다. 널 욕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흠흠.”
“이건 고집 피울 일이 아냐. 내 뜻대로 치료받겠다고 하잖아. 그러니 가서 멋지게 손녀 치료하자. 중국에 투자하는 돈은 다 네 돈이야. 그거 수배로 뻥튀기되는데, 이러지 좀 말자.”
“전 돈에 관심 없습니다.”
“그래도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다.”
조민호는 히죽 웃었다.
“저랑 큰아버지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자기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맙시다.”
“......이 빌어먹을......, 크흠, 미, 미안하다. 다시 말하자면 민호 너에게 내가 악감정이 있는 게 아냐. 상대는 막말로 한국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야. 그런 사람을 오라가라하면 되겠냐?”
“저도 귀한 집 아들입니다.”
조수현도 몇 번이나 설득을 해보았지만 먹히지 않자 결국 포기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에 중국 측에 다시 연락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지 김재상 비서실장도 창백한 안색을 한 채 직접 나타났다.
“그쪽에서 방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치료할 수 있습니까?”
조수현 회장은 힐끗 조민호를 쳐다보았다.
조민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콜라를 쪼르르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김재상 비서실장은 조수현 회장 귀에 속삭였다.
“치료 못 하면 앞으로 저희 중국 투자는 영원히 접어야 합니다.”
“하아.”
***
김건중 회장도 김지수 변화를 보고 나서는 일단 조민호를 향한 다른 시도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나서 일단 지켜봤다.
아니 그는 오히려 지금까지 오성 의료원에서 조사한 것과 염기 서열 분석 연구에 대폭 투자해서 그 규모를 늘렸다.
심지어 자본금 천억으로 오성 바이오를 설립해서 뛰어난 전문 인력 사냥에 나섰다. 국내뿐만 아니라 특히 해외 인력도 포함했다.
이들 중에는 뜻밖에 미국의 유명인 염기 서열 분석 일을 해본 이도 있었다.
‘스티븐이라. 나만 이런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집착.
김건중 회장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유명한 권력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중에 그가 발견한 것은 역시 중국 권력의 이동이다.
상하이방의 맹장이라고 알려진 천량위가 결국 상하이시 당서기에서 간수성당서기로 좌천된 것이다.
이 상하이 당서기 자리를 먹은 것은 뜻밖에도 유엔둥이었다.
오성 비서실에서 이미 예상한 범주 내라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유엔둥 당서기가 갑자기 한국행을 결정했다.
이것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학준 비서실장은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서 김건중 회장에게 유엔둥 당서기와 약속을 잡았다.
문제는 그 약속 장소가 인천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성 계열사 호텔이었고, 사전에 혐의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잡았다.
류엔둥 역시 김건중 회장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만, 썩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김 회장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왜 보자고 한 것입니까?”
김건중 회장도 통역사를 통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상하이 당서기 임명된 것을 축하하려고 왔습니다.”
“전화로 해도 될 일인데, 굳이 이렇게 수행원을 데리고 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류엔둥은 이상할 정도로 냉랭했다.
나름 한국에서 최고 기업 수장인 김건중 회장도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신 역시 너무 성급하게 이 자리를 마련한 점을 고려했다.
“우리 오성 그룹은 중국 상하이 투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급한 제가 이렇게 먼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담당자 통해서 협상하면 됩니다.”
이상할 정도로 대화가 잘되지 않았다.
이학중 비서실장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매 한 가지였는데, 다행이라면 눈치껏 다른 수행원에게 접근해서 내막을 알아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손녀 치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왔다니.’
그랬다.
류엔둥이 갑자기 한국행을 온 것은 미래 증권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전과는 달리 조민호가 중국에 직접 가서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고 고집 피웠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미 내정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중국 언론을 통해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나름 노심초사한 류엔둥이다.
그녀도 이제 확실히 상하이 서기 내정 확정되자 손녀 리핑 질병에 집중했다.
리핑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져서 허벅지에 붉은 출혈성 반점으로 덮여 버렸다. 이제는 코르티코스테로이드를 처방해도 먹히지 않았다.
면역 억제제 사이클로포스파마이드 사용하자 혈뇨가 나왔다.
다양한 약을 사용하면 오히려 거기에 대응되는 부작용만 더 늘어났다.
이제 고작 10살 소녀가 자기 다리 한쪽이 완전히 붉은 반점 생긴 것에 몸서리를 쳤다.
류엔둥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할 시점이었고, 그나마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조민호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
김건중 회장조차 내막을 듣고 나서 류엔둥이 왜 자신에게 저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깨닫고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류엔둥 역시 자책했다.
“회장님, 제가 요즘 정상이 아닙니다. 이번 결례는 추후 다시 어떤 형태로든지 갚겠습니다.”
“아닙니다.”
김건중 회장도 가족 유전병 때문에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조용히 그녀 일행을 보내주었다. 아니 한 가지 조치를 남겼다.
“이 실장, 모든 언론에 전화해서 가능하면 류엔둥 방한 내용을 보도하지 말라고 해. 괜한 짓을 하는 놈이 있으면 앞으로 오성 그룹과 관련 계열사 광고는 모두 뺀다고 협박해.”
“알겠습니다.”
그도 설마 요즘 중국에서 뜨겁게 떠오르는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 실세 류엔둥이 저렇게 조민호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의도적으로 저렇게 만든 걸까. 하긴 지수를 치료할 때와 지금 조민호의 처지는 다르잖아. 지금부터는 아쉬운 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