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중아일보 내에도 오성 그룹 출신 경영진이 생각보다 많았다.
최석준 회장도 늘 이 문제만큼은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고, 어떻게 해서라도 오성 그룹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최영준 차장도 암묵적으로 오성 X파일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행동한 이유였고, 그 부분까지 김건중 회장 귀에 흘러들어 갔을까 염려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널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아, 아닙니다.”
“허 참.”
김건중 회장은 의아한 눈으로 뒤에서 공갈이라도 했냐는 듯이 이학준 비서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학준 비서실장이라고 해서 최영준 움직임까지 확인할 이유가 없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여기 온 것은 최영준 때문이 아니라, 조민호가 그 목표였다.
“이번에 지분도 받았다고?”
“그렇습니다.”
“흐음.”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 격이 맞지 않으니, 대화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사실 이 자리에 최석준 회장이 있다면 그나마 대화가 이루어지겠지만, 그것도 격의 없는 수준은 또한 아니었다.
김건중 회장도 그제야 정색했다.
“좋다. 내가 널 보자고 한 것은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서다.”
“말씀하십시오.”
“조민호 그 친구 말이다.”
최영준도 움찔 놀랐지만, 곧 이성을 차렸다.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것은 이미 사전에 다 염두에 뒀다.
그는 특히 김건중 회장이 자신을 찾게 되면 거절하기 힘들다는 것 정도도 생각했고, 미리 할 말도 이미 준비했다.
“제 처가 원래 혼수상태로.......”
마치 원고를 읽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
누가 봐도 알 수 있을만한 내용 위주.
특히 오성 그룹에서도 조사했다면 뻔히 드러난 내용을 위주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김건중 회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만.”
“네?”
그도 깊은 눈빛으로 최영준 차장을 쳐다보았다.
“날 바보로 생각 하냐?”
최영준 차장은 결국 긴장 때문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전혀 아닙니다!”
“그래?”
김건중 회장은 가소로운 표정으로 최영준 차장을 째려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이학준 비서실장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는 가죽 가방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서 최영준 차장에게 내밀었다.
“?”
최영준 차장도 예상 못 한 일에 눈치를 보면서 서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중아 홀딩스 지분 5%. 그것도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지분이었다.
사실 그도 이미 10%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권리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이 5% 지분은 그와는 반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비록 대주주 지분까지는 아니어도 회사 경영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지분이 바로 오성 그룹에서 가지고 있는 주식 명의신탁계약서에 묶여 있는 지분 중에 일부였다.
“설마 저를 오성 그룹에서 밀어주겠다는 말입니까?”
“물론 공짜는 아니다.”
“으음.”
최영준 차장 눈빛도 심하게 흔들렸지만 금방 그 서류를 다시 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네 지분 가지고는 중아 그룹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 못 해. 하지만 이 지분이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내가 장담하지만, 최 회장은 오히려 더 좋아할 거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지분이 오성 그룹 영향력을 줄여줄 수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부담스럽습니다.”
“호오.”
김건중 회장도 신기한 동물 보듯이 최영준 차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그 서류를 내밀었다.
“바로 결정 안 해도 된다. 정 불편하면 최 회장과 상의해도 좋다.”
실로 거부하기 힘든 호의였다. 최석준 회장이 오랫동안 그렇게 돌려받고 싶은 지분 중의 하나가 저것이기 때문이다.
최영준 차장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하하하. 좋구나. 대답은 천천히 해라. 정 싫으면 다른 사람 줘도 좋다.”
김건중 회장은 오랜만에 마음에 든 인재를 봤다는 듯이 크게 웃으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호원 부축을 받으면서 나갔다.
이학준 비서실장이 그제야 남아 있는 술을 홀짝이면서 편하게 말했다.
“알지 않는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실망이군.”
최영준 차장도 찔리는 것이 많아서 움찔 몸을 떨었다.
“나도 자네가 이 일에 어디까지 관여된 것까지는 확인 못 했어. 하지만 정황만 놓고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 아 그렇다고 겁먹지 마. 굳이 다른 생각은 없으니까.”
말을 빙빙 돌려서 추상적으로 한 말이지만 간단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오성 그룹은 중아 홀딩스를 이용한 여론몰이 목적이었다. 문제가 터진 것은 역시 공정위가 두 회사의 부당지원 혐의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후부터다.
중아 홀딩스 지분 대다수는 최석준 회장이 가졌지만, 의결권은 오성 그룹에 있었다.
이 내용은 주식 명의신탁계약서를 통해서 비밀리 진행된 일이었고, 최석준 회장 역시 외부에 알리기는 어려웠다.
최영준 차장은 알게 모르게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라 더 조심했다.
가끔 언론을 통해서 카더라 뉴스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김건중 회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최영준 차장은 길바닥으로 쫓아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빌어먹을.’
하지만 현재 김지수 마음을 어느 정도 읽고 있는 이학준 비서실장은 계속 최영준 차장을 압박할 생각은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설마 회장님이 같은 집안끼리 칼부림을 하겠나.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서 이것저것 신경을 쓸 뿐이야. 혹시 두선 건설은 왜 조사한 건가?”
“그걸 어떻게......”
그도 화들짝 놀랐다.
“자금 조사를 할 거면 국세청 눈까지 잘 피하게. 뻔히 흔적을 다 보이면 알 수밖에 없잖아.”
그렇게 조심했는데.
그도 잠깐 망설였지만, 굳이 두선 건설은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회사 비자금 건을 취재하는 중이었습니다.”
“단순히 취재라고?”
“그렇습니다. 딱히 오성 그룹과도 특별히 관련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 그 두선 건설 비자금이 국외로 나가는 채널이 버진 아일랜드이고, 우리 쪽에서도 간간이 이용해.”
쉽게 말해서 두선 비자금을 조사하다 보면 오성 비자금 채널도 드러난다. 지금은 이미 다 그 채널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금시초문입니다.”
뜻밖의 일 같아도 알고 보면 간단한데, 두선 건설에서 오성 그룹이 버진 아일랜드를 창구로 만드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김정환 검사가 그래서 오성 비자금을 추적하다가 자연스럽게 두선 건설 비자금을 발견했다. 물론 오성 그룹은 김정환 검사가 조사하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후에 계좌를 폐쇄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리 쪽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경고라면 경고니까.”
“정말입니다. 제가 설마 오성 그룹 자금 흐름을 왜 추적합니까.”
“그렇게 알겠네. 다만 앞으로는 조심 좀 하라는 거네. 이 지분은 그 선물이고. 그리고 이 선물은 그냥 선물이 아니라, 자네가 무조건 받아야 해.”
지분에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의미였다.
“......”
결국, 조용히 일어나는 이학준 비서실장 등을 멍하니 보던 최영준 차장은 앞에 놓인 지분 서류를 보면서 이를 악물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대놓고 압박할지는 몰랐다.
‘이게 아닌데......’
***
최영준 차장은 김건중 회장이 준 지분 때문에 한동안 갈등했었는데, 사람이라서 아주 욕망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이 의결권 지분 5%는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회사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을 조금씩 느꼈다.
그 자신을 중심으로 사내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회사 경영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김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아, 주 전무님, 안녕하세요.”
주익성 전무는 오성 전자 출신으로 중아일보 내에서도 꽤 큰 힘을 가진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 밑에도 뛰어난 인재를 대거 거느렸다.
중아일보 내의 영향력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최영준 차장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최석준 회장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가 주익성 전무였다.
최영준 차장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안색을 굳혔다.
“소식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아버지 앞에서도 허리를 숙이지 않던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악수를 청해왔다.
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악수하기는 했지만 당황했다.
“아,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하하하, 언제 한 번 술이나 하죠. 제가 소개해줄 분도 있습니다.”
“네.”
주익성 전무 뒤를 따르는 이들은 전부 다 최영준 차장에게 고개를 숙인 채 줄줄이 떠나갔다.
회사 복도를 오가던 직원들도 그 광경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사 실세 중의 실세라는 주익성 전무가 저런 행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보통은 가볍게 조카를 대하듯이 덕담을 해주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김원준 과장이 양봉석 대리와 휴게실에서 담배 한 대 빨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가서 넙죽 인사했다.
“차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저 자존심 높은 양반이 어떻게 최 차장님에게 저렇게 저 자세입니까?”
“나도 몰라.”
“에이, 또 이러신다. 회사 내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러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마!”
버럭 화를 내는 최영준 차장.
두 사람은 자라목이 되어서 눈치만 봤다.
최영준 차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당장 민호군을 만나서 상의해봐야겠어.’
***
최영준 차장은 곧바로 회사를 나오면서 김건중 회장을 만나서 한 이야기와 바뀐 회사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영준 오빠!”
막 차를 몰고 떠나려는 상황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수? 아니 네가 어떡해?”
김지수는 배시시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에 전화했죠. 저 이래 봬도 중아일보 주주라고요.”
그녀가 중아일보 지분이 낮기는 하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구나.”
그도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자기 아버지 누나 남편이 김건중 회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툴툴거렸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이야기하자.”
“혹시 민호씨 보러 가는 거에요?”
“......아니.”
“에이, 영준 오빠 얼굴에 다 나와요. 어디 거짓말하고 그래요.”
“그렇다고 해도 너랑 관계없어.”
“아뇨. 관계있어요. 아직 못 느끼겠어요?”
“뭐......어?”
크롭티와 얇은 바지를 입은 채 서 있는 그녀 모습은 분위기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늘씬한 몸매를 잘 보여주었다.
대충 묶은 긴 머리는 바람에 휘날렸는데, 길게 뻗은 팔다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팔등신에 가까웠다.
“......너....지수 맞아?!”
“이상하죠? 키도 컸어요. 손발도 더 길어진 것 같아요. 제가 오죽하면 요즘 집에 안 들어가고 미국 간다는 핑계 대고 호텔에 있겠어요? 아빠도 엄마도 저 보면 충격받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