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그는 김정환 검사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저렇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처음 봤다. 더욱이 정현정은 중견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답게 개인적인 일을 내색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박진민 역시 입을 딱 벌린 채 묘한 그들 분위기를 살폈다.
김정환 검사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정현정 역시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알아서 말을 조심했다.
아니 말을 한다고 해봐야 자신조차 치료 방식을 믿지 않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끄응.”
조영돈 부장검사만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지만, 검사 본능이 깨어나자 곧 이상한 점을 한둘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면 저 친구가 폐암을 치료했다는 말이야? 아니 그러면 수술받은 것은 또 뭐야?’
의심의 구름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김정환 검사는 오히려 그 모습에 만족했고, 힐끗 조민호에게 다시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뭐 환자가 많아지고, 그쪽 라인이 더 생긴다면 나쁜 일은 아니니까.’란 말은 옆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두 사람 때문이 아니라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잠깐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자, 그러면 일어나시죠.”
네 사람은 다양한 표정을 한 채 곧 카페를 떠났다.
남은 두 사람은 조민호를 쥐 잡듯이 매달렸다.
하지만 조민호는 일축했다.
“그냥 아는 지인이라니까.”
서울 중앙지검 검사와 가족이 집적 와서 고개를 숙이는 일이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라니.
“야!”
“좀 믿어라.”
“이 새끼가 정말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지금 질문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아니 중앙지검 부장검사란 양반이 검찰총장에게 인사하듯이 너 보러 왔는데, 그게 고작 아는 지인이라고?!”
“응.”
“야!!”
조민호는 ‘왜 사느냐!’란 질문을 눈빛으로 하면서 그저 웃기만 했다.
***
김정환 검사의 부활은 자연스럽게 검찰청 내부 지인을 통해서 알려졌고, 그것은 곧 입소문을 통해서 다른 이해 관계자에게 전해졌다.
오성 그룹도 과거 김정환 검사와 인연이 있는 터라 이 난리를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사보다는 현재 문제를 이미 사전에 갖춘 정보를 토대로 김정환 검사에 대해서 분석했다.
“......광중성자 선량 평가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폐 부위를 치료하고, 다시 묶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옆 부위를 다시 이동해서 다시 작업하고, 막아버리는 작업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폐 종양이 한쪽 모서리로 짠하고 몰리게 되죠. 딱 이때 이 부분을 깔끔하게 도려내면 폐암 3기 환자도 완치할 수 있습니다.”
오재호 박사는 폐 모형을 가지고 와서 치료 핑계로 미국에 갔다가 다시 슬그머니 국내에 들어온 김건중 회장 눈치를 봤다.
김건중 회장은 평소 중요한 결정 내리기 전에 필요하다면 노트북도 직접 자신이 분해해서 연구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는 다양한 질문을 해야 함에도 이전과는 달리 질문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학준 비서실장도 눈을 부릅뜨겠지만 역시 묵묵히 수긍만 했다.
오히려 오재호 박사가 무안해서 자신이 설명을 잘한 것인지, 눈만 끔뻑거렸다.
“수고했어.”
“아, 네, 넵.”
“결국 폐암 3기 환자도 이번 프로젝트에 추가로 들어가겠군.”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묵하는 두 사람 반응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로젝트 진행은 지금처럼 문제가 생기면 지속해서 보고하게.”
“그것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만 혹시 다른 의문점은 없습니까?”
“아, 한 가지. 이번 연구 보안 등급을 최대로 올리고, 지금까지 관련된 연구원에 대해서는 보안 각서를 추가로 받아. 특히 외부 병원에 알리는 것은 금지해. 대신 이번 달에 1억씩 성과보수는 따로 나갈 거야.”
“설마 학술 컨소시엄과 같은 연구 영역에서도 아예 모든 정보를 다 차단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
오재호 박사는 그제야 두 사람 눈치를 보면서 안색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마 심각한 두 사람 표정에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
김건중 회장은 오재호 박사가 사라지자 이학준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김정환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두선 건설에게 잼을 날린 김정환 검사는 우리 관리 대상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쪽을 파다가 지방 한직으로 좌천시킨 친구입니다. 그때 저희가 알아낸 것이 폐암이라서 내버려뒀습니다.”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냥 놔둬도 폐암으로 죽을 사람을 굳이 나서서 밟아버리는 것은 좀 아니었다.
“이번에도 검찰청 내부에서 승진 누락이 결정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성품도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원칙대로 들이받는 성격이라서 검찰청 내에서도 주의할 인물입니다.”
“이번 일도 독단적으로 한 일이고?”
“위에서 밀어주는 이가 있지만 사건 자체는 김정환 검사가 주도했다고 합니다.,.....그의 과거 전력을 고려할 때 만약 이번 폐암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흐지부지되지 않았을 겁니다.”
기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익숙한 ‘김정환 검사’ 이름 때문에 인상을 잔뜩 찡그린 김건중 회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실 조민호와 관련이 없다면 바로 김정환 검사 옷을 완전히 벗겼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친구일까. 자네가 따로 만나서 한 번 이야기해 봐.”
“......이미 과거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에 성격이 다혈질이고, 신념이 곧은 사람이라서 대화가 잘 안 됩니다. 저에게 오히려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일단 연결 고리는 만들어 놔. 어차피 거기 안 사람은 사업하잖아. 정 안 되면 그 안 사람 쪽에 적당하게 도움을 줘. 돈을 아끼지 마. 50억이 들던, 200억이던 알아서 연결 고리를 만들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민호와 관련된 정보는 모든 다 차단하겠습니다.”
“어차피 그 친구가 직접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괜한 불협화음은 만들지 말고. 개나 소나 조민호 그 친구 정보 다 알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잖아. 지금부터 미리 교통정리를 해둬.”
“네. 그리고 환자들을 통해서 흘러나가는 정보도 따로 관리하겠습니다. 마침 중아일보의 최영준 차장이 나름 조민호를 위해서 작업 중입니다. 그쪽과 만나서 협상해보겠습니다.”
“아, 영준이라고 했지. 최 회장에게 지분 10%를 받았고, 조민호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고?”
“최영준 와이프인 정연희 혼수 사태를 치료해준 후에 계속 친밀하게 지내면서 조민호를 돕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 녀석이 제법이네. 한 번 보자고 해.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약속 잡아.”
그도 장관조차 특별한 일이 있으면 만나지도 않은 김건중 회장이 먼저 나서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회장님과 직접 말입니까?”
“그 정도 안목이면 제법 괜찮아. 최 회장은 가까이하기에는 부담스럽지만, 그 친구도 그런 지 확인해봐야겠어.”
“설마 최영준 차장을 밀어주실 생각입니까?”
이미 중아그룹에 박아놓은 경영진 중에 과반수를 이용해서 알음알음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
김건중 회장도 중아그룹 차기 후계자 문제를 고민했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 일이 잘 끝나면 못할 이유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이학준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말 해봐.”
“그게 사실......아무래도 지수 아가씨가 조민호에게 호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
썰렁한 한마디 말.
최소한 분노까지는 아니라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 말 속에는 딱히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있다고 한다면 호기심 정도였다.
오히려 이학준 비서실장이 당황해서 김건중 회장을 쳐다보았다.
“회장님, 제 기우이지만 아무래도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젊은 남녀끼리 만나서 감정 느낄 수 있지. 없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냐? 내 딸이기는 하지만 지수가 예쁜 것은 사실이잖아.”
실제로 김지수는 어지간한 탤런트 못지않을 정도로 청순하면서 늘씬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학준 비서실장은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매우 놀랐다.
김건중 회장은 평소와는 달리 피식 가볍게 웃으면서 입가에 녹차를 축였다.
“내가 왜 그 신가 놈과의 결혼을 반대 했는지 잘 알잖아. 그놈과 연결된 다른 꿍꿍이가 있는 놈들 때문이란 거 자네도 알면서 그래.”
“죄송합니다.”
“아직 그 패거리 배후는 못 찾았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최근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누구야?”
“앨리엇 쪽과 연결된다는 것까지 밝혔지만 아직은 조사 중입니다.”
그도 최근 오성 그룹 지분을 노리는 이들 중의 하나가 앨리엇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미 이지수와 연결 고리를 끊었기에 다음으로 넘어갔다.
“앨리엇이라......,그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고, 지수 연애 문제라도 쓸데없이 간섭하지 마. 다만 뒤에서 돈을 노리는 벌레 같은 놈들을 따로 처리해.”
“......네.”
이학준 비서실장은 새삼 놀란 시선으로 김건중 회장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도 미처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는데, 김건중 회장은 김씨 일가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했다.
김지수가 재산이나 권력보다는 차라리 건강한 사내와 연결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민호는 그조차 다른 관점에서 지켜볼 정도로 독특했다.
‘건방진 놈.’
“참 지수 최종 검진 결과는?”
“완치입니다. 별다른 부작용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 아가씨 정상세포 염기서열을 토대로 한 결과와는 차이가 일부 발견되어서 조사 중입니다. 이 연구 결과에......”
“거기까지. 정말 놀랍군.”
그는 당장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과정보다는 결과에 만족해서 조용히 곧 눈을 감았다.
“혼자 있고 싶군.”
“편한 시간 되십시오.”
김건중 회장은 이학준 비서실장이 나가자 벽에 걸려 있는 오성 그룹 일 가족사진 앞으로 다가가서 부드럽게 만지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에서 해맑게 미소 짓는 김지수 모습은 천사처럼 밝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유전병 때문에 무려 20년 동안 마음고생 했다.
혹시라도 심하게 뛰는 날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말렸고, 스키같이 과격한 운동을 이런저런 핑계로 일절 하지 못하게 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어떤 수단을 써서도 막내를 치료하지 못했다.
아버지 가슴은 시간이 갈수록 찢어졌다.
그가 오죽하면 오성네트윅스 300만주, 애버랜드 지분 9%, 심지어 오성 SDS 지분 300만주를 막내에게 넘겼을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막내 치료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완치라니.
피도 눈물도 없다는 철혈의 기업가 소리를 듣는 냉혹한 그의 눈에는 어느덧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민호라......도대체 정체가 뭘까?’
***
종로구 수송동의 무정은 60년의 긴 전통을 가진 한식집이다.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 회장도 가끔 약속을 잡을 정도로 알려진 곳이다.
최영준 차장도 과거 아는 지인을 만날 때 간간이 이용한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이곳에서 기다렸다.
그는 마침 기다린 사람이 나타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맞은편에 와서 이학준 비서실장 부축을 받으면서 앉은 김건중 회장이 말했다.
“영준아, 오랜만이구나.”
“네.”
그는 정면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눈치만 봤다.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니라, 중아 홀딩스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오성 그룹과 중아 그룹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중아일보가 오성 그룹이 전혀 다른 회사처럼 겉으로 보이지만 실상 위장 분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