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전생자-37화 (37/176)

#037

“100억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나머지는 일이 잘 끝나면 그때 처리될 겁니다. 알다시피 우리도 신 사장이 나중에 가서 말 바꾸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30억이면 급한 불을 끄고, 나머지 20억이면 6개월은 버틸 겁니다. 아니 그 전에 우리 쪽에서 일감을 줄 테니, 회사는 잘 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전 몇 년 형 정도 나옵니까?”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서 반복한 행위이니, 업무상횡령죄에 속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금은 다시 회사에 내놓은 상황이니, 그런 부분도 참작됩니다. 거기에 벌금 한 번 내본 적이 없습니다. 업무상횡령죄는 10년 이하 징역이거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이니, 그 이하로 나올 겁니다. 대략 3년 정도지만 모범수로 석방되는 것을 고려하면 1년 정도, 아니 그 이하입니다.”

“확실합니까?”

“네. 대법원까지 질질 끌면 또 형량이 더 낮아지고, 중간에 적당히 타협하면 됩니다. 대신에 회사 미래를 위해서 모험하려다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점을 피력하세요. 회사 매출도 양호한 점도 참작됩니다. 그 부분은 우리 쪽에서 다 처리할 테니, 그저 잠깐 휴양지 가서 쉰다고 생각하세요. 감옥 배치도 가능하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할 겁니다.”

“후유.”

신현중 사장도 자신을 자책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굳이 자신이 나서서 비자금 내역 고발자가 될 수도 있지만, 김주옥 변호사 제안을 받았다.

‘나만 솔직하면 뭐해? 이 썩은 헬 조선에서 그걸 누가 알아줘?!’

***

신현중 사장이 중간에 말을 바꾸면서 수사는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경개발에서 나간 비자금 내역도 신현중 사장이 자신이 먹었다고 자인했다.

특히 김승환 부장이나 양용운 과장도 말을 바꾸었는데, 심지어 김승환 부장은 특히 자신이 진짜 빼돌린 횡령 내역까지 스스로 공개하면서 멋진 할리우드 눈물 연기까지 발휘했다.

“제가 범인입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겠습니다. 어떤 처벌도 달리 받겠습니다.”

김승환 부장은 중간에 비자금을 처리하면서 실제로 그중에 일부를 다시 먹었고, 그 돈을 다른 중소기업에 자금 출자 방식으로 투자한 돈을 토해냈다.

이창학 부장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동행한 변호사가 교대로 돌면서 이창학 부장 대변인 노릇을 하는데, 심문하는 담당 검사로서 뾰쪽한 수가 없었다.

설사 처벌한다고 해도 이미 여대생 측에서 말을 바꾸어서 강간이 아니라, 마약 섹스 파티로 또 사건이 변해버렸다.

여대생도 위증이라고 협박할 수 있겠지만, 이거 역시 김주옥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그 정말 이상한 분들이군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검사 때문에 그분들도 충격받아서 말실수한 겁니다. 정 자신 있으면 위증죄로 고소하세요!”

“......”

그러니 종영돈 부장검사도 이봉기 수사관도 전광석화 같은 두선 건설의 날카로운 반격에 허탈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특히 놀란 것은 강간을 당했던 여대생이 오히려 마약에, 섹스 파티를 즐겼지만, 겁이 나서 거짓말했다고 뻔뻔하게 말한 것에 더 충격받았다.

마약도 강제가 아니었으니, 고작 위증죄에 불과한데, 이것은 중앙지검에서 수사할 사건이 아니었다.

‘안이했어.’

***

비자금이 흘러간 내용이 있다고 해도 신현중 사장이 자백을 시작으로 모든 혐의자가 조직적으로 자백하면서 두선 건설 비자금과 앨리엇 수사는 탄력을 받지 못했다.

그들 각자는 처벌을 받겠지만, 대부분이 벌금 한 번 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정말 심하게 나와 봐야 징역 3년형인데, 그것도 대법원까지 가면 집행 유예가 될 것이 뻔했다.

조민호도 뒤늦게 최영준 차장에게서 돌아가는 이상한 상황을 듣고는 혀를 찼는데, 가장 큰 실망한 이들이 바로 여대생 피해자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죠?”

“그게 한국 대기업의 힘이네.”

“강간당한 여대생들은 왜 그런 겁니까?”

“조사해보니, 한 사람당 대략 1억 정도 합의금을 받았나 봐. 솔직히 개들 처지에서 섹스 한 번 하고 1억 버는 건데, 합의 하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그러면 알파 펀드나 로이스 펀드를 조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증거가 없어. 아니 설사 있다고 해도 그 출처가 문제야. 오성 X파일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면 더 팔 수도 있지만 그게 또 쉽지 않아.”

“최영민 팀장은 어때요?”

“그쪽에서는 자네가 신호 보내면 바로 시작해. 문제는 그들이 끼어들면 지금도 이번 일의 배후를 찾는다고 혈안이 된 두선 건설 윗선에서 알아챌 거야. 그러면 일이 생각처럼 간단하게 끝나지 않아.”

그가 이런 점을 확신하는 이유도 있었다.

“두선 그룹은 몇 년 전에 형제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그룹이 쑥대밭이 되었어. 회장을 퇴출하고, 비자금 조성과 탈세 폭로전을 펼쳤어. 결국, 회사가 어려워지자 OC 맥주를 비롯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하면서 현금을 확보했고, 중공업 쪽으로 매진하는 중이라서 극도로 예민해.”

사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모은 현금을 사용해서 최대한 인수 합병에 나섰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고한 산업 개발과 대우 기계를 비롯한 해외 기업 인수에도 열을 올렸다.

“그 말씀은 그들이 사용한 비자금이 꼭 오너 배를 불리기가 아니라, 해외 회사를 사들일 총알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반반일 거야. 중장비 관련 원천 기술 회사를 확보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잖아. 내 말은 굳이 두선 그룹 내부일까지 관여할 필요가 있겠어?”

조민호도 어쩌다가 이 일이 요 모양이 된 걸까를 고민하면서 여대생의 배신을 떠올리면서 깊은 회의감을 느꼈고, 잠깐 수사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조금만 더 지켜보죠.”

“현명한 결정이네.”

***

두선 건설 비자금 의혹 검찰 수사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잃어갔지만, 언론 매체는 그들과는 달리 오히려 더 이 사건에 적극 끼어들었다.

재벌가 3세의 그룹 섹스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진 터라, 여기에 대한 대중의 관음증은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다.

비자금이 아니라, 이제는 마약 섹스 파티에 대중에 더 관심을 드러냈다.

언론은 여기에 기꺼이 협조했다.

그들은 이 와중에 특종을 나눠 먹기를 한 최영준 차장을 다시 봤다.

최영준 차장의 언론계 영향력이 더 커졌다.

최석준 회장조차 따로 그를 불렀다.

“어제 동이 일보 회장을 만났는데, 네 칭찬을 하더구나. 아니 다른 언론사도 다들 비슷해. 다들 네 이야기만 하더라. 냉철한 이성으로 언론업계를 대의적으로 본다는 개소리를 하던데, 뭐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번 일도 잘했다.”

“아닙니다.”

“상대하기 힘든 적을 상대로 욕심내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서 연합 전선을 형성한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아.”

“감사합니다.”

“특종에 대한 유혹이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다.”

“네.”

“훌륭했다. 앞으로도 잘 지켜보마.”

“......”

최영준 차장도 이걸 좋아해야 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부담스럽네. 확실히 여기서 더 나가면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었어.’

***

흔한 길거리 카페 한쪽의 TV 뉴스에서 두선 건설 비자금 수사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은 시민 단체 삼백여 명이 검찰청 앞으로 몰려와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어지는 뉴스에서는 연일 마약 클럽과 두선 건설 비자금 연루 의혹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일주일 만에 조민호를 다시 만난 최영준 차장은 자신이 뿌린 정보 때문에 점점 커지고 있는 일에 딱히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여기서 기름만 살짝 뿌리면 활활 타오를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렇게 되었을 때 두선 건설에서 가만히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좋은데......’

조민호는 그냥 구경만 해도 사건이 점점 그 덩치를 키워가자 안 그래도 오성 그룹 김건중 회장과 힘겨루기를 하는데, 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수사는 관심 없고, 다들 섹스 파티에만 관심을 기울이네요.”

“중간에 마음에 돌린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한 것도 있지만, 거기에 검찰청 내부에서 계속 수사팀을 입력하는 것도 문제야. 두선 건설 측과 딜을 해서 물타기 기사를 올리는 이도 있어.”

차라리 이경개발이 자본 잠식 상태 정도였다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횡령만, 그것도 회사 미래 가치를 위해서 다른 사업 분야를 넓히기 위함이라고 핑계 대는 경우는 소송 들어가면 처벌 수위가 높을 수 없다.

“한국 검사도 겨우 그 정도인가요?”

“이번 수사는 너무 성급했어. 김정환 검사가 이 일을 맡았다면 좀 다르게 흘렀을 거야. 그런데 알다시피 지금은 병원에 있어.”

“아쉽네요.”

그도 혀를 차면서 목표한 타켓에 집중했다.

“앨리엇은 어때요?”

“그게 아무런 반응이 없어.”

“네? 아니 그놈들 비자금이 터지게 생겼는데, 그냥 있다고요?”

“미국 국세청과 FBI와 진행한 소송도 정신이 없는데, 거기에 지금 미국 증권 거래위원회에서 델파이 회사채 매입 조사에 착수했어. 선임한 변호사만 해도 무려 20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앨리엇은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델파이 회사채 매입도 그 중에 하나다.

발행 기업 재정이 나빠지면 상환 자체가 어려워져서 회사채가 폭락한다.

앨리엇은 이런 점을 악용해서 델파이 회사채를 저렴한 가격에 사들였다.

문제는 이 와중에 앨리엇이 의도적으로 델파이가 분식 회계했다는 점을 부풀려서 회사채를 폭락시켰다는 점이다.

이 일은 GN이나 클라이슬러 매출 악화 문제가 결합하여 있다.

두 회사는 델파이 부품을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만약 미국 정부에서 두 회사를 돕기 위해서는 델파이 채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앨리엇이 바로 이런 점을 악용해서 배짱을 튕기고 있었다.

그들은 그나마 박상철 사태 때문에 델파이 회사채를 목표량까지 모으지 못했다.

미국 증권 거래 위원회는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서 명분을 얻자 제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조민호도 자기가 뿌린 씨앗이 발화되어서 아직도 헤매는 앨리엇의 본사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점을 보면서 혀를 찼다.

“한국 비자금 정도는 푼돈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봐야 할 거야.”

그도 앨리엇이 아직 배후라고 확신하지 못해서 적극 나서지 못했다.

“그러면 곧 퇴원하는 김정환 검사에게 한 번 맡겨 둡시다. 그 양반도 집요한 면만 놓고 보니 무시무시하더군요. 두선 건설 비자금 사건도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린 그냥 팝콘이나 먹으면서 불구경이나 하죠.”

최영준 차장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김정환 검사 과거 이력을 떠올리면서 이제 자기 손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에 한 숨을 내쉬었다.

‘느낌이 안 좋아.’

***

화창한 가을 날씨가 성큼 다가와서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은 높고도 높았다. 좋은 날씨 탓에 가족끼리 공원에 놀러 가는 인파도 작지 않았다.

김정환 검사는 병원을 나서면서 힐끗 한 무리의 의사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잠깐 인사만 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정밀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오성 의료원을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숲이 병원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인지 공기는 서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

그는 잠깐 멈춘 채 깊이 심호흡했다.

맑은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우면서 몸의 신진대사를 한껏 자극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그날.

숨 한 번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끔찍한 고통은 온대 간대 사라졌다.

지금 남은 것은 전성기 시절보다 넘쳐나는 활기였다.

그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심호흡뿐만 아니라, 활력이, 특히 지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는 것을 확신했다.

수술 때문에 이럴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직도 오성 의료원에서 유명한 명의들이 떼로 몰려서 입맛을 다시면서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화타의 재림일까? 아니야. 신의(神醫) 같은 류가 절대로 아니었어. 그때 보여준 패기는 차라리 마왕에 더 가까웠어.’

0